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방문 스님의 무례함에
“대접받을 자격없다” 쫓아내
‘눈온 뒤에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를 알 수 있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야 바야흐로 장부의 마음씀을 알 수 있다(雪後始知松柏操, 事難方見丈夫心).’ 출가인이 되어서 마음쓰기를 겨울 소나무와 잣나무 같은 기상과 절개를 가지고 대장부가 되라는 가르침이다.
숲이 무성한 여름에는 소나무나 잣나무의 푸르름을 알 수 없다. 잡목과 섞여 함께 푸르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어 백설이 내리면 모든 잡목들은 잎을 떨구고 숲은 눈에 덮여 은색 세계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럴 때 소나무와 잣나무는 홀로 청청(靑靑)함을 지키고 의연하게 서있다. 거기에서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志操)를 볼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평소 좋은 관계가 유지될 때는 상대방의 깊은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별일이 없을 땐 좋은 마음을 쓸 수 있지만, 이익을 나누어야 할 때나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당장에 그 마음씀이 자기 중심이 되거나 좁아지게 된다. 평상시보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마음쓰는 것을 보면 그가 장부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이 말을 생각하면 생각나는 스님이 있다. 대구 서봉사 주지인 비구니 경희스님이다. 그분이 바로 눈 온 뒤의 소나무와 잣나무 같은 분이다.
경희스님은 오대산 지장암(地藏庵)으로 동진 출가를 하셨다. 거기서 방한암 스님을 뵙고 곧고 바른 출가생활을 익혔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스님은 통도사 경봉스님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러한 인연들로 스님은 북쪽의 한암스님과 남쪽의 경봉스님을 뵈올 수 있었으니 전생의 선근 복업이 아니었다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스님을 처음 뵌 것은 해인사에서다. 그 때 나는 재무실 시자로 있었다. 해인사에 계시던 어느 비구스님께서 스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는 것을 풀어드리기 위해 대구에서 일부러 들어온 것이었다. 남들 같으면 덮어두고 말았을 것을 비구 대중 처소까지 찾아와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고 했다. 이렇듯 경희스님은 일을 밝고 공평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이름나 있다.
스님께서는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비구와 비구니를 가리지 않음은 물론 당신 제자와 남의 제자 또한 가리지 않고 도와주신다. 늘 “나는 내 제자라고 특별히 잘해 주지 않겠다. 누구든 부처님 제자로서 잘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도와주겠다” 하신다. 알게 모르게 많은 비구, 비구니들에게 학비를 도와주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치에 맞지 않으면 또한 비구, 비구니를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꾸짖으신다. 이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많다.
어느 비구스님의 이야기이다. 조계종단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분이다. 그 분이 영어를 공부하겠다고 외국에 나가 있을 때 오랫동안 경희스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중에 위빠사나 수행법을 공부한다고 태국에서 수련하고 있었는데, 귀국하면 서봉사에 들러 며칠이고 머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스님은 깍듯이 예를 다해 대접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젊은 스님들은 그 스님을 시봉하는 데 곤욕을 치르곤 했다. 한국의 비구니 사원에서 남방가사를 입은 한국 비구를 시봉하기가 여러 가지로 불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스님은 한국 비구들이 남방계를 받지 않았다고 업신여기며 한국 비구는 비구가 아니라고까지 얘기했다. 그리고 자신은 남방비구처럼 대접받고 싶어했다. 경희스님은 그 행동이 못마땅했지만 상좌들을 달래며 잘 모시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오래 가지 못했다. 상좌스님들이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스님이 남방계(南方戒)를 받은 것에 대하여 자긍심을 가지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남방스님들처럼 정중하셔야지요. 남방스님들은 시중드는 스님들에게 무례하게 대해도 되는 것입니까? 스님은 이곳에서 대접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마십시오.”스님은 단호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도와주던 스님이었지만 그가 자신의 위치를 잊고 이치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보자 당장에 모든 인연을 끊고 만 것이었다.
또 하나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어느 비구가 서봉사를 찾아와 ‘위장수술을 하고 퇴원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병원치료를 받아야 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배에 붕대를 두텁게 감고 비구니 도량에 와서 웃옷을 훌렁훌렁 벗어제치니 젊은 비구니 스님들은 난처했다. 그러니 얼른 치료비를 얼마 주어 보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한 달이 멀다하고 자꾸 찾아오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어느 날 경희스님은 점잖게 그 스님을 불러 앉히고 “그 병이 그렇게 오래도록 낫지 않으니 참 이상합니다. 그러니 내가 직접 한번 보아야겠습니다.”하고는 와락 달려들어 붕대를 풀러보았다. 짐작대로 그것은 거짓이었다. 아프지도 않은 배에 붕대를 감고 비구니 도량을 찾아다니면서 괴롭혔던 것이다. 그 비구라는 자는 도망가버리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계속)
■구미 영명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