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원욱스님의 스님이야기】흥선 스님 -1
불교문화재 해박한 지식


직지사 박물관장 소임



몇 해전 나는 유홍준 교수의 한국미술사 강좌를 들으러 열심히 다녔다. 그 강좌가 종강된 후에도 전국의 문화유산들을 찾아 답사를 다녔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절집들이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 오랫동안 나를 행복하게 했다. 아마 그 무렵이지 않았을까. 지금은 그곳이 어딘지 기억도 아스라하지만 어느 고찰이었던 것 같다. 안내가 끝나고 고목 그루터기에 앉아 쉬고 있던 내 귀에 가을바람에 실려 나지막히 글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함께 답사온 비구스님이 사찰 입구 한 쪽에 서있는 비석의 비문을 능숙하게 읽어 내려가며 회원들에게 옛 스님의 행장을 쉽게 풀이해 주고 있었다. 젊은 비구스님이 다 깎여 흐릿해진 비문을 외다시피 술술 읽는 것에 깜짝 놀랐다. 사실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영향 탓으로 능숙한 번역솜씨를 지닌 스님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그 스님의 학문적 식견은 감탄할 만했다. 그 스님이 흥선(興善) 스님이었다.


내가 다가가 인사를 하며 놀랐다고 하자 스님은 멋적어 하시며 글 읽는 중으로 당연한 일이라며 얼굴을 붉혔다. 흥선 스님은 그후에도 오랫동안 답사회에 나오면서 불교유적, 특히 비문과 사찰연혁기들을 그 해박한 지식을 통해 알기 쉽게 설명하곤 했다. 스님의 비문강의를 들으려는 이들은 답사행렬에서 슬쩍 빠져 나와 스님뒤만 따라 다녔고 난 한발짝 뒤로 물러나 경청했다.


적멸보궁이 있는 태백의 정암사에 머물던 스님은 내게 기도하러 오라고 했지만 나는 내 사는 것이 바빠서 정암사로 스님을 뵈러 가지 못했다. 소식이 궁금해 질 때쯤 스님이 그곳을 떠나 직지사 박물관장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 스님만큼 불교문화재와 우리문화 유산에 대해 해박한 이도 드문지라 아주 적합한 소임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근처에 살고 있었으므로 스님을 만나러 갔다.


박물관은 기존에 있던 당우를 적절하게 수리하여 막 개관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작지만 탱화와 불교미술품들이 제 자리를 잡고 있으니 기품이 흐르는 공간으로 변해있었다. 박물관장 소임 맡으신 것 축하드린다고 하자 차 한잔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들에게 탱화나 불상은 당연히 존귀한 예배의 대상이지만 문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가 높아지면서 뜻하지 않게 문화재 전문 도둑들에 의해 수난을 겪는 세상이 되었지요. 관리소홀과 인식부족으로 도난되거나 훼손되기 일쑤이니 종단에서 큰 맘을 먹고 각 본사별로 해당말사에서 자체적 경비를 할 수 없는 문화재급 성보들을 모아 박물관을 개설토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말사의 귀중한 성보를 모아 놓고 보존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요. 직지사를 찾는 이들에게 또 다른 신앙의 귀의처가 되도록 해야만 종단의 뜻에 따라 성보를 보내준 말사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지요. 수장고에 가득한 유물들을 보존하고 관리하는데 각별히 신경 써야 하건만 박물관 전용건물이 아니라 습도 등 여러 가지 문제로 매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개관전시를 마치고 나면 성보를 분류하여 박물관도록을 만들려고 합니다. 사중에서 각별한 관심을 지니고 계신지라 어깨가 무겁습니다. 얼마 전에 통도사 박물관에 갔는데 아주 감동했습니다. 사찰 박물관들의 본보기가 되어도 손색이 없더군요. 그렇게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스님을 따라 박물관 수장고를 들여다보았는데 아주 작은 방에 빼곡이 들어 있는 성보들이 하나같이 귀한 것들인지라 마음까지 경건해졌다. 스님은 아마 이 아름다운 성보들을 하나하나 빛나는 보석처럼 박물관 내에 잘 보존하고 전시하실 것이리라.


그 뒤 직지사 박물관에서 고승진영특별전시가 있었다. 그 옛날, 이름을 떨치셨던 큰스님들의 초상화가 진영각을 떠나 흥선 스님의 남다른 꼼꼼함과 뛰어난 안목을 거쳐 직지사 박물관을 무언의 설법장으로 만들었다. 그 뒤 서울로 스님과 동행할 일이 있었는데 뭔지 보자기에 싼 조그만 물건을 애지중지하며 손에서 놓지를 않기에 뭐냐고 물어봤다.


“오래된 경전입니다. 직지사 박물관에서 구입하려 했는데 예산부족으로 되돌려 주러 가는 길이지요. 제 마음엔 제가 이 소임을 맡고 있는 동안에 인연이 되는 유물은 가급적이면 구입하고 싶지만 예산이 넉넉지 못하다 보니 유물구입에 어려움이 큽니다. 사실 불자들이 불사에 시주하는 것도 좋지만 박물관에 시주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스님, 그 경전 얼마면 살 수 있어요?”“아이고오! 내가 괜한 소리했습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답답한 마음에 그만…”


나는 부득불 스님을 졸라 그 가격이 얼마인지 들었다.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스님의 착잡한 얼굴을 옆에서 지켜보며 나도 우리들의 암울한 현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계속>


■반야사 주지

2001-10-24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