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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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 진관사
俗에서 聖으로 가는 ‘징검다리’

비구니 수행처…소박·정갈
가끔씩, 궁핍했던 지난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힘겹게 보릿고개를 넘어온 분들한테는 호강에 겨운 푸념으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결코 젠체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외국의 한 등반가가 쓴 글에서 1950년대의 네팔에 관한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돈 치레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일도 거의 없었던 그 시절에는, 그야말로 ‘순수의 땅’이었다고 합니다. 한 예로 카트만두 거리에 ‘거지’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겁니다. “가난은 문명의 산물”이라는 어느 경제학자의 말도 생각이 납니다. 동감입니다.
절 찾아 가는 길에 웬 사설이냐고 꾸짖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진관사 가는 길목이 절로 이런 생각들을 불러일으키더군요.
서울 도심에서 북한산성을 향해 달리다 보면 구파발 못 미쳐서 진관사 길이 나타납니다. 야트막한 건물, 드문드문 70년대식 간판, 길 가의 플라타너스. 개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의 세트를 보는 듯한 느낌. 하지만 그 느낌은 대도시의 변두리 어디에고 보이는 스산함과는 다릅니다. 그곳엔 온기가 있습니다. 더 넓게, 더 멀리 뻗어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개발의 도미노가, 불현듯 주춤거리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듯도 합니다. 이른 바 ‘그린벨트’의 초상입니다. 당연히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는 꼴사나운 모습일 것입니다. 땅 값도 집 값도 오르질 않으니, 이만저만 속상한 일이 아닐 테지요. 그 심정 충분히 알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 길을 지나면서 나는 서울이라는 이 거대한 회색 도시가 조금은 사랑스러워졌습니다.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1번지. 북한산의 비봉과 향로봉으로 오르는 초입. 70년대 도시 분위기가 산으로 몸을 바꾸는 그곳에 진관사가 있습니다. 인공에서 자연으로, 속(俗)에서 성(聖)으로, 가(假)에서 진(眞)으로 가는 징검돌로 그렇게 서 있습니다.
청빈의 옷을 입은 가난, 남루하지 않은 결핍. 절이 산에서 내려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진관사 마당에는 이미 가을 햇살이 곱게 내려앉아 풀벌레 소리를 자장가 삼고 있습니다. 댓돌 위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하얀 고무신을 보며 마음의 매무새를 다시해 봅니다.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라서 그런지 모든 것이 아담하고 정갈합니다. 도량 곳곳에 꽃들이 곱습니다. 도라지꽃, 수국, 백일홍, 채송화, 노란 코스모스가 누구하나 시새워하지 않고 제각기 빛납니다. 드문드문 쑥부쟁이도 이곳이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 자락임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고려 현종 비화 간직
그런데, 진관사의 창건 배경에는 지금의 정갈함과 거리가 먼 세속적인 얘기가 전해 옵니다.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나 보겠습니다.
고려의 다섯 번째 왕인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젊은 왕비는 태후가 되어 시름겨운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드디어는 슬픔이 깊어 병이 되니, 파계승 김치양과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습니다. 빗나간 걸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아이를 왕위에 앉히려는 기도를 합니다. 마침 일곱 번째 왕인 목종에게 후사가 없었으나 태조의 직손인 대량원군이 그 자리를 잇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태후는 대량원군을 진관(津寬) 스님이 홀로 수도하는 신혈사라는 조그마한 절에 유폐시키고 적당한 틈을 타서 없애려고 합니다. 이에 진관 스님은 그것을 알고 수미단 밑에 굴을 파고 12살 먹은 대량원군을 숨겼습니다. 목숨을 구한 아이가 후일 왕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여덟 번째 왕인 현종입니다.
현종이 어찌 진관 스님의 은혜를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신혈사 터에 진관 스님의 이름을 딴 대가람을 세웠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왕실의 보살핌은 계속되어 태조는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여 육지와 수중의 고혼들에게 법식(法食)을 베풀었습니다. 세조 때 불타 없어졌다가 철종 때 중수하여 명맥을 이었으나 6·25때 칠성각과 독성각만 남고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1964년부터 진관 스님이 당우를 다시 세워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경전 독송 한글로
역사적 배경에 비해 오늘의 진관사는 소박한 규모입니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볼 만한 구석도 많습니다. 우선 칠성각과 독성각입니다. 사방 벽면을 돌 조각으로 세워 올린 모습은 민예적인 질박함에 수공예적 정성으로 윤기가 흐릅니다. 안에 모셔진 칠성도와 영정, 그리고 산신도는 모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조선 후기 불교 미술의 한 면을 곱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역시 서울시 무형문화재인 나한전의 16나한상은 자그마한 크기에 각기 개성적인 표정으로 보는 이의 눈길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도드라져 보이는 진관사의 미덕은, 이 시대에 필요한 형태의 믿음이 살아 숨쉰다는 점입니다. 모든 예불과 법회 의식에서 경전 독송은 한글로 합니다. 가족 모두가 절에 와서 내집처럼 머물 수 있다는 점도 여간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아버지법회, 청소년법회, 어린이법회가 매주 열리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진관사에서 만큼은 치마불교라는 자조적인 말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산을 오르며 심신의 피로를 내려놓으려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산을 그저 러닝머신쯤으로 여깁니다. 그곳에 절이 깃들어 있어 산의 신령함을 지켜낸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삶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때, 혹은 아련한 옛 추억에 잠기고 싶을 때, 진관사를 찾으십시오. 버스 값 동전 몇 잎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피의 순수를 한아름 가득 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글=윤제학 기자
사진=박보하(사진가)
2002-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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