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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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발견하는 것이 제일 으뜸가는 공부
여러분께서 인생에 대해서,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시기 위해서 이렇게 수행을 하시는 것을 너무나 기쁘게 생각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말을 해서가 아니라 말을 안 하고도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팔만대장경에 어떻게 이 세상 이치를 다 적으리까! 이 세상을 볼 때에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까? 뭐냐? “너희는 마음이 넓으면 넓은 대로 좁으면 좁은 대로 차원에 따라서 악행을 하든 선행을 하든 너희 마음대로 살다가 다 놓고, 네 몸까지도 놓고 가거라.”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안 그럽니까? 몽땅 다 놓고 가되 자동적으로 입력이 되는 것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인과가 되고 유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극히 조심하고 선덕을 잘 쌓고, 마음을 발견하는 것이 제일 으뜸가는 공부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개미 한 마리 풀 한 포기도 전부 여러분의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꼭 말을 해줘야만 알겠습니까? 허공은 허공대로 티 하나 걸리지 않고 자유스럽게 흘러 돌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걸 보고‘나같이 살라’고 하는 겁니다. 또 물은 물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생명들이 살아나가는 집으로서 만생(萬生)을 이끌고 나가는 물은 더럽다 깨끗하다는 말이 없이, 어떠한 차원도 그냥 흘러갑니다. 꼭 말을 해줘야 압니까? 그것도 바로 우리들이 배워야 할 스승입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라 동쪽으로 바람이 불면 동쪽으로, 서쪽으로 바람이 불면 서쪽으로, 나무들도 바람 부는 대로 날려서 아무리 뿌리가 뽑힌다 하더라도 말없이 그대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뭐 원망을 하면서 바람이 왜 부느냐, 왜 뿌리가 뽑히게 하느냐, 왜 못살게 하느냐, 왜 눈이 오느냐, 왜 우박이 나한테 타격을 주느냐는 이런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가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어디에 원인이 있느냐?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는 겁니다.‘우리처럼 말없이 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뿐입니까? 꽃이 피었다 시드니 꽃잎이 다 떨어지고, 가을이 되면 열매가 맺고 씨를 만들어놓고는 그냥 앙당한 가지만 남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뽑히고 뿌리가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이 인간도 뿌리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이 스승 아닌 게 어디 하나나 있습니까?
개미들이나 짐승들을 보십시오. 날아다니는 새들도 알을 까놓고 자기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 그거를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자식들을 낳아서 키우고 이끌어주고 똑바로 가게 하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까? 어디가 어떻게 다칠까봐 걱정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림살이가 다릅니까? 모습도 다르고 차원도 다르지마는 그 살림살이의 근본은 다 똑같은 겁니다. 개미들도 그렇고 말입니다. 얕잡아볼 게 하나도 없죠. 그래서 ‘내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만물만생이 다 나와 같이 공생(共生)·공용(共用)·공체(共體)·공식화(共食化)하고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다 자식이다 하는 인연에 연연해 하고 애착을 갖고 붙들고 늘어지는데,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항상 말하지마는 억겁을 거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도둑질은 안 했겠습니까? 생명을 잡아먹지는 않았겠습니까? 나쁜 짓은 안 했겠습니까? 모자라지 않았겠습니까? 병신이 안 되어봤겠습니까? 각양 각색으로 거치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둘 아니게 보라고 하는가 하면 모자라는 사람을 보면 과거에 내 모습으로 보고, 잘못한 사람이 있을 때는 바로 과거에 잘못한 내 모습으로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속에서 악이 나오지 않습니다. 분기가 없어지고 유하고 부드럽게 말이 나갑니다.
부모 자식이다 할지라도 한철 부모 자식일 뿐이지 그 한철이 지나면 그대로 뿔뿔이 제가끔 몸도 다 놓고 갑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죠. 거기서 또 재생이 돼서 다시 나올 때에는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과(果)를 가지고서 이 세상에 출현을 하게 돼있죠. 그러면 다른 부모의 다른 자식이 되죠. 이건 인간뿐만이 아닙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렇다 이겁니다. 그래서 넓게 생각을 한다면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찰나에 한 인생이 가고, 한찰나에 인생이 생하고 돌아가는데 어떻게 요 한철만 생각하십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친구들과 모여서 놀러갔다고 합시다. 모여서 놀러갈 땐 한 식구입니다. 그런데 놀 자리를 잡아서 즐겁게 놀다가 저녁이 되면 다 헤어집니다. 뿔뿔이 자기 갈 데로 다 가고 그 자리조차도 내놓습니다. 그와 같은 우리네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만 그런 게 아니라 우주의 섭류도 다 그렇습니다. 저 혹성이나 혜리성(핼리혜성)이나 또는 어떠한 별성이든, 혹성이든 간에 수명이 길고 짧을 뿐이지….
지금 아래로 쭉 보세요. 새들이나 토끼같은 짐승들은 수명이 인간보다 짧지만, 또 수명이 아주 긴 것이 있고, 천차만별로 길고 짧고 길고 짧고 이렇게, 수명을 아주 단축시키는 것도 있고, 인간은 열 달이 돼야만 낳지만, 육 개월만에 낳는 것도 있고, 석 달만에 낳는 것도 있고, 그거는 여러 층으로 아주 많지 않습니까? 몇 주일만에 낳는 것도 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그렇게 차원에 따라서 자기한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술자면 기술자대로 모이고 또는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짓는 사람들대로 모이고, 배를 타는 사람은 배를 타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듯이 말입니다.
모두가 그런 현상 속에서 우리를 끌고 다니다가 다 놓아버리는 주인공을 어떻게 믿지 않고 무시하겠습니까? 수 억겁 전으로부터 생(生)이 생겨서 이렇게 이끌어 가지고 인간까지 이끌어 왔는데 말입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허공을 믿을 수도 없는 거고, 이름을 믿을 수도 없는 거고, 형상을 믿을 수도 없는 겁니다.
인간의 마음만 같이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태양이니 별성이니 달, 어느 혹성을 막론해놓고 같이 돌아갑니다.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근본이 직결돼 있다고 하는 거 아닙니까? 모두가 내 살림 아님이 없고,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는 공생·공용·공체·공식화하고 서로 주고 서로 살기 때문에, 이 세상사는 전부 가설이 돼있는 근본이 바로 내 마음에 가설이 돼있기 때문에 항상‘나 먼저 알아야 하고 나 먼저 발견해야 된다. 나를 끌고 다니는 나를 믿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를 믿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습니까? 아무것도 몰라도 누구를 믿느냐고 하면 자기 주먹을 믿는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초 하나를 켜놔도, 초를 켰는데 구부러져 가지고 한쪽이 기울어지게 타 들어간다거나 이러면 촛물이 흐르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 거를 볼 때 고 부분을 가위로 딱 잘라서 똑바로 해놓고 또 기울어지면 똑바로 세워놓으니까 한쪽이 일그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인간의 마음도 마음으로써 다스리면서 나가는 것이 그런 거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고삐를 자기가 쥐고, 항상 남의 밭으로 들어가면 안된다고 “이랴! 워! 워!”하면서 똑바로 가게끔 고삐를 쥐어라 이 소리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그냥 갈 수 없는 바로 자기 공부입니다.
항상 방편으로 말씀드리지만, 내 집에 전화를 놔야 남한테서 전화를 받고 또는 전화를 할 수도 있는 거지 내 집에 전화를 놓지 않고서는 전화를 받을 수도 없고 전화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인과법칙이라든가 또는 유전법칙이라든가 이 모든 생태의 문제들을 알려면 나부터 알아야 된다는 얘깁니다. 나부터 아는 동시에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데에 유유히 아주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정신계와 물질계를 작용하면서 베풀어나갈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냥 말로만 알고 머리로만 굴리고 이론으로만 쫙 알아가지고 말을 아무리 잘 해도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말을 배우려고 하지 말고 한 발짝을 떼어놔도 실천을 할 수 있는 심력을 길러서 하나하나 터득하면서 체험하면서 나가는 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꿇어앉았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 섰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이뭣고’하기 이전에‘내가 만법(萬法)을 들이고 내는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구나.’하는 것을 능가할 수 있어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로 돌아가는 그놈이 뭔가 하기 이전에 “아, 그놈이 하는 거니까 모든 걸 거기다가 되돌려 놔라.” 이 소립니다. 의심할 게 뭐 있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내가 들이고 내고, 나쁜 거든 좋은 거든 못났든 잘났든 내가 가는 길에 의심할 게 뭐 있습니까?
그래서 사대성인들이 말씀하셨습니다. “너 똥 누러 갈 때도 눠야 될까, 안 눠야 될까 하고 가느냐? 똥 마려우면 아무 생각 없이, 이럴까 저럴까도 생각 없이 그냥 화장실로 가서 시원하게 싸버리는 거 아니겠느냐? 그리고 배고프면 먹는 거 아니겠느냐? 졸리면 자는 거 아니겠느냐? 그렇게 여여하게 사는 것이 바로 여래의 집이니라.”라고 말입니다. 여여하게 산다고 해서‘여래’라는 얘기입니다. 부처님의 이름이 아니라 여러 부처님들을 한데 합해서 바로, 중생 속에서 부처가 나고 부처 속에서 중생이 나니까 한데 합쳐서 여래의 집이요, 여래라고 한 겁니다. 배를 똑바로 저어서 강을 건넌다고 하는 것도 그것도 잔소리입니다. 면경을 잘 닦아서 먼지 앉지 않게 해야겠다는 것도 그것도 잔소리입니다. 망상이니 정법(正法)이니 사법(邪法)이니 하는 것도 다 망상입니다.
그대로 내 마음이 나를 다스리면서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을 한마음으로 이끌어서 둥글려서 마음을 잘 쓴다면 그 의식들이 다 한마음으로 따라주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입력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 자동적으로 좋은 입력이 됐으니 자동적으로 좋은 일만 나올 수밖에 없죠. 그런데 함부로 생각하고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을 하니까 그게 입력돼서 그렇게 한 대로 나오는 거죠.‘과거가 어떻고 미래가 어떻고 지금이 어떻고’ 이렇게 말들만 하시지 말고, 과거의 씨가 현실의 싹으로 나서 지금 씨가 됐습니다. 그런데 과거 어디 가서 씨를 찾습니까? 현실에 내가 안고 있는 것이 그대로 과거의 씨도 되고 미래의 씨도 되는 것입니다. 그거 찾기가 뭐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제가 예전에 공부할, 공부라고는 할 거 없지만 수행을 해 나올 때 얘기입니다.‘구렁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데 그것을 받겠느냐?’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마음이 그렇게 아름답고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구렁이라면 모습이 구렁이인들 어떠리!’즉 말하자면 내 어머니가 못나고 못 배웠다고 해서 남의 잘나고 잘 배운 어머니하고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아니, 어머니를 바꿀 수 없죠? 잘났든 못났든 말입니다. 그와 같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잘났든 못났든 자기를 바꿀 수는 없는 겁니다. 부처님이 여기 있다 하더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부처님을 따라가다가는 허방을 짚습니다. 못났든 잘났든 자기가 바로 자기 마음을 계발하면서 거기까지 한자리를 할 수 있는 수행을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모든 마음들은 근본에 의해서 하나로 돌아간다.’ 이런 겁니다. 모든 생명의 근본은 하나다, 하나로 돌아가는 게 바로 불바퀴라고 한다. 전력은 누구나가 다 끌어 쓸 수 있는 것이다. 다 같이 직결이 돼있기 때문에. 그런데 어딜 믿습니까? 나로부터인데.
여러분이 어떠한 기술을 가졌든지, 상업을 하든지, 과학자든지, 의사든지 노동을 하든지 뱃사공을 하든지 하여간에 못났든 잘났든 자기가 근중한 줄 알아야 됩니다. 부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모두가 높으니라. 비유를 하자면, 농사짓는 데 가면 농사꾼이 으뜸이요, 물에 가면 뱃사공이 으뜸이요, 과학자한테 가면 과학자가 으뜸이요, 노동하는 데 가면 노동자가 으뜸이라고 말입니다. 이래서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한 겁니다. 자기 혼자만이 그런 게 아니라 모두가 높으니까, 개미도 개미 소굴에서는 높은 겁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주는 것이, 세상 천지의 모든 것이 제가끔 끼리끼리 놓여져 있습니다. 한데 섞어놓은 게 하나도 없어요. 요거 맛 다르고 조거 맛이 다 다르지마는 다 사람한테 좋은 거죠. 그런데 이 사람이 이거 좋다 하면 이리로 쏠리고, 저거 좋다하면 저리로 쏠리기 때문에 여러분은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는 겁니다. 남의 말을 그렇게 잘 듣기 때문에 듣는 대로 입력이 되니까요. 누가 이 병은 못 고친다고 하면 아주 입력이 돼버리니까요. 그러니깐 그대로 가죠.‘아니다’라는 생각이 중심이 서야,‘그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나 할 탓이지.’ 이렇게 해나갈 수가 없는 거죠. 약하니까. 집에 주인이 없으니 얼마나 약하겠습니까? 주인이 있다면 딱 버티고 어떤 게 들어와도, 무슨 말을 해도 잘 리드해서 끌고 나가지마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 말 들으면 이 말 듣는 대로 “인제는 죽었구나. 자식들하고 이거 어떡하지?” 이렇게 되니까 그대로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태교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하는 거죠. 전부 듣고 따르고 있으니까요. 지금 몸 속에 있는 그 수십 억의 의식들이 내 마음이 하자는 대로 따르니까요.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생각을 하면 벌써 두뇌로 올라가서 하달이 되거든요. 그럼 입력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더 무서운 것은 자동적으로 입력이 되는 겁니다. 물질적인 컴퓨터는 사람이 입력을 해야 나오지마는 사람들이 사는 자동적인 숙명통, 즉 마음의 컴퓨터에 그냥 입력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깐 마음을 건실하고 건전하게 항상 갖고, 인연에 따라서 집착을 하지말고, 아까 얘기했듯이 모여서 즐겁게 놀다가 즐겁게 헤어지는 거니까 부드럽게, 즉 말하자면 마음이 밉고 원망하고 식구들과도 그렇고 남들과도 그렇고…. 모두 그렇게 나가면 서로 인과가 되고, 즉 말하자면 원수도 되고 그것이 유전이 되니까 낭패가 되는 거죠. 죽고 또 죽어도 다시 결부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깐 모든 걸 제자리에다 되놓고 돌아가는 동시에 바로 나도 발견할 수 있는 거고, 물리도 터질 수가 있는 거고, 자비도 생길 수가 있는 거고,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으니까 누구 원망도 안 하고 악을 쓰고 야단을 친다 하더라도 속으로 미운 생각, 원망이 하나도 없이 그냥 말로만 악을 쓰게끔 되죠. 그러면 벌써 인과가 되지 않고, 유전이 되지 않으니까 여러분이….
내가 한마디하는 것은, 우리가 잘되고자 해서 지금 이 공부하는 거 아닙니다. 잘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다 놓고, 수 억겁으로부터 나를 이끌어 가지고 온 장본인, 주인을 진실히 믿고 죽어도 거기, 살아도 거기, 모든 게 거기서만이 돌아가는 겁니다. 태양계의 지구가 지금 꼭지 없이 매달려서 돌아가듯 말입니다. 우린 마음의 자력에 의해서 같이 돌아가는 거거든요. 마음이라는 건 체가 없어서 우주 전체를 한데 합쳐도 합친 사이가 없어요. 그런데 뭐이 못마땅해서 그거를 놓지 못하고, 합치지 못하고 그렇게 믿지 못합니까?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왜 믿지 못합니까?
믿는다면, 진정코 믿는다면 지금 당장 죽는대도 싱긋이 웃을 수 있는 겁니다, 진짜로 믿는다면 말입니다. 자식이 죽는다, 부모가 죽는다, 내가 죽는다 해도 아랑곳없어요.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자유인이 될 수 있죠. 권리를 가질 수 있고, 열쇠를 가질 수 있고, 즉 말하자면 여래장(如來藏)이 되겠죠. 그런데 뭐이 답답하겠습니까? 질문하실 분 질문하세요.
▲질문자1: 예. 저희들이 평소에 의문 나던 점을 몇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대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유전인자에 대한 비밀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습니다. 지금 보도에 따르면 프랑스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있던 한 유전인자의 구조를 밝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발견이 왜 특별하냐 하면 유전인자의 구조가 밝혀짐에 따라 몇 가지 유전병의 치료방법을 알아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말로는 앞으로 10여 년 후면 수천 가지의 유전병과 불치병 중의 상당한 부분의 치료법 개발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유전병 또는 불치병은 억겁을 거쳐서 오는 동안의 인과가 뭉친 결과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마음법이 아니라 물리적인 방법, 즉 과학적인 치료법으로도 인과를 녹이는 이치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가령 이와 같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유전자의 비밀이 밝혀진다면 과학이 보이지 않는 세계로 넘나드는 일이 되며, 나아가서는 인과의 법칙도 새로운 해석을 해야 하는 게 아닌지 궁금합니다.
▲스님: 아무리 과학자들이 발견을 해냈다고 하더라도 그건 물질을 발견해낸 것이지 어디서, 왜, 어떠한 연관성으로 인해서 이것이 왔느냐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해서 불치병을 고쳤다 하더라도 그건 그 이름을 떠나서 딴 걸로 옮겨져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과학으로서, 즉 심성이 안 들어가고는 도저히 녹일 수가 없다는 거죠. 입력이 된 데다가 입력을 다시 해야 입력이 없어지지 절대로 없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나부터 알라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나부터 알아야 모든 게 가고 옴이 없이 왕래를 하죠. 얼른 쉽게 말하자면 나부터 알아야 모두가 일치돼서 같이 돌아간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내가 만약에 태양으로 들어갔다 합시다. 내가 태양이 돼가지고 그 태양계를 본다면 전부 그게 그거니까 그 속에서 다 알게 되지만, 가고 옴이 없이 어디서 나온 줄도 모르고, 어디서 된 줄도 모르고, 어디서 온 걸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이름을 밝혀내고 병의 원인을 밝혀냈다고 해서 밝혀낸 게 아니다 이거죠.
예를 들어서 벌레가 자꾸 식물에 끼니까 독한 약을 뿌려서 처음엔 다 죽었는데 그것이 벌써,‘아, 저런 거를 뿌리는구나.’ 이러고 알고선 안 죽어요. 그리고 딴 걸로 대치가 돼. 그러니까 녹을 수가 없죠. 천차만별로 인과성이라든가, 유전성이라든가, 세균성이라든가, 영계성 때문에 사람의 정신이 모두 혼미해지는 그런 연관성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런 거를 조금 발견했다 해서, 즉 말하자면 지금도 발견한 사람들이 간암이니 백혈병이니 쭉 이름을 내놓은 거지, 그게 본래부터 전자에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아무리 백혈병이다 골수암이다 해도 그것을 박차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건 이름이니까, 내 마음으로써 내 육체 안에 들어 있는 그 모든 의식들을 다 흡수해서 작용할 수만 있다면 암이다 뭐다 하는 건 이름일 뿐이지, 실질적으로 실무자들이 작용하는 거는 이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죠. 그냥 똥마려우면 똥눌 뿐, 그와 같은 거죠.
▲질문자1: 스님께서 여태까지 답을 미리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저희는 반복해서 듣는 의미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가 조금씩 진전이 되는 듯 하다가도 어느 단계에 이르면 벽에 부딪쳐 더 나아가기 힘들 때가 있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이 공부를 단계 없는 세 단계로 나누어 ‘세 번 죽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일상 생활 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나와 대상을 둘 아니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나와 대상이 둘이 아니다’하는 것은, 말이나 또는 머리로 이해해서는 그저 그렇고 그럴 뿐이지, 투철한 실천은 못 된다고 봅니다. 나와 대상이 둘이 아닌 것을 느끼는 경지는 어떠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스님: 무조건 믿는 거,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믿는 거, 내가 조금 믿다가 부딪치면“이거 뭐 이렇게 찾아도 안 되는데.”이러고 벌렁 나가자빠지는 그런 마음이 없는 거죠. 하여튼 이렇든 저렇든, 마음이 안 믿는다 믿는다를 떠나서 그냥 자기가 지금 끌고 다니지 않아요? 그런데 왜? 그것을 잘되기만 하면 좋다고 하다가 안 되면 주인공 찾아도 뭐 만날 마찬가지라고 한단 말입니다. 안 되는 것도 그놈이 하는 거, 되는 것도 그놈이 하는데 말입니다.
공부할 때에 자기한테 자기가 테스트 해본다고 그럴까요? 그렇게 자기를 자기가 어떻게 생각을 하나 알기 위해서 용도에 따라서 적합하게 옵니다. 오는 것도 있죠, 사람에 따라서. 그럴 때는‘아하! 요것도 알아보려고 또 이렇게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만 하면 그냥 제깍 없어집니다. 그런데도 요런 게 또 왔으니 이거를 어떻게 방지를 해야 하나, 주인공을 아무리 찾아도 이거는 안된다고 하고는 그냥‘정말이지 허구장천 못났든 잘났든 널 믿어라, 죽는 것도 거기고 사는 것도 거기다.’ 이래도 그렇게 안 들어가나 보죠. 그러니까 한 발짝도 실천으로 옮길 수가 없는 거죠. 진짜로 화살을 쏘려면 정(定)의 화살을 쏴야 될 텐데 여기 쐈다 저기 쐈다 이러니깐 이게 맞춰지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하늘이 무너져서 내가 지금 금방 죽는대도‘흥, 네가 끌고 다니는 네 몸뚱이 죽인다 해서 내가 외눈 하나 깜짝할 줄 아느냐? 그냥 죽일 테면 죽이고 살릴 테면 살리고 마음대로 해라.’ 이렇게 그냥 놔버린다면 되는 건데! 그렇게들 그냥 붙들고 모두 작척(作隻)을 하고 붙들고 늘어지니 글쎄 그놈의 게, 그게 인과가 되는 거예요. 부모 자식지간도 그렇게 붙들고 애지중지하고 그러는 게 모두가 인과가 되는 거라구요. 조건 없는 사랑을 하려면 아예 놓고 줄을 잡고 그냥 툭툭… 딴 데로 가면 툭, 왜곡되게 가면 툭, 이렇게 마음의 줄로다가 잡아야지 마음이 잡히지, 이건 실질적으로, 실체를 말로다가 잡으려고 그러니 그 몸이 잡아집니까?
마음의 줄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가설이 돼있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이 방에도 전구가 많지 않습니까? 하나의 스위치만 누르니까 방에 불이 들어오죠, 들어오네요. 허허허. 그러니까 한 식구가, 내 집 식구들만 그렇게 할 수 있어도 다 밝게 살수가 있을 텐데 그렇게 밝게 켤 줄을 모르는 거죠, 얼른 쉽게 말해서. 못 믿으니까. 그러니까 되는 것만 법(法)이 아니라 안 되는 것도 법이니까 양면을 다 놓아서 같이 굴릴 줄 알아야 된다 이거죠. 믿음이 진실하다면 양면을, 이런 게 와도 거기 놓고 저런 게 와도 거기 놓고 중심의 중용을 잘하면 그게 굴림이죠. 그게 수레공법(空法)이에요.
오늘 그것을 참 질문 잘 하셨습니다. 사람이 머리로만 한다면 진실한 마음의 하달이 전신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권처(權處)에서 바로 두뇌로 올라가는 게 누진입니다. 누진으로서 몸의 사대(四大)로 하달을 해서 바깥으로 실질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과학입니다. 심성과학! 종합 심성과학입니다, 모두가. 얼른 쉽게 말하자면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공부입니다.
우리가 캠핑을 나왔다가 그냥 갈 수는 없습니다. 지금 공부 못 하면 후일에 또 그런 걸로 인해서 말리고, 나만 말리면 좋은데 또…. 내가 그 도리를 알게 되면 위로는 묵은 빚을 갚으며 아래로는 햇빛을 줄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러나 내가 못 한다면 위로는 묵은 빚도 갚을 수 없고 햇빛도 줄 수 없습니다. 묵은 뿌리의 썩은 것도 자를 수 없고 아래 자녀들의 뿌리도 성성하게 도와줄 수가 없다 이겁니다. 내 뿌리가 썩었는데 남의 뿌리를 어떻게 도와줍니까? 그러니까 묵은 빚도 갚을 겸 햇빛도 줄 겸 나도 세세생생에 권도(權道)를 가지고 여래장(如來藏)이 돼서 수레공법이나 평등공법을 자유자재할 수 있게끔 그렇게 하십시오.
▲질문자1: 감사합니다. 저희 마음이 다 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난 법문 더 할 거 없어요. 이 세상 천지에 다 법문이 돼서 있는데… 한 서너너덧 분 질문이나 받겠습니다.
▲질문자2: 저는 질문 드리려 나온 게 아니구요, 베풀어주신 덕분에 일본에서 지난달 귀국을 잘했습니다. 감사를 드리려고 나왔습니다.
▲스님: 예, 감사합니다.
▲질문자3: 얼마 전에 불경 공부를 하다가 금강경에 나오든가 법화경에 나오든가,‘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하는 그 마음도리를 공부하고, 또 스님의 법문 중에도‘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하는 그런 말씀을 봤을 때 잘 이해가 안 갔는데 어떤 분의 얘기를 듣고 제 나름대로 조금은 이해를 했어요. 그런데 제대로 이해가 됐는지 잘 모르겠는데 바로‘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하는 것은, 스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오는 거 그대로 놓아가면서 수 없는 생각도 놓아가고, 삶도 놓아가고 죽음도 놓아 가는 것이, 바로 머무는 바 없이 여여하게 가는 길이 아닌가, 제 나름대로 생각이 떠올라서 그 순간에는‘아, 요게 요거구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바른 느낌을 가진 건지 궁금해서 여쭤보았습니다.
▲스님: 그건 초심자일 때 느낄 수 있는 얘깁니다. 하여튼 그렇게 느끼신 것만 해도 어딥니까? 하여튼 우리가 발자취를 한 발 떼어놓고 한 발 놓고, 한 발 떼어놓고 한 발 놓고 하는 것이 머무는 바 없이 머무는 거 아닙니까? 우리 생활이 다 그렇죠.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보는 거든지, 듣는 거든지, 말하는 거든지, 가고 오는 거든지 모두가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그냥 그대로 여여하게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냥 화(化)해서 바뀌면서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머무는 바 없이 하는 거죠.
아빠라고 자식이 부르면 그냥 금방 머무는 바 없이 아빠가 돼서 말을 하면서 아버지의 행을 하죠. 그러다가도 아내가 부르면 그냥 순간 머무는 바 없이 남편이 돼가지고 남편 행을 하고, 남편으로서 말을 하고, 남편으로서 뜻을 가지고 돌아가니 삼합이 동시에 작용을 하고 있죠. 그러니까 머무는 바 없이 머물고 돌아가는 거죠, 본래.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라고 하신 겁니다.
▲질문자3: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지금까지 쭉 관(觀)을 해나가고 있는데요. 어떤 분이, 공부를 좀 하셨다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 말에 끄달린 것은 아닌데 무슨 얘기를 하느냐 하면 “놓는다는 생각을 하면 이미 놓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그래서….
▲스님: 그거는 어느 경지라고 할 거는 없지만 어떻게 놓고 가다가 보면 저절로 놓는다는 생각도 없이 가게 되는 거죠. 그렇게 가는 사람들이 말을 할 때는 놓는다는 생각도 없이 놔야 된다는 말을 하게 되는데, 지금 유치원생더러 초등학교 공부를 하라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차원은 다 다르지마는 하고 가는 거는 똑바르게 잘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놓고 가야 한다는 문제는, 정신이 잘못돼서 나간다거나 영계성이 들렸다든가 유전성이 들렸다든가, 또는 세균성이 들렸다든가, 아무리 골수염이다 할지라도 백혈이다 할지라도 어떠한 거든지 바로 내 뼛속의 생명들과 바로 둘이 아닐 때, 손가락을 이렇게 세워놓고 이 손가락더러 “네 손가락 잘라라.” 이러면 자르겠습니까? 못 자르죠! 제 손가락이 제 손가락을 못 자릅니다. 그러니까 모든 생명의 의식들을 같이 한마음으로 동결해서 주인공이 될 수 있으면, 그대로 믿고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전부 뼛속도 작용을 해줍니다. 이건 거짓말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애고라든가 병고라든가, 어떠한 문제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걸 병으로 알지 말고 애고로 알지 말고 인과응보로 알지 말고, 공부할 수 있는 재료라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공부할 수 있는 재료!‘공부하라고 나에게 이런 재료가 생기는구나!’하고 돌려놓고 지켜보고 체험하고 자꾸자꾸 놓고 돌아가다 보면 놓을 것도 없고 놓는 걸 받을 놈도 없다는 것이 스스로 알아질 때 진짜 믿는 겁니다. 그때 진짜 공부하는 겁니다.
▲질문자3: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위 법문은 1992년 10월 4일 법형제 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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