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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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선행 법사의 스님이야기] 홍도스님 (2)
“매몰광부 무사” 보름간 기도
군위문·합동결혼식 주례도

홍도스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자비심이 대단했던 보살’이라고 입을 모은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치 숨쉬는 것처럼, 밥먹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비행을 폈던 분이 바로 홍도스님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신도들의 생일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다 챙겨주셨다. 신도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도 아니요,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생일날 일일이 집을 찾아가 축하하고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다. 신도 누구의 생일날을 맞으면 불전에 불공드리고 축원 올린 떡을 일일이 들고 신도 집에 가져다 주었다. 간혹 다른 종교를 믿는 친지가 함께 있는 등 사정이 있어 스님이 오는 것을 귀찮아 하는 신도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으며 도리어 덕담으로 그 신도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이런 스님의 행동 때문에 일부 스님들로부터 ‘떡장수’라는 비야냥을 들었지만 미소로 넘기곤 했다. 그때 스님이 생일을 맞은 신도집을 찾아 그 가족과 축하하고 대화를 나누고 한 일이 이후 가정법회나 지역법회의 시초가 되지 않았나 싶다.
스님은 단순히 생일 축하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떤 집에 가서는 그 집 아들 취직시켜 주기 위해 이곳 저곳 전화하느라 한나절이 걸리기도 하고, 또 어느 집에서는 혼기놓친 딸을 위해 몇 시간씩 걸려 중매를 서기도 했다.
살을 에는 추위가 몰아치던 엄동설한의 어느 날 생일맞은 이만 12명이었다. 나는 홍도스님과 함께 생일 떡 12판을 짊어지고 절을 나섰다. 떡을 하나 들고 신도집에 들어가신 스님은 바깥에서 떨고있는 나를 몇 시간이나 잊어버리셨는지… 지금 생각하면 어린 출가자였던 내게 인욕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여겨진다.
스님은 당시 몇 군데 되지 않은 불교보육원 중 하나인 송암보육원 이사의 책임을 맡아 교통 불편한 경기도 시흥까지 수시로 드나들면서 원생들을 위로하였다. 아이들과 법회를 함께 봉행하고 허물없이 놀아주곤 했는데, 그 일을 귀찮아 하지 않고 즐겁게 했다. 원생들 스스로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스님은 전화 담당하는 어린이를 ‘통신참모’, 자동차 담당은 ‘수송참모’, 식사 담당은 ‘군수참모’라 호칭하면서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또 기억나는 일이 있다. 1967년 여름 충남 청양에 있는 구봉광산에서 갱도가 무너져 양창선이라는 갱부가 매몰, 18일만인가 구출된 사건이 있었다. 그때 스님은 그 보도를 듣고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 무사히 구출되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보름간이나 했다. 갱도 앞에서 절실하게 발원하는 모습이 마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과도 같았다. 갱도가 있던 곳은 오지의 산속이라 숙식을 해결할 곳이 마땅치 않아 산중턱에 버려진 너 댓 평 남짓한 산신당에 묵었는데, 한여름이라 모기가 어찌나 무는지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스님은 “땅속에 매몰돼 있는 사람을 생각하라”는 말로 내 입을 막았다. 이렇게 스님은 하루가 멀다하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참사를 내 일처럼 가슴아파하고 피해자들을 위해 늘 기도 올렸다.
서울 시민회관과 대연각호텔에 화재가 났을 때도 득달같이 달려가 유리 파편이 튀는 현장에서, 인명피해를 줄이고 구명을 위한 기도를 불보살님께 철야로 올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간절하든지 지나가는 시민들의 얼굴마저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 광경을 전해들은 서울시장이 나중에 스님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스님은 정말 바쁘게 살았다. 군부대 위문행사시에는 언제나, 스님 키보다 더 큰 위문품을 메고 나타났다. 최전방인 애기봉의 점등법회나 청소년을 위한 각 행사에서도 맨 앞줄에는 늘 작은 키의 스님 모습을 뵐 수 있었다.
또 스님은 해마다 절에서, 돈이 없고 형편이 안돼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어렵게 사는 부부들의 무료 합동결혼식을 올려주었다. 스님이 주례를 맡았는데 주례사를 얼마나 재미있게 하든지 신랑 신부는 물론 하객들의 폭소가 연신 터졌을 정도로 결혼식 분위기가 늘 화기애애했다. 매년 개최하는 경노잔치때는 노인들과 어울려 자식들보다도 더 살갑게 노인들을 위로해 주었다.
홍도스님 주머니에 있는 돈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스님의 주머니는 늘 열려있었다. 어떤 돈이라도, 심지어는 불사에 쓰라고 받은 보시금일 경우에도 누가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거나, 불쌍한 형편을 보면 먼저 집어주곤 했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처럼 남 주기를 좋아하고, 보살행에 앞장섰던 스님은 진정한 ‘무주상 보시의 표본을 보이셨다. 44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베푸는 삶으로 채우신 스님은 혹 보현보살의 화신은 아니었을까.
■횡성 ‘마음의 쉼터’ 회주
2002-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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