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 종무전산화로 재정 투명화
본사 주지이면서 자동차도 없어
세상사람들의 권위는 대개 자신의 신분과 명예에 의해 결정된다. 명함에 그어진 몇 줄이 사라지고 나면 자신이 권위라고 믿었던 것들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런데도 그 별 볼일 없는 것들에게 휘둘려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비해 출가자의 권위라는 것은 당연히 그의 수행력에 따라 결정이 된다. 그 분들의 수행을 내가 한마디로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휘익 일어나는 바람처럼 느낄 수는 있다. 세간에선 불혹의 나이가 되면 자신의 얼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지만 불가에선 수행자의 눈을 통해 그가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발심하에 수행하는 이의 눈동자는 유난히 반짝인다. 공부에너지가 모여서 빛나기 때문인데 마치 돋보기로 햇빛을 담아 종이에 쏟아부으면 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바로 지혜의 불이다. 안광이 혁혁한 것을 자랑삼아 사람으로 하여금 그 기세에 눌려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마른 지혜의 불꽃이 아니다. 자비심이 그득한, 내면 깊숙이 자리한 수행의 향기가 배어 나오는 그런 빛나는 눈을 가진 수행자는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을 만하다. 현봉(玄鋒) 스님이 그런 눈을 가진 분이다. 스님을 만난 첫 날, 나는 마음갈피 속에서 저절로 존경심이 피어났다. 스님을 만나지 않고는 지닐 수 없는 그런 마음이다. 오래 전 불가와 인연을 맺게해주신 덕숭산 혜암 큰스님을 뵈올 때 느꼈던 마음이 되살아 난 것이니 너무 오랫동안 선지식을 가까이서 뵙지 못한 까닭이리라. 그동안 선지식들은 너무 멀리 계셨다. 아니, 어쩌면 내가 너무 선지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머물며 그 일상까지도 존경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분을 ‘선지식’이라 생각하는 내게 스님과의 만남은 눈푸른 선지식을 만난 것만 같았다. 그것은 소박하되 언제나 수행자의 본분을 놓지 않고 정진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봉 스님에게는 본사 주지스님들이 지닌 위엄과 자동차 같은 것은 아예 없다
놀랄 정도로 소탈하신 모습과 따뜻한 눈빛 사이로 칼 같은 광채가 번뜩 스친다. 그 잠깐동안의 빛이 사라지고 나면 아주 평범한 스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어디서나 뵈올 수 있는 그런 스님으로 말이다. 늘 수행과 노동이 일상이 되어버린 현봉스님을 보고 ‘송광사 주지스님’이라고 하면 사람들의 눈이 갑자기 커진다. 그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난다. 아무도 주지스님으로 보지 않는 데에는 승속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방수좌 출신만이 지닌 독특한 기운은 다 느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스님 말씀대로 그냥 농사나 짓다 어쩔 수 없이 본사주지를 하게 된 분이 지니는 매력 말이다. 아무리 봐도 그냥 농사나 짓고 참선수행만을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송광사 종무행정을 완벽하게 전산화시켜 제방을 놀라게 한 것만 봐도 현대적 감각과 능력도 남다르게 지니고 계신 것은 분명하다.
오래 전 동학사강원에 있을 때 남도 쪽에 갔던 도반스님이 눈이 번쩍 뜨일 경전하나 복사해왔다며 내놓는데 보니 <대전화상주심경>이었다. 내용에 불교학 사전 속에선 찾아 볼 수 없는 확연함이 있었다. 게다가 이 책은 아주 드라마틱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어느 시골의 노인이 지나가는 엿장수의 리어카에서 건져올린 보물이었단다. 자칫했으며 시골의 집 벽지나 불쏘시개가 될 뻔했는데 세월이 흘러 공부 잘 하는 수좌스님의 손에 들어가 선방에서 읽히고 있다고 했다.
그날 밤 자리에 누웠는데 그 책을 마저 보고 싶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대중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빠져 나와 책상서랍에 넣어 두었던 책을 꺼내 돌아서는데 도반 하나가 따라 붙었다. 우리는 그날 추운 개울가에서 후래시를 비춰가며 그 책을 읽으며 꼬박 밤을 새웠다. 살아 움직이는 언어를 만나니 좌복에 앉아 답답하게 꼼지락거리던 생각들이 일시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때는 그 책이 나의 선지식이었다. 깊을 ‘심(深)’자를 ‘골수에 사무친다’로 표현하며 ‘도를 알기 위해선 버리고 또 버려라. 다만 고요히 앉아 밤낮으로 돌이켜 비춰보면 해골 속까지 다 비추어 오온이 단박에 부서지리라.’ 그렇게 공부하라는 선지식의 말씀에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옛날에 그 책을 구한 수좌스님이 번역본을 내 놓았다고 해 한권 구해서 책장에 꽂아두곤 까맣게 잊어버렸었다. 우연히 며칠 전 꺼내 읽다가 깜짝 놀랐다. 번역자의 이름이 ‘현봉(玄鋒)’이었다. 몇 군데 전화해 보고 나서야 송광사 주지 스님임을 믿을 수가 있었다. 그래, 스님에게 처음 느꼈던 그 소탈함 뒤에 있던 그 빛이 바로 스님의 수행과 지혜의 불꽃이 지나간 흔적이었나 보다. 나는 보는 성품으로만 그냥 사람을 볼 줄 알았지, 깨닫는 정기로 분명하게 보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하긴 그것도 자기 업을 따라 나타나는 법이니 내게 지혜가 없음 때문이리라.
■서울 반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