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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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선행 법사의 스님이야기]홍도스님 (1)

1등 포교사…애칭 ‘방울스님’
대불련 창립·군포교등 선구자

5척 단구. 보통 염주알보다 몇 배나 큰 왕방울 염주를 늘 돌리고 있는 스님. 유난히도 걸음이 빠르고, 마치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해 ‘방울스님’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홍도스님.
1935년 태어난 홍도스님은 지난 79년 입적해 44년이란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대학생 포교, 군포교 등 한국 현대불교의 포교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스님이다. 입적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스님의 큰 원력과 헌신적인 포교활동,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부지런함을 이야기하는 스님들과 재가자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첨단정보화시대를 자랑하는 오늘날, 한국불교가 시대와 현대인의 근기에 맞게 포교를 잘 해나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예’ 라고 선뜻 대답이 나올 수 있을까. 그러한 현실이 안타깝기에 ‘1등 포교사’ 홍도스님이 더욱 그리워지는 지도 모른다.
홍도스님은 대구 파계사로 동진출가 했다. 스님은 당시 한국불교계가 정화로 인해 혼란과 갈등이 깊어지자 불교가 젊어져야 하고 운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데 인식을 깊이 하고 도심포교와 청소년포교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1962년 조계사 중고등 학생회 지도법사를 맡아 학생지도에 헌신적이었다. 그 시절 지금의 조계종 총무원 청사 자리에 있던, 낡은 함석지붕의 회관이 어찌 그리도 춥던지 겨울에는 법회를 진행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는데 일요법회 시간이 되면 홍도스님이 오셔서 총무원에서 조개탄을 몰래 가져다가 난로를 피워주시며 공부하는데 차질이 없게 했다.
광덕스님이 주지로 계시던 봉은사에 계실때는 명성암에 주석하면서 대학생불자들로 ‘구도부’를 만들어 지도했다. 이때 활동하던 청년불자들이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또 대불련의 활성화를 위해 간사를 동국대 불교학과로 전학시켜 학비지원까지 하며 열정적으로 대불련 지도를 하셨다.
60년대 중반에는 ‘최초 도심포교당’이라 할 대각포교원을 종로 4가에 있는 빌딩 4층에 개설했다. 3층에 위치한 교회에서 끊임없이 방해를 했어도 흔들림없이 초지일관으로 정기법회와 각종 불교의식을 행하면서 일반시민들을 불교에 이끌었다. 스님은 당시 돈이 조금 모이면 불교의식집이나 경전번역서를 출판해 대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포교원에 대각보현회를 구성해 부처님오신날 제등행진에서 대상을 차지할 정도로 신도들을 조직화하였다.
스님은 이후 서울 후암동 뒤쪽 남산 기슭에 보현정사를 건립하고 거리포교를 실천했다. 당시는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되던 때였는데도 서울 시민의 안녕과 불법 홍포, 특히 군승 창설을 발원하며, 새벽 3시엔 어김없이 목탁을 치며 대대적인 도량석을 시작하였다. 남산에서 출발하여 옛날 KBS방송국- 종로 3가 -중앙고등학교 - 청와대 앞- 옥인동- 서대문- 서울역을 지나 후암동 국방부 청사까지 갔다. 그곳에서 탑돌이 하는 것처럼 몇 바퀴 돌고 다시 절에 돌아오는 코스였다. 절에 돌아오면 새벽 5시가 지나 있었는데 그 일을 매일 되풀이 하였다.
작은 키의 스님이 직경 50cm가 넘는 커다란 목탁을 치면서 걷는데 어찌나 걸음이 빨랐던지 합장만 한 채 뒤따라 걷는 사람들조차 도량석이 끝나고 나면 온 몸이 흥건히 땀으로 젖었다. 가끔씩 다른 절의 대중이나 대불련 학생들이 동참하였는데 처음에는 통행금지 시간이라 제재하던 순경들도 어느새 합장으로 인사하고 한마디씩 덕담을 하거나, 도량석 하는 일행의 모습을 보는 자체를 즐거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언제나 같은 시각에 울리는 목탁소리를 듣고는 감화되어 따뜻하게 덥힌 우윳잔을 들고 저 멀리서부터 기다리는 여인들의 모습도 늘어났다. 그래서 인왕산 기슭의 옥인동 산속 달동네를 지날 때마다 부처님 재세시 탁발하던 모습을 저절로 떠올린 동참 대중들은 환희심이 가득 피어올라 석가모니불 정근소리가 더욱 커졌던 기억이 난다.
홍도스님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번도 거르지 않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서울역에서 용산 한강교를 건너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걸어가서 국가 유공자들의 극락왕생을 간절히 기원했다.
지금이야 대학생들의 농촌봉사활동이 거의 사라졌지만 60년대만 해도 대학생들이 피폐하고 어려웠던 농촌이나 어촌, 산촌에 가 농사일을 돕거나 야학을 펴고, 또 의료봉사활동을 벌이는 일 등을 많이했다. 그러한 농촌봉사를 홍도스님이 대학생들과 함께 처음 시작했다. 스님은 1964년 여름방학, 광주 지역 대학생들과 섬마을로 찾아가 의료봉사를 실시했다. 스님의, 재치 넘치는 불교설화 이야기와 정성이 가득한 봉사 자세 때문에 농민들은, 병을 고쳐주는 의대생들보다도 스님곁에서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의대생들도 솔선수범하는 홍도스님의 모습에서 감화를 받고 봉사에 온 힘을 쏟았다.
■횡성 대승사 회주
200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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