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인때 탁발로 고아원 도와
利他앞장·천일기도 세차례
경허스님의 제자 3月가운데 수월스님(1855~1928)은 글을 모르는 문맹이었다. 얻어들은 풍월로 <천수경>을 외운 뒤 나무할 때나, 밥 먹을 때나, 방아 찧는 일을 할 때에도 천수다라니만을 지송하였다. 몇 년 뒤 천수다라니로 7일 용맹정진에 들었는데 7일째 되는 날 밤, 수월스님의 몸에서 빛이 얼마나 광열하게 내뿜었던지 아랫마을 사람들이 천장암에 불이 났다고 뛰어올라올 정도였다. 그는 천수다라니삼매를 증득(證得)한 뒤, 병색이 짙은 병자가 찾아와 스님을 친견하면 병이 나았다고 하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수월은 간도 나자구에 화엄사란 작은 암자에 주석하였는데, 이곳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에 있었다. 스님이 아침 일찍 짚신을 수십켤레 삼아 집 앞 처마에 매달아 두면 지나가는 나그네가 짚신을 갈아 신고 갔다. 또한 스님은 주먹밥을 해서 집 앞 샘터에 놓아두면 지나가던 길손이 시장기를 달랬다고 한다.
스님은 ‘중생을 제도하고서도 제도하였다’는 상(相)에 머물지 않는 무주상(無住相)보시로 공(空)사상을 실천한 분이다. 이 어른처럼 참다운 보시행을 실천하는 스님이 있다. 형문스님이다.
강원 도반이지만 나는 오히려 도반보다는 선지식이란 이름이 걸맞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형문스님의 평소 마음씀은 늘 주위사람을 숙연케 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절이 몇 년간 불사중인데도 일년에 몇 번 큰 행사를 계기로 마을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한번은 마을의 보살 한 분이 병원비가 없어 병원을 가지 못할 때 스님이 병원비를 내주고 손수 모시고 다녔다. 속인들에게만 베푸는 것이 아니다. 도반들이 선방에서 정진하고 있으면 늘 대중공양을 한다. “자신은 절 수호하느라고 정진하러 가지 못하지만 참선하는 스님들이 있기 때문에 한국불교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냐”며 자신을 낮추어 말하곤 하는 스님이다.
학인 때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못하다. 스님은 1년에 몇 번씩 탁발을 해 고아원이나 무의탁노인을 도왔다. 나는 스님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 받아 사교반 때에 함께 부산으로 탁발을 나갔다. 하루종일 탁발하고 저녁에 돌아오는데 너무 힘이 들어 택시를 타자고 제의했다. 형문스님은 “이 철부지 중아! 그래 중생들에게 베풀고자 탁발한 귀한 시주돈으로 택시를 타느냐”며 면박을 주었다. 스님은 학인 때부터 줄 끊어진 염주 꿰어주는 일을 좋아했다. ‘이것도 수행’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의식주는 인간에게 있어 기본적인 생활요건이다. 무소유(無所有)사상으로 부족한 것을 미덕으로 삼아 수행하는 것이 승려의 본분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만 부끄럽다. 나 뿐만 아니라 몇몇 스님들이 귀족화되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시대적 현실에도 스님은 자신을 위해 갖춘 것은 제대로 없다. 승복 한 벌 변변찮은 것이 없고, 냉장고를 열어봐도 자신을 위해 놓아둔 음식이나 한약 하나 없다.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은 없으면서 남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보시한다.
두어 달 전에 스님 모친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제주도까지 문상갈 수 있는 상황이 못되어 걱정했는데 도반들이 참 많이 다녀갔단다. 49재도 결제전날이었는데 제주도까지 근 10명이 참석했다니 그 보살님은 딸 덕에 좋은 곳에 가셨을 테지만, 형문스님이 평소 심어놓은 공덕이 아닐까 생각된다.
박노자교수가 <참여불교>에 하화중생(下化衆生) 없는 한국 스님들에 대해 비판한 글을 쓴 것을 보았다. 어느 일면으론 긍정한다. 하지만 ‘박노자 교수가 수행자들의 진면목을 조금만 알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직접 중생을 제도하지는 아니해도 수행한 그 힘만으로도 무외(無畏)보시를 하는 스님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형문스님은 자신보다는 남의 안위를 생각하는 이타수행과 함께 기도정진에도 끈을 놓지 않는다. 스님네가 기도하는 걸 가지고 뭘 그리 수선떠나 하겠지만 형문스님의 정진은 고개를 절로 숙이게 할 정도로 지극하고 끊임이 없다.
운문사는 해마다 오백나한 100일기도를 올린다. 스님은 100일 기도를 자청했는데, 마침 나는 오백전 부전이었다. 사중에서 정해진 시간 이외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기도를 하였고 백일기도를 회향할 무렵에는 거의 나한전에서 살다시피 하며 기도를 했다. 스님은 강원 졸업후에도 천일기도를 3차례나 하였다. 근 10년 지장기도로 목소리는 거의 쉬어 있었고 감기에 걸려도 기도는 계속되었다. 한번은 기도 중 쓰러지기도 하였는데,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법당에 있었다. 나는 스님에게 ‘아무리 유심론(唯心論)을 주장하는 불가이지만, 몸은 정신을 담는 그릇이므로 몸을 혹사시키거나 육체를 외면한 채 정신만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다그치기도 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막무가내다. ■서울 니련선하원 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