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학들에 자상한 경책
해맑은 미소를 오래 간직하기란 쉽지 않다.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살아온 인생이 얼굴에 고스란히 다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수덕사 견성암에서 오랫동안 입승을 지낸 효명(曉明) 스님은 아주 맑고 부드러운 미소를 늘 간직하고 계신 분이다. 이십년전에 봤던 그분의 따사로운 미소는 아직도 변함없다. 늘 끊임없이 정진하시며 일생을 납자로 살아가시는 그분의 삶이 그 미소속에 다 녹아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타는 듯한 분노와 고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스님 앞에서는 봄날의 눈처럼 녹지 않을 수 없다.
효명 스님은 아마 환갑을 훌쩍 넘기셨을 텐데도 그 고요함과 맑은 미소 탓인지 아주 활기차 보이시고 모든 이들을 따사로운 마음으로 감싸고 고요히 참선의 길로 이끌고 계신다.
견성암 행자시절에 난 유독히 잠이 많았다. 새벽에 도량석하러 나가서는 큰 절 범종소리가 잦아들면 시작해야 하는데 그만 계단에 쭈그리고 잠이 들기도 하고, 예불시간에 절하다가 잠이 들어 못 일어나고, 천수 목탁 치다가 목탁채를 놓치고 잠 잘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고 웃음이 난다. 그것도 모자라 병든 닭처럼 틈만 보이면 주저앉아 끄덕거리며 졸기 일쑤였다. 그 때 우리 은사스님과 효명스님은 당시 수덕사 조실이셨던 혜암 큰스님을 시봉하시느라 수덕사에 계셨는데 시간만 나면 큰스님 가르침도 듣고 쏟아지는 잠도 물리치느라 큰 절 발걸음을 자주 했다.
아마 그 날도 큰스님께 인사 올리고 뒷방으로 가자마자 차가운 바닥에 몸을 눕히고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얼마쯤 잤을까 내 허리와 배 쪽으로 아주 따뜻한 것이 쓰윽 들어오고 있었다.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효명스님이 웃으시며 차가운 방에서 누워 자면 감기 걸리니 따뜻한 찜질팩을 안고 조금 더 누었다가 견성암으로 가라고 하셨다. 다른 사람 같으면 후다닥 놀라서 갔으련만 나는 배짱 좋게 정말 저녁 공양 준비할 때가 되어서야 부시시 일어나서 왔다.
다음 날, 큰절에 내려갔더니 우리 스님은 안 계시고 효명스님만 큰스님 곁에 계셨다. 스님은 그날 내게 차담을 주시며 앉아보라고 하셨다.
“원욱이, 견성암에서 채공 사는 거 많이 고단하지? 일도 안해 봤을텐데 열심히 잘 하려고 애쓰는 것 보면 참 대견하구나. 그런데 말이다. 도 닦는 이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수마(睡魔)란다. 수마는 마치 밤벌레가 밤을 갉아먹는 것처럼 수행자의 몸을 갉아먹는단다. 수마를 견디어 내지 못하면 아주 게으른 사람이 돼요. 게으름은 마치 독이 든 음식과 같아 처음에는 향기로운 맛이 나더라도 마침내는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그 해태(懈怠)의 검은 구름이 온갖 환한 지혜를 덮어 공덕을 없애지. 피곤함과 나른함을 핑계로 결국엔 잠에 질질 끌려 다니게 되니 일대사 인연을 끊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온 네가 기껏해서 잠에게 목덜미를 잡혀서야 되겠니? 똑똑해서 부처님 경전을 가로 세로로 다 읽어도 수마를 조복받지 못하면 도로아미타불이야. 우리 원욱이, 다 잘하는데 그 잠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잠은 아주 게으름중에서도 근본이 되는 것이니 삼가 경계하려무나. 본래 절에 처음 오면 이것저것 낯선 것들과 조화를 이루느라 긴장하느라 잠이 많이 오기도 하지. 느그 스님이 네가 몸이 약해서 그런다고 걱정하시더라. 그러나 다 마음먹기 나름이야.”
틈만 나면 졸고 또 졸던 나는 생각할수록 부끄러웠다. 다음날부터 효명스님 말씀처럼 잠이 오면 밤벌레를 생각했다. 내 몸을 갉아먹고 있을 밤벌레를 생각하며 졸음과 싸우며 큰절에 내려가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다스리려 무진 애를 썼다.
해태라는 놈은 원래 무지라는 근본 번뇌에 속해서 바른 것에 대한 믿음이 없는 불신에서 생기며 적극적이거나 과감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악을 끊고 선을 닦는 일에는 적극적이지 못하니 시도 때도 없이 잠들고 기대며 길게 드러눕는 안락함에 슬슬 빠져드는 것이다. 그럴수록 나태해져서 점점 수행에 힘쓰지 않게 되니 이것은 바로 더러움에 이르는 문이며, 죽음에 이르는 문이 된다고 부처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신다.
얼마 후에 효명스님을 뵈러가니 내게 <열반경>을 주시면서 밑줄친 곳을 읽으라고 하셨다. 지금도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 늘 게으르지 않으려 애쓰는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 말씀이다.
“세상의 악한 행위를 즐겨하고 무익한 말을 즐기며 잠을 즐기고 세속 이익을 즐겨함이라. 또한 나쁜 벗을 가까이 하고 항상 게으르고 태만하며 늘 남을 경멸하고 무엇을 들으면 이내 잊어버리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살길 즐기며 감관들을 제어하지 못함이요. 또 살아가는데 만족할 줄을 모르며 완전한 고립을 즐기고 소견이 바르지 못함이니 삼가 경계해야 한다.” ■서울 반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