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원욱스님의 스님이야기】흥선 스님 -2
탁본 남다른 재주와 열정


타고난 불교문화 지킴이



<전호에 이어>


불교문화는 우리에게 신앙이며 귀의처인 동시에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방식의 정직한 표정이고 사상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사찰의 신축건물 불사에 못지않은 공덕과 문화적 자존심을 높이는 일이건만 스님들도 불자들도 너무 무관심하다. 사찰의 재정이 넉넉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불교문화재를 한 개인의 소장품으로 있게 하기엔 너무 안스러운 일이다. 사찰 문화유산을 보수하거나 보존하는 차원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지만 유물 구입에 관해서는 오로지 사찰의 문제이므로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건물 신축 불사에만 정성을 다할 것이 아니라 불교문화재를 구입하는데 아낌없이 시주할 수 있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흥선 스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서울까지 왔다.


스님은 며칠간 서울에 머무른다며 오늘은 초서(草書)를 공부하러 간다고 한다. 난 글자가 똑똑 떨어지는 독초(獨草)는 좀 알겠는데 글자의 획이 주르륵 이어진 연면초(連綿草)는 그냥 이응노의 문자그림과 같건만 스님은 그 초서를 배우러 다닌다 하니 나날이 깊어 가는 스님의 학문에 머리가 숙여진다. 하긴 그렇게 공부했으니 절집의 온갖 비문과 경서들을 섭렵할 수 있을 것이다.


스님은 또하나 남다른 재주가 있는데 탁본을 기가 막히게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에게 ‘현대불교’에 흥선 스님에 대해 쓸 예정이라고 하자 한마디로 평한다.


“흥선 스님이야 명탁(名拓)이지.” 흥선 스님이 한 탁본 가운데 잘 된 것 몇 개를 짚어 달라고 하자 ‘상주남산 석각비천상(石刻飛天像)’을 꼽는다. 다른 것들은 다 판판한 돌에서 탁본한 것이지만 이것은 울툭불툭한 화강암 판석에서 한 탁본이라 더욱 어렵고 힘들게 된 것인데 매우 아름답게 됐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학고재화랑에서 ‘한국문화유산답사회 탁본전’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흥선 스님의 작품이었다. 거기서 본 비천상은 마치 금방이라도 발을 내딛어 나올 것만 같이 생생한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탁본을 보며 돌 속에 담긴 이미지와 느낌, 움직임까지 받았다면 그건 탁본으로는 성공한 것이다. 고창 선운사에 가면 추사가 남긴 백파선사의 비가 있다.‘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쓴 추사의 글씨는 반듯하며 장중한 느낌을 지니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하는 비문이다. 답사 길에서 그 비석 앞에 선 흥선 스님은 이 좋은 비석을 탁본을 잘못 하여 다 망가트려 놓았다며 안타까워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탁본을 잘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요샌 아예 탁본 자체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옛날에는 주지스님에게 잘 말씀드리면 할 수 있었는데 잘못된 탁본지식을 가진 이들이 비석에 온통 먹칠을 해 놓고 가는 바람에 스님들조차 할 수가 없게 돼버렸어요. 탁본에는 습탁과 건탁이 있는데 습탁은 말 그대로 비석에 종이를 물로 붙이고 먹물을 솜방망이에 묻혀 가볍게 두드리면 글자와 문양이 살아납니다. 이 습탁은 오랜 경험으로 먹물의 농도와 두드리는 손의 힘이 적절해야 아름다운 탁본을 만들 수 있지요. 그런데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이게 추사친필이라 하니 탁본을 하려는 욕심으로 비석에 먹물을 마구 발라 놓고 종이로 찍어내는 바람에 비석이 먹물로 얼룩덜룩 물들어져 있는 겁니다. 또 건탁이 있는데 이건 종이를 대고 딱딱한 먹으로 문질러 글자와 문양이 살아나게 하는 방법이지요. 또 오금탁이니 격마탁, 선익탁이라고 하는 게 있어요. 나중에 직접 만들 기회가 있으면 한 번 같이 하시지요.”


그렇게 탁본에 대해 해박한 흥선 스님의 탁본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매우 단아하다. 다른 이들의 탁본은 먹물이나 힘이 분산되어 가끔 얼룩덜룩하게 물결 무늬가 일기도 하는데 스님의 탁본은 깊고 고요한 바닷물 위에 글자가 솟아오른 것처럼 평정을 잃지 않고, 엷은 먹물로 된 것은 안개 속에서 피어나는 꽃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깊은 신심으로 가득한 수행자가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스님은 요즘 불교교양대학에서 그 동안 답사 길에서 만난 성보와 많은 문화유산들을 슬라이드로 만들어 강의를 하고 있다. 우리 불자들에게 부처님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이 지닌 의미를 가슴깊이 느끼고 정겹고 소중하게 여기며 더욱 신심 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 믿는다.


스님에게는 좋은 시주인연이 되어줄 선남선녀들이 무수히 생겨나 직지사 박물관이 더욱 빛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흥선 스님은 불교문화유산을 지키고 전하는 소임으로 깊은 수행의 길로 가고 있는 분이다. 그런 점에서 스님이 박물관장 소임을 오래오래 하셨으면 좋겠다. <끝>


■반야사 주지

2001-10-31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