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의 고통과 비탄 ‘함께’
병이 든다는 것, 나는 그것을 불행이라고 말하기보다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병이 들면 비탄에 잠겨 남은 인생을 눈물로 살아가기도 하고, 병마와 싸우며 병들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애쓰기도 한다. 아니면 병과 함께 남은 삶을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될 때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쓸쓸하게 된다. 그 외로운 길의 도반이 되어 고통과 슬픔을 십년동안 함께 해오고 있는 내 자랑스런 도반이 있다.
지홍(智弘) 스님. 우리들이 학교졸업하던 해에 배시시 웃으며 서울중앙병원 안에 법당이 생겨서 지도법사로 봉사하러 간다고 하더니 벌써 중앙병원 지도법사로 지낸지 십년째다. 그렇게 오래하게 될 줄 본인도 몰랐다고 하지만 우리도 새삼 놀라고 있다. 사실 병자를 매일 만난다는 것은 어지간한 자비심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건만 스님은 삶과 죽음이 다반사인 그 곳에서 어떤 깨달음을 찾는지 흔들림 없이 그 자릴 지키고 있다. 십년이 되도록 난 그 병원엘 못 갔다. 어쩌면 내가 병고에 시달렸던 세월이어서 더 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스님이 우리 절에 왔다가 두루마기를 놓고 가는 바람에 두루마기를 돌려준다는 구실을 내세워 병원법당으로 스님을 만나러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자 ‘약사여래불’ 독경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병원의 환자들이 이 소리를 들으며 부처님을 찾아오는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법당을 찾은 이들의 병고를 부처님이 다 거두어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했다. 법당은 아주 작았다. 열 서너평쯤 될까 싶은데 아주 아늑한 곳이었다. 막 환자의 가족인 듯한 청년이 상담을 마치고 지홍 스님께 합장하고 법당을 나갔다.
“와! 좋다. 이 병원법당은 다른 병원이랑 좀 다르네! 여기서 지내니 좋누?”
“스님아. 좋은 게 다 뭐고? 내 얼마나 바쁜 줄 아나? 말마래이. 여기 있다보면 금방 하루가 가버려. 좋고 나쁘다는 생각을 아예 못하지. 삶과 죽음이 좌악 흘러간다 아이가! 여기가 내 공부터지 뭐. 환자와 그 가족 몸에 묻은 고통과 슬픔을 기도와 상담을 통해서 스스로 털어 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쏟는 정성은 자원봉사자들의 힘이 아니면 어려워. 모두들 신심을 다해 정성껏 하니 나 또한 함께 하는 거지. 요즘엔 뇌사판정위원이어서 새벽에도 호출이 오면 병원에 나와야 해.”
“봉사하는 삶이 힘들겠지만 내 보기엔 좋다. 스님이 애쓰는 것도 좋고 이 큰 병원에 법당있어 좋고 그렇네?”짧은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영안실에서 전화가 왔다. 스님은 영안실 염불은 못 간다고 했다. 영안실 시다림 염불은 불자들이 다니는 절의 스님들이 오셔서 하도록 주선했다. 스님은 법당에서 기도와 상담을 하고 병실로 환자 방문하기에도 빠듯하기 때문이란다. 마침 운문사 강주스님께서 문상을 오셔서 인사드리러 간다기에 따라 나섰다. 강주스님은 지홍스님이 마냥 대견한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문상을 마치고 커다란 병원로비를 지날 때 지홍스님이 나를 보며 말했다. “이곳에 하루에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물처럼 흘러 들어왔다가 흘러나가지. 두려움과 슬픔, 희망의 마음으로 말이야. 머무는 법이 없어. 모두가 흘러가.”
법당에 돌아오니 온 몸이 까맣게 타버린 듯한 청년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간이식수술 후유증이란다. 그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얼마 전에 영안실에 그대 이름이 있어 깜짝 놀라 한달음에 달려가 보니 영정사진이 노인이어서 참말로 다행이었다며 반가워하자 청년은 부끄러움과 고마움에 연신 스님께 합장을 한다. 그 모습에 가슴이 저려왔다.
‘사자를 가르쳐 연꽃 피우게 하고/새벽종 울리어 거친 바다 재워서/우주를 지키는 우리 영원한 목숨/진리에 하늘에 길이 비치게 하리/중생의 설움은 우리네 설움이요/중생의 고난은 우리네 고난이니/우리는 언제나 맑고 맑게 도웁고/어디서나 우리는 밝게 고쳐내리라/이 세상 승가에 모든 길은/우리들의 승가대학에서’
돌아오는 차안에서 나는 오랜만에 교가를 소리높여 불러봤다. 학교 다닐 땐 느껴보지 못했던 가사의 엄숙함과 지홍스님의 사는 모습에 스스로 감동해서 목젖이 뻣뻣해졌다. 매일 환자들과 함께 108배를 하고, 병실을 돌며 가족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고, 병원의 임상연구가 윤리적으로 옳은 가에 대한 판단을 하기도 하고 뇌사판정에 대한 마지막 검증을 하기 위해 온 몸을 던져 봉사하고 있는 지홍 스님. 우리들이 4년간 불렀던, 서정주님이 지으셨던 그 교가 가사처럼 스님은 병고의 거친 바닷 속에 피어난 한 떨기 연꽃이 되어 병자의 설움과 고난을 함께 하며 세상을 밝힐 등불로 빛나고 있다.
■반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