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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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곡스님의 스님이야기] 지월스님
매일 도량내 휴지·꽁초 주워
언제 어디서나 인욕·下心

불교수행의 목적은 지혜의 완성과 자비의 실현에 있다. 지혜의 완성은 자신에 관한 문제이고, 자비의 실현은 타인과의 관계를 지혜롭게 하는 것이다. 지혜와 자비가 둘인 듯 하지만, 사실 그 둘은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처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를 표방한다. 본래 대승이란 자신의 문제인 깨달음보다 다른 이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자비 실현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이 특색이다. 그래서 대승불교를 자비의 상징인 보살중심 불교라고 하는 것이다. ‘성불을 한 생 늦추더라도 중생교화에 내 모든 것을 바치리라’고 서원하는 것이 대승수행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의 실현보다 오히려 깨달음에 더욱 치중하는 감을 주는 것이 오늘날 한국 불교의 현실이다.
보살도를 실현하는 대승수행자는 권위적으로 군림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접받으려 하는 자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접하는 사람이다. 모든 생명의 존재를 인정하고 보살펴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들이다. 자비실현을 서원하는 수행자들은 그 삶 자체가 이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끌어안을 만한 관용과 어떠한 생명도 지극히 존경할 수 있는 겸허함이 수행으로 다져져 있어야 대승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승수행을 주장하고, 겸손을 애써 익히려 노력하고 있는 오늘의 나를 있게한 마음속 영원한 스승 한 분이 있다. 그 분은 일생동안 한번도 명예나 권력에 눈길을 주지 않았고 대중의 수행을 위해, 불법을 위해, 새로 출가한 수행자를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헌신하고 살다 가신 수행자다. 한번도 큰소리로 대중을 꾸짖어 통솔하려 한 적이 없고, 한번도 대중을 원망하여 도량을 이끌어 가려고 해본 적 없이 주지 소임을 사신, 보살 같은 스승, 그 분이 바로 지월(指月)스님이다.
지월스님을 처음 뵈온 것은 60년대 중반 해인사에서였다. 그 때 스님은 해인사 선원의 선덕(禪德)으로 계셨는데, 해인사 비상종회에서 해인총림이 결성되자 스님께서 주지에 선임되셨다. 스님은 주지소임을 맡기 전이나 후나 조금도 다름없이 생활하셨다. 나는 그때 해인사에서 행자생활을 다시 하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매일 도량을 여러 바퀴 도는 것으로 당신의 정진을 삼으신 듯했다. 손에 봉투를 하나 들고 도량에 버려진 휴지나 관광객이 버린 담배꽁초를 주어 모으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다가 도량을 급하게 뛰어가는 사미나 행자들을 보면 으레껏 스님은 그들 앞에 나타나시곤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최상의 예를 다하여 허리를 굽히고 머리숙여 절을 하셨다. 그 당시 나도 스님과 도량에서 마주치기를 수없이 했는데, 그럴 때마다 엉겁결에 머리 숙여 절하고 일어서 보면 스님은 여전히 깊숙이 머리를 숙이고 계셨다. 두번, 세번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해도 스님은 머리를 숙인 채로 얼마나 공손하게 서 계신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어쩌다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몇번을 만나더라도 만날 때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인사를 하셨다.
그리고는 자상하게 손을 잡아주시며 “우리 보살이 무슨 일이 그리 급하여 달려가십니까? 부처님 제자가 되려면 위의가 점잖아야 합니다. 그리 급하게 뛰어가면 화두가 챙겨집니까? 행동이 차분해야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을 수 있습니다.” 스님의 말씀은 계속되었다. “한국불교의 운명이 스님의 두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어려운 일을 어금니를 지긋이 물고 참아야 합니다. 내가 스님에게 한국불교의 장래를 특별히 부탁합니다.”
스님께서는 진정으로 한국불교의 장래를 염려하시고 모든 후학에게 그것을 간곡하게 당부하셨다. 그 때 나는 그 ‘특별히 부탁한다’는 말씀을 듣고 나에게 무엇인가 장래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싶어 스스로 은근한 기대를 가지기를 여러번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특별히’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특별히 부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대에게 ‘특별히’가 아니라, 스님께서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특별히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다가 대중이 의견이 맞지 아니하여 언쟁이 생기면 당신이 제일 먼저 일어서서 대중을 향해 절을 하고, “그것은 소승의 불찰입니다. 소승이 잘못한 것입니다. 내가 덕이 없고 수행이 부족해 그러한 것이니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참회를 하셨다. 그러면 아무도 더 이상 언쟁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인욕정진과 하심(下心)하시는 스님에게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중스님네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이 부족합니까? 고래등 같은 지붕 아래서, 거울 같은 장판 위에서, 백옥 같은 쌀밥을 먹으며 해탈을 위해 정진하는 우리가 공부말고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대장부 살림살이가 이만 하면 되지 않았습니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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