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다 영안실 들러 염불 ‘여러번’
군승단 창설 위해 밤낮없이 애써
유난히 자비심이 많았던 홍도스님에게는 자연히 신도들이 많이 따랐다. 당시 보현정사 만큼 각계각층의 신도들을 보유하고 있는 사찰도 드물었을 것이다. 보현정사가 무허가 건물이라 집달리에 의해 부처님이 마당에 내동댕이 쳐진 일도 있고 셋방살이 신세를 지며 정진하던 때도 있었지만 스님의 부지런함과 차별없이 대하는 태도는 수많은 신도들을 보현정사로 이끌었다. 신도들 중에는 잘 사는 상류층도 있었지만 중류 이하 서민층 신도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홍도스님은 누구에게나 자상했고, 집착없는 무소유를 보여주었기에 신도들은 언제나 감사하고 스님을 따랐다. 그들은 가정생활의 여러 문제점과 사회생활의 어려움도 스스럼없이 스님께 털어놓고 상의하였다. 스님은 그때마다 마치 부모가 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상담에 응해 주었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생활이 어려운 신도의 보증을 잘못 서서 애태운 일도 있었고 취직자리를 알선해 주느라 고생한 일도 여러번이었다.
당시 스님이 주석하던 보현정사가 후암동에 위치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절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대문 시장에 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크고 작은 가게를 수십 군데 들르며 안부를 물었고, 노점상을 하는 신도들은 가게의 발전을 축원해 주길 줄을 서며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빠도 스님은 어느 누구의 요청도 물리치거나 형식적으로 대하지 않았고 싫어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보현보살의 10종 대원을 철저하게 수행하는 구도자의 실체를 보여주신 것이라 믿는다. 스님은 매사에 긍정적이고 누구에게도 짜증스런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항상 적극적이고 부지런했으며 최선을 다했다.
어느날 스님이 과로로 쓰러진 적이 있었는데 병원비가 없는 스님을 어렵사리 사립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그때 병문안 온 어느 신도가 스님 목욕하신 후에 입혀드리라고 내의 한 벌을 사왔다. 그런데 스님은 내의 포장을 뜯지 못하도록 했다. 나중에야 알게됐지만 스님은 혹시 산사에서 수행하는 도반이, 입원 소식을 듣고 찾아오면 그 내의를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서울에서야 언제나 사 입을 수 있지만 산골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기에 수행하는 도반에게 주어야 겠다는 배려때문이었다. 스님은 승복도 꾀죄죄한 것 단 두벌 뿐이었다. 여름철에는 땀냄새를 지우기 위해 수시로 빨아서 채 마르기도 전에 입고 나서서는 시원해서 좋다고 하며 웃으시곤 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하여튼 스님의 검소함은 유명했다. 그런 스님께서 내 학비에 보태 쓰라고 금반지 하나를 건네 주신 적이 있다. 나중에 살펴보니 그 반지는 며칠전 스님의 생신때 신도들이 돈을 모아 기념선물로 마련해 드린 것이었다. 나는 그런 의미있는 선물은 받을 수 없다며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스님은 “내게 이 물건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어울리지도 않는다”며 기어코 내 손에 쥐어주셨다.
한번은 홍도스님과 함께 어느 상가집에 갔다. 달동네에 사는 혈육 하나 없는 아주 외롭고 가난한 여인이 죽었던 것이다. 상주도 없는 무연고의 그 가난한 상가에서 3일동안 어찌나 정성스레 염불을 해 주시는지 옆에 있던 나는, 이 여인의 영혼이 스님의 지극한 정성으로 극락왕생 했으리라는 믿음이 들 정도였다. 홍도스님은 길을 가다가도 병원만 보이면 영안실에 들러 염불을 해주시곤 했다. 대불련 학생들도 스님을 따라 병원 영안실에 들러 영가를 위한 염불에 동참하곤 했다. 물론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고 상주쪽에서 사례를 하려 해도 극구 사양했다.
홍도스님은 어느 누구보다 군포교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불교계가 염원하던 군승단의 창설을 위하여 밤낮으로 뛰었다. 새벽예불 때마다 발원하였고 혹독한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국회의 국방전문위원들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군법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스님이 어찌나 간절하고 끈질겼던지 나중에는 그 사람들 전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군부대 위문 가면 장교들을 일일이 만났고 그들의 생년월일을 다 적어두었다. 생일이 되면 역시 떡을 해 부처님전에 축원을 올리고 떡을 들고 전방에 찾아가 그들을 감복시킨 것이다. 오로지 불교포교를 화두로 삼은 스님은 어려운 시기에 보현정사를 건립하고는 절에 ‘군경학생교화회관’이라 이름붙여 군법사들 숙소로 우선 배정했으며, 군부대의 크고 작은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스님은 어떤 것보다도 ‘한국불교군경학생교화회관장’이라는 호칭에 만족해 하셨다.
하루 3시간 이상 자는 것을 보지 못할 만큼 포교를 위해 밤낮으로 뛰고 또 뛰었던 홍도스님. 스님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과로끝에 44세라는 나이에 그렇게 빨리 입적하시지 않았나 해 지금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끝)
■횡성 ‘마음의 쉼터’ 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