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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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곡스님의 스님이야기] 벽산스님(1/2)
10대에 법주사강원 강사
사상범 교화시켜 제자로

세상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위해 살지만 수행자들은 세상의 영화를 뜬구름같이 본다. 그들이 일의일발(一衣一鉢)로 외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오직 생사에 자재하고자 함이요, 한평생을 한장 좌복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것은 다만 깨달음을 향해 일체 욕망을 산문 밖에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산문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사십여 년을 바라보게 되었다. 해가 더해 갈수록 부처님 가르침이 더욱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먹빛 빨래에 풀 먹여 손질하는 일이 오십이 넘은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인 터인데, 그것이 조금도 싫지 않으니 아마도 전생부터 익혀온 일인가 보다. 다행히 숙세의 선근이 있었는지 많은 선지식을 가까이 섬길 수 있었으니 그러한 것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자양분이 되었다.
나를 출가의 길로 인도하신 분은 속가로 종조부가 되는 청주 용화사 벽산(碧山)스님이다. 나에게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씀하셨던 분이다. 벽산스님은 일제 시대 암울하기만 했던 소년시절, 절에 가면 마음껏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직지사로 입산했다. 앉으나 서나 경전을 읽었고 날이 갈수록 경전 읽는 일에 재미가 난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읽다가 코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날이 빈번했다. 법주사에 가서도 경전읽기에 몰두한 스님은 십대 말의 나이로 법주사 강원의 강사가 되셨으니 법주사 역사상 ‘최연소 강사’라는 기록을 남겼다. 일찍부터 포교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도시포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청주 용화사 주지로 부임해 학생포교와 교도소 포교에 헌신했다.
대처와 비구가 싸움을 하던 정화 때는 “불교인끼리 싸우는 것은 자멸이 있을 뿐”이라며 화합을 주장했다. 스님께서는 불자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대처든 비구든 싸움을 하면 스스로 불교를 갉아먹는 일이다. 불자로서 서로 싸우는 사람들은 사자몸 가운데 벌레다. 승가는 화합이 생명이니 절대로 싸워서는 안된다. 싸워서 얻은 힘은 싸움으로 망한다”라며 싸우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정화가 끝난 뒤 조계종 종회의 초대, 2대, 3대 종회의원이 되어 통도사의 조용명스님과 함께 화동파(和同派)의 기수가 되셨다. 항상 종단을 걱정하시고 젊은이들을 포교하는데 앞장서신 분이다. 또한 전쟁 고아들을 위해 고아원을 운영했다. 어린이와 청소년 포교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셔서 일찍이 학생법회를 시작했다. 그 학생회 출신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이 현재 재가법사로, 출가해 스님으로 전국에서 포교하고 계신다. 벽산스님의 자비심은 유별났다. 승속을 막론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언제나 존경의 예를 다했다. 젊은 스님들을 만나도 먼저 삼배를 올리고, 본사의 스님들과 전화통화 할 때는 전화기를 들고 “안녕히 계십시오”를 몇 번이고 거듭하며, 머리 숙여 절하곤 했다. “스님, 전화기에다가 절을 하면 상대방이 보기라도 합니까” 하면
“누가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절을 하면 내가 편안해 지니까 하는 것이지요” 라고 대답하시는 얼굴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나 허리 굽혀 절을 하는 스님은 걸인에게도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이 예사였다. 초파일 때나 특별 행사가 있을 때는 걸인들이 수도 없이 찾아와 스님을 따라다니기 때문에 스님의 주머니는 돈이 들어 있을 겨를이 없었다. 이렇듯 다른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관대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권속들에게는 엄격하여 백 원짜리 하나라도 이유 없이 쓰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연세가 많으셔서도 매주 교도소에 가서 교화하셨다. 사상범을 교화해 출가시켜 제자를 만들기도 했다.
교도소 복역을 마치고 출감하는 죄수들은 대부분먼저 스님을 찾아온다. 차비를 얻어가고 목욕비를 타 간다. 스님은 언제나 그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를 주시는데 부엌 사람들에게는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어서 짜증을 내면 “오랫동안 따뜻한 밥 한 그릇 못 먹어 보았을 텐데 자비심을 배운다는 사람으로 어찌 그리 인색하냐?”며 오히려 타이르시곤 했다.
내가 강원을 졸업하고 인사차 들렀을 때 “너 정말 중노릇을 할거냐?”고 물으셨다.
“중노릇 말고 다른 것 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답을 드렸더니 스님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이놈아, 중노릇을 하려면 여자를 조심해라!” 하셨다. (계속)

이번호부터 3개월간 스님이야기를 연재하는 설곡스님은 1951년 경북 상주生으로, 64년 청주 용화사 수도원에서 출가, 70년 통도사 강원을 졸업하고 비구계를 수지했다. 70~72년 해인사에서 안거를 지냈고 74~85년 대구 운흥사 주지, 86~95년 대만 홍법원장을 역임했다. 91년 대만 중국문화대학 미술학부 졸업, 95년 동 대학 예술대학원에서 석사를 받았고 중앙승가대, 동국대 경주캠퍼스, 경북대, 효성대에서 강사를 지냈다. 스님은 96년부터 지난해까지 런던 연화사 주지를 지냈으며 현재 구미 영명사 주지로 있다.
200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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