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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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욱스님의 스님이야기】기성스님
‘의리의 돌쇠’같은 삶

대중생활의 버팀목



승속을 막론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참 힘들다. 아름답고 즐거운 일들이 넘쳐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생노병사를 지닌 그 자체만으로도 점점 힘들어진다. 물론 지혜로운 이는 고(苦)로 가득찬 삶을 슬기롭게 이겨나간다. 그 슬기로운 삶은 혼자 힘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곁에 늘 도반들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도반이란 세속에서 말하는 친구의 의미를 넘어선다. 수행의 길을 함께 가는 길벗이면서, 때로는 선지식 역할까지 해야 하는 존재이다.


지난 여름, 장마가 처음 시작될 무렵 삼천포에 홀로 사는 내 도반이 수재를 만나 큰 피해를 봤다. 산중에 혼자 살다 그러한 재난을 만나면 황당하기 짝이 없어 무엇을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더구나 수재를 겪게 되면 물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밀려든 토사와 소중한 모든 것들이 다 쓰레기가 되어버려, 그것을 치우는 일만도 엄청나 아예 기가 질려버린다. 나는 수재 소식을 들었지만 벌려놓은 일 때문에 금방 내려가 보지 못하고 애만 태우고 있었다. 다행히 강원도에 사는 도반과 삼천포 근처의 도반들이 모여 복구를 도와주었는데 그만, 그 날 내 도반은 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쳤다.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고 남은 수해복구를 후배인 기성(起性) 스님이 도맡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성스님. 내 기억 속에 그는 자그마한 체구에 당당함이 넘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할 뿐더러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때엔 어김없이 나타나 힘이 되어주는 ‘의리파’다. 게다가 ‘고집’이라 부르는 아주 대단하고 강한 의지력이 있어, 칭찬이나 비난의 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와도 절대 동요하지 않는, 빛나는 현명함을 지닌 스님이다. 수좌로 제방을 누비고 다니더니 진주 명석면 대덕암에 걸망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살펴보니 근처에 아는 스님들이 많이 살고 있어 든든한 마음이 들던 차에 삼천포에서 수재를 당한 스님 소식을 듣자마자 한 걸음에 달려와 그 힘든 일들을 마다 않고 했다는 것이다. 병원에 입원한 스님 보살피랴, 수재가 난 절을 청소하랴 동분서주하면서 애쓰는 모습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병원으로 찾아간 내게 도반스님은 기성스님이 관세음보살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해라는 재해는 만났지만 고마운 스님을 만난 것은 새로운 기쁨이라며 즐거워했다.


그 험난한 여름이 지나가고 초겨울이 왔을 때 어느 도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마침 발인이 다음날 아침이라 나는 벽제화장터로 갔다. 거기서 기성스님을 보게 됐다. 15년만이었다. 우리는 그곳이 화장터인 것도 아랑곳 없이 박장대소하며 반가워 했다. 예전의 청순함(?)은 사라지고 조금은 나이든 모양새를 풍기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기성스님, 몸이 좀 불긴 했어도 여전히 그대로네! 그나 저나 여름에 애썼지요? 병원 쫓아다니느라고 고생했겠어요.” “하하! 고생은 무슨 고생. 함께 사는 거지요, 뭐. 힘들 때도 즐거울 때도 다 함께 할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잖아요. 그리고 내가 본래 ‘의리의 돌쇠’잖아~. 우하하!”


‘의리의 돌쇠’ 그야말로 딱 어울리는 표현인데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대중에서 함께 살며 수행을 하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나 홀로 토굴에 정착하게 되면, 수행과 운신의 폭도 함께 좁아져서 생각이 단조롭고 이기적으로 변하기 쉽다. 하지만 대중속에서는 늘 묵묵히 수행하며 타인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스님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런 삶이 대중을 화합하게 하고 대중생활의 존립에 버팀목이 되어준다. 두 무더기의 갈대단처럼,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만 서 있을 수 있고 만일 하나를 치워 버리면 다른 갈대단도 쓰러질 수밖에 없다. 내가 있음으로 네가 존재하며 네가 있음으로 내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기의 도리를 살펴 잘 안다면 우리가 만난 모든 인연의 소중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날 기성스님은 그 많은 도반들을 뒤로 하고 상주인 스님과 함께 유골함을 모시고 비행기를 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만났을 때는 상대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부르면 곧바로 달려가고 함께 하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지만 그것도 무상한지라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 처음의 마음에서 벗어나 심드렁해지거나 무덤덤하게들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기성 스님은 언제나 한결 같다.


부처님께서는 <인과경>에서 말씀하셨다. “벗 사이에도 세가지 긴요한 일이 있으니, 첫째는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며, 둘째는 좋은 일은 마음깊이 함께 기뻐하고, 셋째는 불행할 때 서로 버리지 않음이라.” 기성스님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도반이다. 힘들 때도 즐거울 때도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는, 도반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 반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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