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 ‘오체투지 인도순례’시작
산·사막 거쳐 70세 출발점에
(전호에서 계속)
노스님은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땅에 머리 조아려보고 싶었고, 수도하신 곳에서 가부좌하여 앉아보고 싶었으며, 성도하신 곳에서 명상에 잠겨보고 싶었고, 부처님 열반하신 곳에서 울어보고 싶었단다. 먹고살기도 어려운 가난한 나라에서 비행기나 자동차는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가난이 스님을 그대로 주저앉게 할 수는 없었다. 스님의, 부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누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기에는 스님의 신심과 원력이 너무나 강렬했다.
어느 날 아침 노스님은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산문을 나서며 부처님 나라를 향해 길게 엎드려 오체투지했다. 그리고 손 짚은 곳에 발을 딛고 일어서고, 다시 절해 손 짚은 곳에 발을 딛고 일어섰다. 그렇게 절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겨우 160cm 정도의 그 작은 키로 마치 한 키 한 키 자로 재듯 나아가는 자벌레처럼 인도 전국을 돌았던 것이다. 20세에 출발하여 50년 한평생 동안을 오체투지를 계속하여 성지순례를 마치고 70세에 돌아왔다. 그동안 스님이 한 절은 몇 백만, 몇 천만 번이나 될까? 아니 그것을 헤아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무수 억만 번도 넘었을 것이다. 그러고도 그 작은 육신이 남아 있었다니, 신심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기적같은 일 아닌가!
고원을 지나 사막을 건너고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를 다 돌았다고 한다. 절하는 무릎이 벗겨지고 가슴팍이 해어지면 그 위에 가죽을 붙이고, 갈라진 손에는 나무 판자를 장갑처럼 끼곤 했다는데, 그것이 닳아버리면 바꾸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를 일이다. 교통수단을 이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하지만 절문을 나서며 첫 걸음부터 오체투지로 절하면서 길을 떠났던 것은 가난보다도 간절한 신앙심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몸을 던져 한평생을 절하고서도 아직도 살아있음은 무엇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몸마저 버려 부처님을 예경하고자 하는 원력이 지대했기 때문이리라!
스님은 출발하는 첫 날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단다. 너무나 기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 나도 이제 부처님 계시던 곳에 가는구나!”,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없었고, 오직 부처님께서 계셨던 곳에 간다는 즐거움밖에 없었단다. 감사함만이 있었을 뿐 무엇을 얻으려 했거나 가지려 하지 않았기에 한평생을 다 바쳐 순례할 수 있었다.
세간의 눈으로 보면 스님의 일생은 아무 것도 이룩하지 못한 바보 같은 삶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수행자의 삶은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에 있지 않다. 희생 봉사하며 헌신하고 사는 것이 수행자의 삶이다. 스님은 진정으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무소유 삶을 산 분이다. 오로지 당신의 삶을 송두리째 부처님께 바쳤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힘들었을 그 오십년 동안 모든 것이 감사하고 즐거웠다. 스님이야말로 수행자로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게 한평생을 사신 분이다.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어 미안하네. 부끄럽지만 나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네” 하시는 스님이야말로 진정한 부자였다. 그 스님께서는 티베트에 비해 부자인 한국에 태어난 나를 부러워했지만, 나는 가난한 티베트에 태어난 스님이 부러웠다. 오히려 그 노스님에 견주어 부자이면서 나태하고 자만에 빠져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원효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출가인이 되어 부유한 것은 군자들의 웃음거리다(出家富 君子笑所)”고 했다. 출가인들에겐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유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도량을 짓거나 포교를 하는 데는 경제적인 힘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출가인들에게는 자동차도 있어야 하고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문명의 이기에 따르다 보면 출가인의 본분사를 잃을 수 있음도 간과해선 안된다. 수행자로서 풍요와 편안함에 길들어지면 자신을 성찰하는 힘을 잃게되고 만다. 자신을 성찰하는 힘을 상실하게 되면 이미 수행자라고 할 수 없다. 그동안 해외생활을 하면서 누구보다도 더 문명적인 생활을 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럽게 다가선다. “가난해서 성지순례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돈을 가지고 가는 길이 아니라, 부처님을 예경하려는 원력을 가지고 가는 길이다”고 말씀하시던 노스님을 생각하면 진정한 수행인의 삶은 가난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오늘 문득, 바랑 하나 걸머지고 길을 나서고 싶다. 부처님이 고마워서, 그리고 더 가난한 수행자로 거듭 나기 위해서 그분이 살아 숨쉬었던 곳으로 고행의 순례를 떠나고 싶은 것이다.
■구미 영명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