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만행 다니며 재발심
안주 거부 끊임없는 고행
“리비아→이집트→요르단을 거쳐, 현재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어제, 타려던 버스를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돌아서는데 그 버스가 폭발하여 한 순간에 재가 된 모습을 보았소이다.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생사의 갈림길이 이런 것이구나’… 빨리 이곳을 벗어나 터키로 떠날 예정입니다. 처음 계획대로 아프리카를 육로로 횡단하면서(7개월)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때론 몸이 아파 트럭에 실려 병원에 가기도 하고 생명의 위협도 몇 번 넘겼소이다. 소원대로 고생하고 나니 세상이 달리 보이더군요. 어쩌면 너무나 아름다운 사막의 별밤 때문인지, 아니면 편한 삶이 내 몫이 아니었는지… 좀 더 여행할 생각입니다. 무식한 배짱과 간덩이 부은 덕분에 씩씩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 예루살렘에서 현우 합장”
도반 현우스님이 지난해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을 여행하면서 내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일부다. 스님은 몇 년 전에도 인도 스리랑카 네팔 및 동남아시아를 1년동안 배낭여행했다. 앞으로는 남미를 여행할 계획이란다. 경제력 넉넉한 여행이 아니다. 스님은 최소한의 경비로 최대의 효과를 누리며 여행을 한다. 여행 내내 염불하고 화두참구하면서 다닌다. 수행의 힘으로 여행이라기 보다는 고행(苦行)을 하는 것이다.
이번 여행을 다녀와서 먼저 이 말부터 내놓았다. “철저히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였어요. 많은 이들에게 베푸는 방법을 익혔고, 수행자가 너무 안주해서는 안되며, 수행의 과실이 열리기 위해서는 아상(我相)부터 꺾어야 하고, 어떤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꼿꼿한 원력을 세워 정진하겠다고 새삼 발심했지요.” 스님은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한다.
현우스님은 강원 도반이지만 서로 바쁘게 살다 보니 만남이 잦지는 못하다. 그러나 잊지 않고 챙겨주는 절친한 벗이다. 학인시절, 우리는 방학을 이용해 전국으로 만행을 다녔다. 15년이 흘렀지만 시간의 강 너머에 당시 ‘젊은 풋중’들의 충천했던 객기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물속에 살면서도 물고기가 목말라 한다’는 인도의 시인 카비르 말처럼 사바세계 인간은 삶의 여정에서 안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꿈꾸는 영원한 방랑자인지도 모른다. 스님들은 진리를 찾아 속세를 벗어나 불계(佛界)로 나온 여행자다. 그런데 그 불문(佛門)의 여행지에서 또 3차원의 세계(진리)를 찾아 떠나니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53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선재동자의 설정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수행자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거친 풀을 헤치며 불법의 진리를 깨치고자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는 것을 ‘발초참현(撥草參玄), 즉 만행·행각이라 한다. <사십이장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사문은 나무 밑에서 한 밤을 묵되, 절대 이틀을 머물지 말라’고 하셨다. 애착과 탐욕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하신 말씀이다. 애착에 대한 경계이든, 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만행이든 간에 그 근본에는 마음의 심인(心印)을 궁구하는데 있다.
젊은 스님들이 만행을 하는 것에 대해 일부 어른 스님들께서는 걱정하신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식이든 만행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수행자들이 선각자였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는 스님들이 시대에 좀 뒤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야 ‘중 다운 중’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스님들도 여행(만행)을 통해 자신의 안목을 넓히고 수행의 발판을 다지며 중생제도에 대한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님네에게 있어서 여행, 곧 만행은 수행의 연장선상이다.
‘하루종일 봄을 찾아 짚신이 다 닳도록 다녔으나 찾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뒷뜰에 매화꽃이 피어 있더라’ 게송은 어느 비구니스님의 오도송이다. ‘외부가 아닌 자신에게 내재된 불성을 자각하라’는 것이지만, 끊임없이 외부에서 찾았던 고행이 수반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매화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시행착오라는 통과의례를 거침으로써 성숙한 수행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인들의 직업이 다양하듯 스님들의 수행방법도 다양하다. 강원을 졸업한 이래 근 10년이 넘도록 나는 학업의 길에 서있고 현우스님은 여행기간을 제외하고 줄곧 선방에서 정진해 왔다. 스님은 선방 장판때가 묻을 만큼 묻었으니 눈감고 모르는척 해도 될 일을 기꺼이 나서서 한다. 노스님 시봉에, 한철 공양주에, 남들이 꺼려하는 소임까지 도맡아 했다. 어느 결제철에는 묵언을 하기도 하고, 또 언젠가는 허리가 아파 뒷방 신세를 지면서도 육신의 고(苦)를 이겨낸다고 하루 천배씩 절(拜)도 했다. 나는 스님에게 ‘수행이 아니라 고행을 한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가슴 한 언저리에는 도반에 대한 대견함과 스님과 함께 하는 우리 승가(僧家)에 대한 환희심이 벅차오른다.
■서울 니련선하원 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