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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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스님의 스님이야기] 명성스님

제자들끼리 의견 엇갈리면
“내가 잘못 가르쳐 이런일이…”

(전호에서 계속)
스님은 절대 사람을 내치지 않는다. 학인시절은 스님노릇을 시작하는 출발점이다보니 문제가 가끔 발생한다. 당시 우리 반에 대중을 소란스럽게 하는 스님이 있었다. ‘학칙에 의거하고,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면 모두가 편안한 강원생활을 할 수 있지 않느냐’며 ‘이 스님을 내보내야 한다’고 여론이 들끓었다. 마침내 반 공사를 하였고, 반을 대표하는 학인들이 학장스님을 찾아뵈었다. 이 때 스님께서는 “강원교육은 스님 생활의 기본을 익히는 곳이고 공부하는 도량인데, 이 곳에서 나가면 어디서 그 학인이 구제될 수 있겠느냐?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수행자로서 서로를 보듬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며 간곡히 타이르셨다. 중생의 삶에 어찌 옳고 그른 것이 있으랴. 깨닫지 못한 자의 삶은 세월이 흐른 뒤에 정확히 시비를 판단할 수 있다. 학장스님의 말씀이 옳았다. 한 사람을 살리는 길이 아니던가.
내가 운문사에 살 때도, 학인들이 방에서 소란스럽게 떠들거나 웃어도 스님께서는 “왜 이렇게 떠드느냐? 조용히 하라”고 걱정하시는 법이 없었다. 근래 운문사를 졸업한 후배 말에 의하면 스님께서 머무시던 방이 학인들과 가까이 있는데 여름에도 문을 닫고 사신다고 했다. 즉 “학인들이 쉴 때는 자유롭게 쉬어야지 당신 때문에 학인들이 불편해서는 안된다”는 배려 때문이다.
선사상에서는 ‘사위의(四威儀行住坐臥)가 도량이요, 3業이 불사’라고 한다. 수행자는 주위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도량을 키우는데 관심을 두라는 것이지만 형이학적으로 보면, 현실적인 여건도 갖추어져야 수행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한국의 큰 절들이 대부분 비구도량인지라 비구니스님들의 선방은 콩나물 시루 같은 공간인 반면, 운문도량은 어느 총림 못지않은 비구니도량이다. 운문사엔 학인 250명에, 재가자 20~30명을 합치면 근 280명이 상주한다. 그 많은 대중이 살아가는데도 넉넉한 도량으로 불사가 이루어졌으며 한국불교를 짊어진 비구니스님들이 공부하는데 빈틈없는 체제를 갖춘 승가대학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학장스님의 공이다.
제자들이 어긋나는 발언을 하거나 대중공사에서 의견이 맞지 않을 경우가 더러 있다. 이때마다 스님께서는 “내가 잘못 가르쳐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며 그 책임을 당신에게 돌리신다. 학인시절에는 이 어른께서 대중을 조용하게 무마시키려는 무기(?)인줄 알았는데, 이것이야말로 그 많은 대중을 이끄는 힘, 즉 리더십인 것을 알겠다.
명성스님에게는 따뜻한 인간적인 향기가 풍긴다. 제자가 수술을 하거나 좋지 않은 일을 겪으면 개인적으로 꼭 관심을 표하신다. 강원을 졸업한 대학생 제자들을 우연히 만나거나 혹 제자들이 찾아가면, 당신 상좌들이나 신도들이 주신 쌈지돈을 내놓곤 하신다. 스님께서는 표현은 잘 하지 않으시지만 정이 많으시다. 1년에 한 반씩 졸업하는 학인들을 떠나보낼 때도, 스님은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늘 가슴아파 하셨다.
얼마 전 열린 ‘한국의 선서화전’에 작품이 전시될 만큼 스님의 붓글씨는 명필이다. 옛날에는 스님께서 기거하시던 방이 도서관(회성당)옆이었다. 그 도서관은 책도 읽고, 붓글씨를 쓰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어느 날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나는 점심시간에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스님께서 손님에게 글을 써 주시려고 하셨는지 먹을 갈라고 하셨다. 먹을 갈다가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잠시 후 돌아와 보니, 아뿔사! 벼루와 먹이 딱 붙어버린 것이 아닌가. 뗄려고 해도 떼어지지 않아 끙끙거리는데, 스님께서 마침 들어오셨다. 꾸지람을 하실 줄 알았는데, “사람도 죽고 사는데,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 도리어 나의 불안한 심기를 어루만져 주셨다.
이후 스님의 이 말씀은 나의 생활터전 한 자락에 오랜동안 자리를 잡았다. 수행자로서 무엇이 중요한 것이며 어떤 것이 가치있는 판단인가 라는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형성시킨 계기가 되었다.
스님께서는 유식분야의 권위자다. 그러나 스님은 실줄과 날줄의 엮임처럼 완벽한 불교학의 패러다임을 갖추고 계신다.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다. 어쩌다가 모르는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이때는 스님께서 웃으시며 “모른다”는 솔직한 답변을 하신다.
내가 화엄반에 있을 때의 일이다. 절 집으로는 먼 사숙뻘되는 어른이시라, 마침 내가 출가한 은사스님 절에 행사가 있어, 스님을 모시고 서울을 가게 되었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가는 4시간 내내 기차 안에서 스님께서는 책을 보셨다. 학자다운 이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기에 어떤 질문을 받더라도 막힘이 없으신 것이다. 그렇듯 스님께서는 지금도 변함없이 잠시도 경학을 손에 놓지 않는 열정을 갖고 계시다.
■서울 니련선하원 한주
200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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