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욕·佛心·지혜·자비의 일생
“왜 출가했나” 자기성찰 강조
비구의 생활은 모든 것을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 의식주에서 수도하는 일까지 어떤 것도 남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부탁하는 일이 없어지게 되고 인색해지고 교만에 빠지기 쉽다. 이를 경계하여 일찍이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비구들이여, 머리를 스스로 깎지 말지니 서로 부탁하여 상대방의 머리를 깎아 주도록 할 것이니라.” 이것을 어기면 가벼운 죄를 짓는 것이니 참회해야 한다고 율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비구는 한 달에 두번씩 고개를 숙이고 “머리 좀 깎아주십시오”라고 부탁하여 하심하는 자세를 익히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머리를 무명초(無明草)라 한다. 무명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머리로 인해 허영심이 일어나고 자신을 망각하며 업장을 짓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명의 풀은 미리 끊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대중생활에서 삭발은 중요한 의식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비구는 한 달에 두번은 삭발을 해야 한다. 겨울에는 온도를 맞추어 대야에 물을 준비해 놓은 뒤 무릎을 꿇고 ‘스님, 삭발 준비되었습니다’ 알리면 아무리 구참 선배라도 신참에게 머리를 숙이면서 ‘부탁합니다’ 라고 해야 하며, 깎고나서는 서로 마주 보며 ‘잘못되었습니다’, ‘성불하십시오’ 하고 합장하는 것이 예의다. 무명의 풀을 끊어주니 고맙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신도가 찾아왔다. 영명사로 절을 옮기겠다는 것이다. 다니던 대구의 절은 사람을 업신여긴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가슴이 답답했다. 절에 찾아온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도 있어서는 안될 일이요, 업신여김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답답한 일이다. 그분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업신여기는 것은 그 사람의 일이요, 당신은 업신여김을 당했으니 그것을 참고 더욱 하심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입니까. 복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절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잘못하면 절에 다니면서 업장만 짓게되는 수가 있다. 시주를 조금 낫게 하였다고, 혹은 직책을 맡았다고 해서 처음 오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겨 서운하게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절에 다니면서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대접받으러 절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대접하기 위해 절에 다니는 것 아닌가. 부처님과 스님을 대접하고 일체 중생을 따뜻이 대접하기 위해 절에 다녀야 옳다. 염불하고 절하는 등의 수행도 이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지월스님께선 일의일발(一衣一鉢)로 일생을 사셨지만 인욕과 하심으로 갑옷을 입으셨고, 지혜와 자비로 방패를 삼으신 분이었다. 도량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셨지만 비굴하지 않으시어 주인 같으셨고, 총림의 주지라는 높은 직책을 맡으셨지만 교만하지 않으시어 항상 초심행자 같으셨다. 스님은 항상 도량을 다니면서 휴지를 줍고 청소를 하시다가도 사시마지(巳時摩旨) 때가 되면 법당에 들어가셔서 축원을 하셨다. 그 축원하시는 음성이나 모습이 얼마나 경건하고 간절하시던지 나는 그때의 감동을 지금까지 가슴에 지니고 있다. 내가 법당에 올라 축원을 하게 되면 반드시 지월스님의 축원하시던 모습을 회상하며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 되고 싶어 한다.
나는 80년대 중반에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생활하다가 십칠팔 년만에 귀국했다. 귀국하여 글을 쓰는 첫 인연으로 〈스님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내가 만났던 훌륭하신 스님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나의 수행을 돌아보고 싶었다.
나는 한국을 떠나던 당시의 정서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돌아와 보니 한국과 우리 승가는 엄청난 변화를 가졌다. 사찰은 그때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졌고 불사는 대형화되었다. 절이 커지고 대형화된 불사가 많아진 것은 불교 외형의 변화일 것이다. 불교 외형의 변화만큼 우리 수도자의 내면 수행도 깊어졌는가 묻고 싶다. 수도자가 자신의 문제에만 급급하다면 민중은 등을 돌리게 된다. 수도자가 자신의 안일에 빠져 있거나 권력의 맛에 도취되어 있다면 민중과는 거리가 멀다. 민중을 의식하지 않은 종교는 이미 생명력을 상실한 것이다. 학자가 없고 경제적으로 빈약해서 고려불교가 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철저한 자기 성찰과 참회, 끝없는 원력과 자비, 그리고 오직 중생을 위해서자신이 존재한다는 생각 없이는 수도자의 생활은 한낱 허식에 불과하다.
지월스님께선 대중이 모여 떠드는 곳에는 항상 소리없이 다가와 경책해 주셨다. “그만 마음을 ‘이뭣고’로 돌립시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출가했습니까? 출가한 사람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자기 손으로 눈을 찌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 내가 왜 출가했는지 자신에게 물어볼 일이다. 민중들이 ‘당신들은 왜 출가했소?’ 라고 묻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끝)
■구미 영명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