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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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세상 속으로…
마왕 유혹=일상의 즐거움
마왕 물리침=세상 구제

인도 비하루 주의 수도인 파트나는 인도불교사에서 제3결집이 시행된 파탈리푸트라의 유적이 있는 장소이다. 이곳에서 캘커타행 기차를 타고 두어시간 달리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드가야가 나온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곳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했다. 불교의 서막이 열리는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필자는 모처럼 주어진 연재의 서두을 어떻게 시작할까 궁리하다가 불교의 발상지에서부터 사건을 더듬어 가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새롭게 역사적 해석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붓다가야에서 완성된 깨달음이 없었더라면 불교라는 종교도 없었을 것이며, 부처님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출가수행 당시의 부처님은 많은 여정을 거쳐 다섯 비구와 이곳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극심한 고행으로 육신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때까지의 고행을 포기하고 네란자라 강에 들어가 목욕을 한 뒤에 기어서 간신히 언덕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수자타란 처녀의 공양을 받고 기력을 회복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그의 행동은 당시의 수행풍습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위에 속했기 때문에 다섯 비구들은 부처님께서 타락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홀로 남은 부처님은 “저 나무 아래에 앉아 도를 이루지 못하면 결코 일어서지 않으리라”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근처에 있던 나무 아래에 앉아 선정삼매에 들어가며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었다. 이때 그늘 삼아 앉았던 나무의 원래 이름은 핍바라수였지만 이후에는 깨달음의 나무란 의미를 지니는 ‘보리수’로 개명되어 수많은 불교도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현재도 이 나무는 보드가야에 건재하고 있으며, 많은 순례자들의 예배를 받고 있다. 중국의 순례승 법현스님과 현장스님도 이 나무에 합장했다는 기록이 <<법현전>>과 <<대당서역기>>에 남아 있다. 그러나 불교의 쇠퇴와 이교도의 범람으로 이 나무는 근대까지 정글에 묻혀 있었으며, 1881년 영국인 커닝햄에 의해 발굴되어 세상에 소개되었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도를 이루지 못하면 죽는 한이 있어도 일어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는 오늘을 살아가는 나약한 심성의 우리들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자기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불전에서는 더욱 실감나게 이때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악마가 유혹하는 장면이다. “세상에서 목숨처럼 소중한 것은 없소. 목숨이 있어야만 종교적 수행도 가능하오. 당신과 같은 고행 방법으론 천에 하나라도 성공할 수 없소. 마음을 억제한다든가 번뇌를 끊어버린다든가 하는 것은 당초부터 무리한 일이오. 그러한 짓은 그만두도록 하시오. 훨씬 즐거운 방법이 얼마든지 있소. 바라문이 하는 것처럼 불을 섬기고 제물을 바치면 얼마든지 공덕이 쌓일 것이오” 이러한 유혹에 “악마여, 내가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이익이 아니다. 목숨은 언젠가 죽음으로 끝날 것이므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리 강물이 많더라도 쉴새없이 바람이 불어닥치면 마침내 말라버리듯이 고행을 계속하면 육체나 피는 말라버리지만 내 마음만은 항상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의욕과 노력과 정신통일이 내게는 갖추어져 있다. 그 위에 지혜도 있다. 헛되이 살아서 무엇할 것인가. 용감한 군인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는 너와 결전을 하리라”고 선언한다. 이로서 악마는 물러났다고 한다.
이상의 대화를 살펴보면 악마는 부처님에게 평범한 삶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욕망과 관습과 자기를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그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 삶이다. 사실 누구나 세속적인 욕망을 포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세상에 오욕락에 대한 달콤함 보다 더한 유혹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욕망이 인간의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인이 되었다고 긍정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하더라도 범속한 이익만이 아니라 청량한 정신과 번득이는 지혜가 있어야만 욕망으로 점철되는 역사의 바퀴가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악마의 유혹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현실을 이상적인 세상으로 바꾸는 데는 자기희생이 필요하며, 그런 점에서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다.
인간들의 욕망이 절제된 평화와 안락이 넘치는 사회,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자유와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사회는 어쩌면 이상에 불과할 수 있다. 그렇지만 부처님처럼 죽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러한 이상을 구현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단순한 이익이 아니라 너무 커서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이익이다. 마왕 파순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이상과 같은 결심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리고 부처님과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고, 보다 밝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
200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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