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나를 밝히면 조상도 더불어 밝아져
자기 육신이 태어났으면
정신 다시 태어나야 진짜 사람

“나 아니면 안된다” 생각 버려야
착·욕심·아상 세우는 사람에겐
부처님 법의 문 절대 열리지 않아

하나라도 실천하는 공부를
속속들이 다 안다 하더라도
목마를 때 마실 수 없다면 무효

나를 버리면 오히려 성공

자성은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스스로 갖춰가지고 있는 것

당신 있는 그 자리가 극락
한생각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순간 순간 극락도 지옥도 돼


추석을 지내는 마음

저는 이번에 선원에서 거행하는 추석 합동 천도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추석과 같은 명절에 지내는 천도재에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참석해야 하는지요. 그리고 천도재를 지내면 후손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공덕이 돌아가는지 그 점을 여쭈고 싶습니다. 가르침 주십시오.

우리 인생이 끝간데 없이 살아나가면서 구르는데, 비유하자면 지금 우리는 가지가 많고 이파리가 많고 뿌리가 있습니다. 위로는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가르쳐주신 그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마음도리를 공부해서 백중에 그 묵은 은혜를 갚는데 팔월 추석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뭐를 많이 차려놓아서가 아닙니다. 하다 못해 초 한 자루 켜놓고 물 한 그릇을 떠놓고 향 한 개비를 피워 놓더라도, 절을 일 배를 올린다 하더라도, 아주 깊은 생각으로 일 배를 올리면서 그 감사함을 생각한다면 조상님의 은혜를 갚고 또 자식들한테도 은혜를 베풀어 줄 수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몸뚱이만 귀하다고 애를 쓰고 사는데, 심어 놓은 나무가 거죽만 좋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뿌리가 썩어 들어가는 데는 별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조상의 어떤 문제도 배척하는 마음으로 하지말고 끌어안는 마음으로,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때로 어떤 집안에서는 총에 맞아 죽은 분들도 계시고 물에 빠져 죽은 분도 계시고 맞아서 죽은 사람도 계시는 그런 경우가 옛날에는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분들을 무섭게 생각을 하고 오히려 자기네들을 해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면 안되죠. 더 불쌍하게 생각하고 정월에나 백중, 팔월 추석 때 잘 모셔드린다면, 자기 조상이라면 자기네들 뿌리나 똑같은데 그분들을 은혜로이 생각하고 받들어 모시는 마음을 갖는다면 서로가 서로를 돕게 되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둘 아니게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모두를 가릅니다. 시아버지는 이랬고 시어머니는 이랬고, 뭐 어떻고 저떻고 이렇게 다 갈라놓으니깐 갈라놓는 대로 갈라지는 거죠. 그렇다면 그 집안이 뭐가 되겠어요. 자손들도 쌈박질이나 하고 나가서 일이나 저지르고 이렇게 하다보면 집안이 편안하지 못한 거죠.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런 자식들을 낳아 가지고 이렇게 고생을 하느냐고 한탄을 하지만, 그거는 한탄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자기네들 생각에 의해서 모두가 그렇게 되는 거니까요. 마음으로 짓는 건데 천냥 빚은 못 갚겠습니까? 마음으로 하는 거 얼마든지 자비하고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고 얼마든지 줄 수 있는 건데도 그걸 못해요.
그래서 추석이 되면 자연스럽게, 물론 하루도 삼천 년 전이나 삼천 년 후나 어떤 하루밖엔 더 없지만 추석이다 하면 지수화풍과 일체 만물과 더불어 같이 감사하고, 하나도 감사하지 않은 게 없는 마음이어야겠죠. 일차적으로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차적으로는 법의 조상이나 육의 조상이나 모든 조상님들과 일체 제불에게 또는 일체 권속 일체 중생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내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나중에 마음의 회향을 할 때 한데 합쳐서 회향을 하게 되는 거지요.
생각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겁니다. 아무 생각을 안해도 생각을 한 게 되고, 생각한 사이 없이 생각을 해야 되는 거지만, 그 생각도 안하면 발전이 없어요. 생각을 함으로써 발전이 이루어지고 창조력이 길러지는 거니까 한 생각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추석은 상당히 뜻이 깊은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근본이 몸을 형성시킨 거니까 우리가 정신차려서 앞으로 생활을 해나가지 않는다면 어려운 지경이 많이 닥치리라고 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영령들에게 이렇게 하는 것에 있어서 알아두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참나를 탄생시켜서 상봉하는 겁니다. 현재 나가 과거에 살던 나를 발견해서 상봉을 한다면 자유 자재권을 얻어서 자유인으로써 12대 종손을 건진다고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일체 만물만생들을 다 응신으로서 나투면서 어느 것 하나 나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또는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는 그런 진리에 관한 것을 섭류해서 바로 자유권을 갖는 겁니다.
그리고 둘째는,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현실을 살게 되고 현실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미래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떻게 사느냐 하는 차원에 따라서 과거도 현실이고 미래도 현실인 오늘, 영원한 오늘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시면서 말입니다. 여러분이 부모라는 마음이 있고 자식이라는 마음이 있어서, 전기가 가설돼서 불이 들어오듯이 부모라는 마음이 가설돼 있고 자식이라는 마음이 가설이 돼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를 위해서든 자식을 위해서든 더불어 같이 내 육신 안에 생명들이 잔뜩 들어서 더불어 같이 공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을 밝히고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두지 말고 남을 원망하지 말고,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고 나를 밝혀서 1년에 한 번씩이라도 촛불재를 하면서 우리가 마음으로 항상 불을 밝히면서 생활 속에서 재료로 삼고 항상 행주좌와 참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세상은 생각하면서 뛰고 뛰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생활 자체가 부처님 법이요, 부처님 법이 우리들의 법이요, 우리들 육신이 바로 부처님의 형상이니 다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대무변하고 묘한 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내 마음을 어떻게 밝혀야만 되겠습니까. 자기가 나온 자리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정신계를 모르기 때문에 통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육신이 태어났으면 정신이 다시 태어나야 진짜 사람인 것입니다.
내 마음을 밝히면 자식들도 나가서 어떠한 문제를 저지르거나 하지 않고 또 지금 현재 상황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별의별 일들도 마음의 불을 밝히고 열심히 마음공부를 한다면, 생활에서 다가오는 모든 경계를 바로 재료로 삼아서 공부한다면, 자손들은 마음이 화해서 바꿔지고 바꿔지면서 화하고, 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의식들이 다 착해지고 밝아지고 보살로 화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만 하고 간다면 욕을 하고 때리지 않아도 스스로 밝아짐으로써 착한 심성의 자식들이 되고, 또 돌아가신 조상님의 영령들도 밝아져서 스스로 자기와 더불어 천도가 되게 됩니다. 나를 밝힘으로써 조상이라는 연줄도 더불어 같이 밝아지는 마음의 도리를 정말 다 알고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른 뜻 자꾸 놓치는데…

저는 바른 뜻을 자꾸 놓치는 듯해서 요즘은 법어집을 자주 보며 뜻을 새겨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한 가지 일에 대해 계속 생각이 떠오르는데, 놓았다고 생각하면 또 떠오르고 또 떠오르고 그래서 이런 각도로 생각을 하고 저런 각도로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제가 아직 제대로 다 놓지 못하는 것 같아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굳이 공부라고 할 것은 없지만,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져 나오는 자성을 발견하려고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말씀드리자면, 제일 먼저 나로부터 생기는 것을 나에게 다시 놓는다고 할 때에 바깥으로 거슬리는 눈초리나 또는 바깥으로 거슬리게 보이는 거나 거슬리지 않게 보이는 거나 모든 걸 상관 안 하고,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다가오는 대로 무조건 그 자리에 다 내려놓는 공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는 지금 이런 위치에 있고,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고, 나는 지금 이렇게 공부하고 가고 있다는 생각, 어떤 경우에 있어서 난 이렇게 알고 있다는 거, 난 이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모조리 다 내려놓아야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른 것을 다 한다 하더라도 내가 이런 거를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놓는 데에 장애물이 돼서 놓아지지 않는 겁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할 때 그 생각이 제일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다는 거, 내가 아니라면 이것을 꾸려 나가지 못한다는 그런 망녕된 생각 말입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그런 생각도 없어야 됩니다, 나 자신도 말입니다. 사람사람이 누구를 막론하고 그런 착과 욕심과 애착 또는 내가 안다는 아상을 세우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그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부처님 법이 얼마나 정확하고 좋은 법인데 그런 법을 그렇게 소홀히 해 가지고 터득이 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고등동물이면서도 앞으로 비가 올지 또는 태풍이 불어올지 또는 가정에 앞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어떠한 병이 생길지를 예측을 못하고 삽니다. 그런데 놓는다는 거는 그냥 맥없이 놓는 게 아니에요. 그냥 놓으라고 하니깐 맥없이 그냥 놓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급한데 그냥 놓으라고 한다면 그게 이해가 가겠습니까? 그 놓는다는 건 대치하는 거예요. 그 자체를 대치하기 위해서 놓는 것이지 무덤덤하게 그냥 놓는 게 아닙니다. 어떠한 문제든 그 자리에 맡겨 놓아야 보이지 않는 데서 대치를 해서 해결을 하지 그렇지 않으면 정신계에서 그게 안되거든요. 그러니까 놓을 수 있는 실천을 자꾸자꾸 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놓겠다는 생각에도 끄달리지 마시고 안 놓고 있다는 생각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냥 그 자체를 내려놓으세요. 변소에 앉았든지 어디에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떠한 상황에 있다해도 오로지 그 자리에서 해결한다는 믿음으로 맡겨 놓는다면 얼마 안 있어서 모든 것이 다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또 잘 되는 일은 감사하게 생각하구요. 그래서 어떤 경우이든 간에 얼마나 근본을 확고하게 믿을 수 있고, 나라는 것을 손톱만치도 남기지 않고 송두리째 맡기고 살아갈 수 있느냐가 생사를 갈라놓을 수 있는, 생사를 파괴할 수 있는 그런 함이 없는 공부라는 것을 진실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끄시는 방편에 대해…

스님의 가르침을 서툴게나마 실천해보려 애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인공에 맡겨놓고 굴리다보면 답이 나온다는 가르침이 있지만 성급한 마음에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나투신 모습, 시대, 장소가 다르다 할지라도 모든 스승은 동일하며 한마음 그 자체의 현현이라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습을 통해서 중생을 이끄실 때는 단체의 형식을 띈 일가를 이루시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끄시는 방편에 따라 가풍이 다르고, 법맥을 매우 중요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때로는 배타성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법맥을 중시하시는 까닭이 단지 공부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함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깊은 뜻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직 모습과 이름에 걸려 있는 마음놀음을 용감히 떨칠 수 있도록 열심히 놓고 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그거는 고정되게 그대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때그때 시절에 따라서 말씀하셨지만 시대가 돌아가는 대로 용어가 다르고 말이 다르게 표현이 돼야죠. 예전에는 달구지에 짐을 실어 날랐지만 지금은 사람도 태우고 물건을 실어 나르는 비행기가 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뜻은 똑같으나 이와 같이 사용하는 용어가 바뀌고 말이 변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알아서 어떻게 해야만이 완성을 하면서 가정도 잘 이끌어 갈 수 있고 또 조상들도 완성을 시킬 수 있고, 자녀들도 완성된 어른으로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거죠. 그러니깐 이거는 일거양득이 아니라 삼거양득이죠. 삼거양득이란 거는 삼심이 일심으로 통하고 돌아가니까 전체를 살린다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현상세계의 법을 먼저 가르쳤고 그 다음에 무의 세계의 법을 가르쳤어요. 그 사람 인생이 다 가도록 그렇게 했단 말입니다. 무의 법을 먼저 가르쳤고 고 다음에 무의 법 유의 법을 같이 가르쳤기 때문에 법화경이 생긴 거라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예전에는 예전대로 그렇게 했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이니까 우리는 단 한순간에 동일하게 그냥 하자는 겁니다. 행주좌와를 그냥 하자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지금은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발전하는 것도 우리 마음에 달린 거지 딴 사람이 하고 가는 거에 기대고 그거를 본 따서 갈 게 뭐 있겠습니까? 지금 세상이 빠르면 빠른 대로 가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가르쳐주지 않고 다르게 말한다고 하지마는 옛날에 달구지라고 했다고 해서 지금도 달구지라고 해야 옳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말씀해 놓으셨을 겁니다. 시대가 변천하는 대로 계율도 방편도 바꾸라고 말입니다. 꼭 그렇게 말씀하셨으리라고 믿습니다. 지금 돌 하나도 버릴 게 있습니까? 전체가 다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입니다. 그러니 부처님 법 따로 있고 우리들의 법이 따로 있고, 현재 법이 따로 있고 과거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찻잔만 봐도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뚝배기에 물도 마시고 차고 마시고 했지만 지금은 아주 보기 좋고 아름답게 만들어서 찻잔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까. 근데 찻잔이라는 이름을 전자에 뚝배기라고 했다고 해서 지금도 뚝배기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러니까 뜻은 다 똑 같아요. 과거나 현실이나 미래나 똑같은데 발전하는 대로 용도와 그 방편이 자꾸 변하는 것이죠. 그래서 갓 낳아놓은 애는 아기라 그러고 조금 자라면 청소년이라 그러고 조금 더 자라면 청년이라고 하고 조금 더 자라면 어른이라고 하고 더 자라면 늙었다고 합니다. 그게 물질이 변하는 대로 이름을 붙이는 거지 처음의 아기를 보고 어떻게 늙었다고 하고 그렇게 이름을 바꿉니까? 변천하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이름도 정해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이며 발전이며 물질 과학보다도 심성과학으로 발전을 시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공부입니다. 여러분은 전력이 들어오고 나가는 걸 못 보고 태양열이 들어오는 걸 모르죠? 못 보죠? 보지도 못하고 쥘 수도 없고 끌어당길 수도 없죠? 그러나 바탕만 태양열을 받을 장비를 해 놓는다면 태양열이 들어와서 자연적으로 전력으로 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마음이라는 광대하고 묘한 법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다 이겁니다. 그러나 있기는 있습니다. 절대죠, 아주. 절대 있으니까 그대로 믿고 맡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법당에 들어가니까 부처가 법당에 있는 거고 내가 변소간에 가면 부처는 바로 변소간에 있는 겁니다. 평등하게 생각하면 부처요, 한 생각 냈다면 법신이요, 또는 한 생각 내서 움죽거리겠다 하면 화신입니다. 그런데 어디 딴 데서 나옵니까?
그래서 진짜로 들어가서 진짜 함이 없이 하라고 말을 했는데 정말이지 그대로 내가 목마르면 얼른 꺼내서 물을 마실 줄 알아야 되는 겁니다. 여기 컵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컵 모양이 어떻게 생겼고 물은 얼마나 담기고 또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다는 걸 아무리 속속들이 잘 안다 하더라도 내가 목이 말라죽겠는데도 그 물을 갖다가 마실 수가 없다면 무효라는 걸 아시고 하나라도 실천해 가는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영혼이 나뉘어지는지…

불교에서는 생명은 윤회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인구가 일정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죽어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그럼, 영혼은 여러 개로 나누어 분열증식 되어지는 것입니까? 이것은 다른 종교가 생겨나는 원인이기도 하오니 철저한 답변을 청하옵니다.

윤회라고 해서 나쁘게 되는 것만이 윤회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좋은 것도 윤회요, 나쁜 것도 윤회인 것입니다. 요즘 유전공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죠? 그런데 유전공학이라는 것은 물질적으로 그것을 크게도 할 수 있고 작게도 할 수 있고, 여러 개를 만들 수도 있고 아주 작게 축소할 수도 있는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습으로 바꿀 수도 있는 그런 문제가 있죠.
그런데 무전자라고 하는 거는 보이지 않는 마음이 계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대무변한 것입니다. 살면서 ‘아, 나는 이게 참 아쉽다.’이러면 아쉬운 거를 보충해 주는 그 무전자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내 마음 나오기 이전과 더불어, 예전에 각을 이룬 선지식들이 말씀하신 대로 손가락 하나 드는 데에 모든 우주가 들린다고 하신 말씀 자체가 그 이치를 알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전체 무의 세계 유의 세계를 다 포함해서 알았기 때문이고 한생각에 진화돼서 창조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늘어나는 인구는 또 살지 못하고 껍데기가 없어지죠. 모습이 없어진단 말입니다. 모습이 없어지면 영혼이 살게 되죠. 영혼이 살게 되면 영혼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또 태어나게 돼 있습니다. 태어나게 돼 있어도 진짜로 마음공부를 한 사람들은 태어나지를 않습니다. 태어나지 않고 어떤 돌도 자기 몸이 되고 자기 집이 되고 또 어떤 산도 자기 몸이 되고 자기 집이 되고, 그렇게 여러 가지가지로 부어진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사람으로만, 생명으로만 태어나는 게 아니라 생명체 에너지로도 태어나는 겁니다. 어떠한 돌이든지 흙 속에 묻혔든지 어떠한 나무 속에 묻혔든지 각각 모두 그것이 에너지로다가 화해서 생명들이 있는 사람들을 다 살리고자 하는 거죠. 그렇다면 한생각이라는 것이 유전공학으로서의 물질을 가지고 연구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가지고 연구를 하기 때문에 그 연구한 자체도 없으면서 진화되고 바로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진화력을 가지고 우리가 찰나찰나 진화되는 것을 바로 윤회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꼭 죽고 난 다음에 나타나는 현상만이 윤회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24시간 살아나가는 데도 찰나찰나 고정된 관념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바로 지금도 우리가 순간순간 윤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 버려야 하는지…

깨달음을 얻으신 선지식들은 가족도 버리고 집도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공부를 하셔서 도를 얻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듯 모든 것을 버려야만 공부가 되는 것인지요? 그렇지 않으면 스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생활 속에서 내 마음을 닦아나가는 마음공부를 통해서도 그러한 경지에 도달을 할 수 있는 것인지요?

어떤 사람은 이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내 몸은 생각지 마라 이러기도 하는데 그런 점이 있기도 해요. 그래서 진짜로 공부하는 사람은 한번 미쳤다는 소리 듣지 않고는 못하는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산으로 다니면서 공부할 때 넓은 길이 길이 아니라 갈대가 많고 온통 그냥 돌수덕 다리인 그런 데가 길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내 속에 스승이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두 말도 안 했어요. 여러분 같으면 대로가 있는데 길이 아닌 데를 길이라고 하면 그거 믿겠어요? 그러나 믿든 안 믿든 그대로 나를 내버렸다면, 내가 죽었는데 무슨 말이 있겠느냐 이겁니다. 내버렸다면, 진짜로 내버렸다면 이리로 가든 저리로 가든 무슨 상관이냐 이겁니다. 그래서 나는 갔죠. 그러니까 온 몸이 다 찢어지고 벗겨지고 그래서 피가 나고 그러는데도 하나도 생각이 움죽거려지지 않아요. 날 버렸기 때문이죠. 버리려면 아예 그렇게 버리고 안 버리고도 지금 현재의 여러분은 고정됨이 없다 하는 거를 알게 되면 그대로 거기 놓고 ‘나는 내가 아니고 내 주인이 나를 이끌어 간다’는 생각을 하고 다 놓으면 그것도 죽는 거예요. 나도 처음에는 모르고 그랬지만 나중엔 그렇게 해도 죽는 거고 저렇게 해도 죽는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얼마나 그 밤에 따뜻하게 잤는지 모릅니다. 가다가 길이 막혔는데 천야만야한 데를 한발 내려 뛰라는 겁니다. 그런데 나를 버렸기 때문에 뭐 죽고 사는 거를 가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발짝 턱 내디뎠더니만 뭐 빙글빙글 돌아서 떨어진다는 게 나뭇단 있죠? 예전에는 나뭇단을 묶어서 산 밑에다가 쌓아놓는 데가 있었습니다. 그게 쌓여져 있는 데에 펑 하고 떨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떨어지고 어이가 없어서 엉금엉금 기어 내려와서 생각을 하니까 ‘아하, 고마워! 나무 한 단 빼놓고 그 속에서 자라고 그랬구나! 참 이렇게 신기한 법이 어디 있는가. 내 몸은 모두 너의 시자일 뿐이야. 시자를 따뜻하게 자라고 이렇게 했구나.’하고 나무를 하나 빼고선 들어가니까 얼마나 따뜻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을 해볼 때에 나를 버리면 성공한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모두 여러분이 자기가 함이 없이 지금 연기법을 하고 가고 있습니다. 근데 본인 자체가 그걸 알지를 못해요. 살아오던 집착과 번뇌라고 할까 그것이 그냥 그대로 꽁지가 꽁지를 물고 꽁지가 꽁지를 물고 연결되어 돌아가는 거예요, 머리 속에서. 그렇게 연결해서 돌아가더라도 내가 아주 죽었다면 거기에 뭐가 있겠습니까? 내가 나를 버렸다면 말입니다. 내가 버려서 버리는 게 아니고 이미 그렇게 버려지고 가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미!
그래서 어느 때든지 어디 가서든지 항상 하는 말이 “고정되게 볼 수 있느냐? 고정되게 듣고 있느냐? 고정되게 움죽거리느냐? 아버지 노릇만 하느냐? 어머니 노릇만 하느냐? 남편 노릇도 하고 아들 노릇도 하고 형 노릇도 하고 아우 노릇도 하고 이러지 않느냐? 그러니 그렇게 자동적으로 돌아가지 않느냐”하는 겁니다. ‘아버지’하니까 뭐 아주 자동적으로 ‘그래’하고 대답을 하고 맞아들이는 그 아버지가 자기겠습니까? ‘여보’하면 남편으로서 대하는 그 남편이 자기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깐 그대로 여러분은 연기법을 하고 가고 있습니다. 연기의 공법을 그대로 하고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버렸다 취했다 하는 것도 고정돼 있는 법이 아니고 찰나찰나로 돌아가고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일 뿐입니다. 뭐가 붙어 있어서 못하는 것도 아니고 버려서 잘하는 것도 아닌, 본래 그렇게 따로따로 나누지 않는 것인 줄을 아셔야 합니다.

극락세계는 실존하는지…

지성으로 삼배 올리오며 질문드리옵니다. 극락세계는 실존하는 세계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스님 설법에 “지옥, 극락이 따로 있다고 생각지 말라, 현실세계에 모두 존재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경에는 아미타 부처님의 원력으로 이루어 놓은 세계로, 엄연히 영계가 실존하는 세계로 되어있습니다. 제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법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영계에 대하여도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극락세계가 어디 먼 곳에서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또 다른 데서 찾지 말고 바로 지금 여러분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찾아보세요. 여러분이 어떻게 한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순간 극락에 갔다가 순간 또 지옥에 간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현상세계에서 감옥살이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얼마나 마음이 지옥이겠습니까?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얼마나 지옥일 테며, 갇혀있다고 생각이 들 때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지옥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지옥이 어디 멀리만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지옥이 없습니까? 뭐 다른 데 가서 보지 마세요. 자기 마음이 잘못해 가지고 자기 육신을 얼마나 고생을 시킵니까?
저승이 멀고 가깝고가 없습니다. 윗눈썹하고 아랫눈썹하고 깜짝거리는 거와 같이 바로 저승과 이승은 가까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승과 이승을 까맣게 모두 생각을 안하니깐 멀다고 하는 겁니다. 지옥과 극락도 멀게만 느껴지고요.
우리가 지금 현재에 보면 과거로 인해서 인연을 두고 고리를 걸어서 현실에 나오고 그것이 미래를 돌아서 현재가 또 과거가 되고 이렇게 돌아가니까 우주 삼세가 다 공해서 일체로 돌아간다고 하죠. 그러니 깨닫지 못한 사람은 과거를 따지고 현재를 따지고 미래를 따지니까 문제가 생기고 걸려서 넘어져서 깨지고 아파서 울고 온통 고통을 겪지만 깨달아서 왕창 결정이 난 사람들은 삼세를 홀딱 다 그냥 껴안았으니까 걸려도 걸리는 것이 아니고 넘어져도 넘어진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걸림이 없는 겁니다.

불성 어디서부터 왔는지

공부를 하다가 궁금한 게 있어 질문드립니다. 자성, 불성은 어디서부터 왔는지가 궁금합니다. 물론 물질 세상에 젖은 우리들로는 인식하기 힘들겠지만 스님의 명쾌한 답을 부탁드리면서 삼배 올립니다.

예전에 오조 홍인 선사가 육조 스님이 행자였을 때에 삼경에 들라고 해서 찾아가니 금강경을 설해주셨는데 그 끄트머리에 육조 스님의 대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마 나보다도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근데 거기에는 말이 아니라 뜻이 있습니다.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까?”하는 말의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을 어찌 알았으리까? 그 본래가 참 중요합니다. 자성이 스스로 갖추어 가지고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자성이 움죽거림이 없이 만법을 들이고 내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이겁니다.
여러분은 아마 나보다도 더 잘 아시니 그걸 듣고 뜻을 감지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지껏 들으시고 알고 있고, 자기가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알고 있는 자성이 무엇인 줄을 모르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성은 어디서 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부터 왔다고 한다면 또 가야하는 것이 붙지 않겠습니까? 본래 스스로 갖추어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들이고 내는데 손색이 없고 여여하단 말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걸, 일체 다 알고 있죠. 잘못되고 잘된 걸 다 놔라 이랬습니다. ‘잘못되고 잘되고 좋고 나쁜 걸 아는 거를 다 놔라’이런 것은 잘못되는 것도 나오고 잘되는 것도 나오고, 잘하는 것도 나오고 못하는 것도 나오고, 높은 것도 나오고 얕은 것도 나오고, 일체 평등하게 거기에서 그르고 옳은 게 다 나오니, 나오면 바로 나오는 대로 제깍 자기가 알고 있단 말입니다. 또, 나오는 것도 알고 들이는 것도 알고 있단 말입니다. 그 자성의 원력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다 싼대도 두루 할 수 있는 그런 광대무변한 자리입니다. 일체제불이 같이 하고 있고, 일체제불이 다 있는 자리에는 일체 중생이 다 같이 하고 있다 이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걸 말로만 듣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따로따로 이름은 있으되 공존하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고 네 가지고 종류가 한데 합쳐서 공존하고 있다 이겁니다, 공존하고 있어요. 눈과 귀가 따로따로 있으나 이름도 따로따로 있으나 눈 간 데 귀가 가고 귀 간 데 눈이 속해 가더라 이거예요. 또 무슨 시각이니 청각이니 감각이니 촉각이니 하는 것도 같이 혼합해서 동시에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척 보면 척 돌아갑니다. 안 그렇습니까?
말을 하기 이전, 우리가 알고 있는 자체의 자성, 아주 묘각이라고 할까요? 아주 묘해서, 내가 항상 하는 말이 마음을 좋게 생각하라고 하는 겁니다. 생각을 좋게 해라. 꿈을 꿔서 언짢더라도 좋게 생각하고 놓으면 그대로 회전이 돼서 보이지 않는 50%에서 보이는 50%로 나온다. 나오니 그대로 믿고 그렇게 해라 하는 것이 그 말하기 이전입니다.

2002-10-02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