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 대업이룬 고려왕실 원찰
두 석탑·석불입상 제자리 떠나 산재
寺趾전체 농경지…두차례 발굴조사
◇미륵세상은 기다려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인가. 매산리 비봉산 봉업사터의 태평미륵도 용화세계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자비의 손짓을 하고있다. 보호각 사이로 태평미륵이 보인다(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
◇봉업사 터는 사지 전체가 현재 농경지이다. 멀리 보이는 탑이 보물 제435호인 오층석탑.
◇봉업사터에 있는 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7호). 장일선할머니가 14년째 돌보고 있다.
황금 물결 일렁이는 저 들녘 어딘가에서 옛 절의 향기가 배어 나온다. 오슬오슬 익어가는 나락들은 용화세계(龍華世界) 미륵부처님께 올릴 공양미인 듯 탐스럽고, 들녘을 비켜 선 한 쌍의 당간지주는 농부들이 받쳐놓은 지게목발인 듯 한가롭다. 긴 세월 오로지 한번 맺은 인연의 법도만을 지키는 의좋은 당간지주와 저승 꽃 만발한 오층석탑 1기가 아니라면 여기가 옛 절터인 줄 누가 알겠는가. 전각과 도량의 경계였던 담장은 기왓장, 유구를 모아 논둑길로 빚었고, 그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보면 그새 한 철 안거에 들었던듯 개구리떼들이 인기척에 놀라 화들짝 고해의 바다로 뛰어든다.
안성 땅은 미륵동네다. 백운산 비봉산 서운산으로 울을 삼고, 하늘 아래 선민(選民)들의 심성처럼 붉고 차진 토질의 안성 뜰을 안마당 삼아 각양각색의 미륵불들이 다투어 세속 살림을 차리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기솔리 쌍미륵과 궁예미륵, 대농리 미륵, 미륵당의 태평미륵, 아양동 미륵 등 올망졸망 미륵들이 동네어귀마다 고만고만한 살림을 차렸다.
미륵들 중에 인간 세상의 호구(戶口)에 가장 가까이 들어와 숟가락질 젓가락질을 함께 했던 승속동행의 미륵은 궁예 미륵이었다. 궁예는 칠현산 칠장사에 들어 머리를 깎고 일찍부터 활쏘기를 익혔다. 안성 들 주변의 야산에는 유난히 조릿대(竹) 들이 많다. 미륵의 화신임을 꿈꾸던 ‘미완의 미륵’ 궁예가 허공에 날린 무량무수의 화살이듯 키 작은 조릿대들이 함부로 뿌리를 내리고 아직도 허리를 곧추 세우는 것이다.
궁예에 이어 남사당패를 따라 운수행각을 하던 황석영의 ‘장길산’도 서운산 청룡사에 들어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장길산의 스승 운부대사는 “미륵의 세상이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 이라는 미륵 세계의 역동성을 일깨웠다. 의적 임꺽정에게 병든 세상을 주억거릴 의기(義氣)를 북돋웠던 인물도 칠장사에 은거하던 그의 스승 갖바치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현실 속으로나, 전설속으로나 이렇게 이 땅으로 강생했던 민중의 인도자인 미륵들이 몰려들었던 강한 흡인력이 안성 땅에 있었다.
경기도 최남단에 위치한 안성은 오랫동안 내륙 교통의 요충지이며 군사요충지이기도 하다. 팔도의 물건들이 모여들고 또한 깔고 앉은 텃밭에서 질 좋은 농산물과 수공품들이 양산되기에 유기그릇과 가죽꽃신 등 꼭 입에 맞는 물품들을 쉽게 조달할 수 있어 ‘안성맞춤’이라 하였던 것이다.
충청북도에서 서울로 오는 길목에 위치한 죽주산성은 군사 요충지인 까닭에 숱한 역사의 상흔이 돌 틈마다 서려 있다. 신라 말기에는 궁예가 한때 몸을 의탁했던 기훤이 이 곳을 본거지로 삼아 9년을 머물었고, 고려 말 몽고군의 침입 때는 송문주 장군이 민초들과 함께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몽고군을 이 곳에서 물리쳤으며, 임진왜란 때는 황진 장군이 기습 공격으로 이 곳을 탈환하여 왜군이 더 이상 용인과 이천으로 범접하지 못하게 하였다. 비바람 몰아치는 역사의 구비마다 천박한 민초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온 몸으로 지켜낸 안성 땅은 이곳이 더 이상 단순한 중생들의 살림터가 아닌 미륵들이 거처하는 성지며, 그 미륵들이 ‘미륵 세상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는 일깨움을 솥뚜껑 같은 그네들의 가슴에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150-1번지 일대에 산재한 봉업사(奉業寺)터는 이 땅을 오갔던 모든 미륵들의 꿈과 비원을 기리는 절터다. 악업(惡業) 만이 업이 아니라 용화세계를 꿈꾸었던 영웅들의 선업(善業) 또한 다스려야할 업이기에 그들이 남긴 엄청난 대업(大業)을 부처님의 뜻으로 섬기고 간직하고자 지은 절이다. 봉업사에는 오랫동안 고려 태조 왕건의 진영(眞影)이 모셔져 있었다. 대업을 역사 속에서 현재시제로 가장 강하고 뚜렷하게 실현시켰던 인간속의 진정한 미륵이 왕건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개성의 봉은사, 논산의 개태사와 함께 고려의 진전사원(眞殿寺院)이었던 봉업사는 고려의 존립 475년 동안 왕실에서 한해도 빠짐없이 선왕에 대한 예를 올렸던 왕실의 원찰이자 호국사찰이었다.
중부고속도로 호법 분기점을 지나 일죽IC로 들어서면 곧바로 죽산면 죽산리에 도달하는데, 38번 국도 오른편의 매봉산 자락에 이르는 방대한 농경지가 전성기의 봉업사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봉업사터는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는 사연을 간직한 채 지금은 수만 평야의 논밭이 되어 팔만사천의 나락들을 키우고 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 아래 금빛으로 출렁이는 봉업사 터는 석존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나 도솔천에서 대기하던 미륵보살이 강림하여 용화삼회(龍華三會)를 설하는 화림원(華林園)의 법연장을 연상케 한다.
봉업사터는 1997년 9월과 2000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경기도박물관의 발굴조사가 있었다. 사지 전체가 농경지이기에 농한기인 겨울철에 극히 일부 지역만 표본적인 발굴작업이 가능했는데, 70여점의 유구 유물이 출토되어 봉업사터 성격 규명에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부족한 예산으로 무턱대고 드넓은 농지를 매입하여 발굴작업에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고준한 역사 유물이 땅 속에 들어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그대로 묻어둔 채 마냥 곡식만 경작하는 것도 속 편한 노릇은 아니다. 사지 발굴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만 맡기기 보다 정작 그 주인되는 불교계가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봉업사터 가운데 지난 번 2차 발굴 조사된 436평의 땅을 1백5만원에 임대했었다는 땅 주인 천정래(57세, 죽산리 461번지 거주)씨는 다시는 땅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고개를 젓는다. 지반이 약해지다 보니 이번 태풍 ‘루사’에 그 위에 심은 벼포기들만 넘어졌다는 것이다. 천정래씨처럼 봉업사터의 등기부상 실제 주인이 있는가 하면 돌보는 이 없는 산밑의 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을 14년째 홀로 돌보는 장일선(76세) 할머니 같은 이도 있다. 우연히 이 산밑에 들렀다가 부처님이 좋아 비닐하우스를 짓고 내리 14년을 살았다는 것이다.
업이 어찌 육도 중생의 것만이겠는가. 석불은 석불대로, 사원은 사원대로 인연의 모양새를 지어놓은 그 순간부터 업이 태동하는 것이니 봉업사의 업은 뿔뿔히 흩어지는 것이었던가. 오층석탑(보물 제435호) 석불입상(보물 제983호, 칠장사 소재)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호) 등 어느 것 하나 제자리에 있는 것이 없다. 고해의 징검다리인양 띄엄띄엄 죽산리 일대 농경지에 적당히 터를 잡고 또 다른 세월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 봄 다녀온 강릉 신복사터와 학산 굴산사터 석정(石井)이 이번 큰 물로 인해 토사에 휩쓸렸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감은사지 대탑도 1。정도씩 기울었다는 보도이다. 멀쩡한 성보들도 소리없이 기울고 토사에 휩쓸리는데, 발굴의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폐사지들은 또 얼마나 소리없이 땅 속 깊이 가라앉고 있을 것인가. 문화재에 대한 인식, 눈앞의 명리만 좇는 현대인의 사고체계 또한 기울어 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시인·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사진 = 고영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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