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찍은 내 스승을 만나는 것
스스로를 채찍질해 가면서
허공 길을 길삼아 걸어야
스스로 채찍질하는 방법
문
예전에 스님의 설법 중에, 길을 가는 방편에 대해 세 가지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재갈을 물어라. 둘째, 음식을 탐하지 말고 공식(共食)을 해라. 셋째 스스로 채찍질을 해라. 그 중에서 스스로 채찍질을 하라는 부분의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말씀을 들어보면 스스로에게 어떠한 벌을 내리라는 식으로 이해가 되는데, 어떤 식으로 어떠한 벌을 내리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르침 받길 원하옵니다.
답
예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부가 채찍을 가지고 소에게‘이랴!’하면 소는 목적지까지 갑니다. 그리고 또 사람이 짐을 내려놓으려면 ‘워워’해야 되거든요. 그거와 같이 그 채찍이 바로 주장자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채찍으로 쳐서 가게 하기도 하고 서게도 하는 것이 마부에게 달려 있는 거죠. 현재 마음에 달려 있다 이 소리입니다.
집을 지을 때 기초가 잘 돼야 어느 집이든지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생각을 너그럽고 지혜 있게 해야 됩니다. 현재 의식이 이 도리를 완전히 모를 때는 집을 지을 때 기초를 하듯 다지고 또 다집니다. ‘다시 병이 일어나면 이 사람은 어떠한 마음을 가질까?’하고 테스트하는 도리입니다. 병이 아니라고 하고 체험을 하는 그런 도리가 있는가 하면,‘이건 나를 가르치기 위한 재료이고, 이거는 나를 가르치기 위해 테스트하는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졌을 때에 ‘이리 찔러 보고 저리 찔러 봐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하고 그 테스트를 넘어서는 겁니다.
그리고 채찍질이라는 것은 내가 나를 발견했을 때 내 스승을 내가 얻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내 스승을 만나는 것입니다. 나를 이끌어 가는 스승을 발견해서 스승한테 채찍을 맞는 겁니다. 맞으면서 공부하는 겁니다, 지금. 그럴 때는 그런 경고도 나올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나쁜 일을 하게 찌르기도 합니다. 그냥 누(累)가 되게 나가서 그저 아무 말이나 막 하게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누가 된다는 거를 알고 그것을 다스리면서, 무조건 믿기만 하고 그냥 함부로 해버리나, 그렇지 않으면 믿는 반면에 “당신에게 누가 되니깐 그렇게 할 수 없잖아.”하고 다시금 돌려놓는가 이걸 보기 위해서, 지혜로움을 가르치고 나툼을 가르치기 위해서 다시금 재출발을 합니다. 재다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집의 기초를 다지는 것과 같다 는 겁니다.
기초를 어줍잖게 해놓으면 그냥 벽에 금이 가고 잘못돼 가지고 나중에는 전부 일그러지고 새고 그럽니다. 그와 똑같은 얘기죠. 사람들은 잘되고 못되고, 잘하는 거고 잘못하는 거고, 이건 나쁜 일이고 좋은 일이고 전부 잘들 아십니다. 잘들 아니까 그거를 잘 다스려서 돌려 놓고 ‘이렇게 나쁘게 되니까 너만이 잘 돌아가게끔 할 수 있다.’‘맑은 물이 나와서 먹게끔 할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다.’하고 놨을 때에 비로소 우리가 움죽거리면서 채찍질하면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여북하면 어느 수좌가 동짓날 팥죽을 쑤다가, 이 얘기는 많이 들으셨을 거예요. 팥죽을 쑤다가 팥죽이 끓어서 방울방울 풀럭풀럭하고 올라오니까 주걱으로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하고 때렸다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몸 속이 팥죽 솥과 같아요. 수십 억 마리의 의식이 들어있고 모습이 들어 있고 생명이 들어 있으니까요. 그 중생들이 그저 찧고 까불지만 내가 그 지배자가 돼야 해요. 마음이 지배자가 돼서 다스려야 될텐데 다스리지 못하고 거기에 얽매이고 외려 내가 끌려가니 이거는 공부가 될 수가 있습니까. 딱 잡아서 한마음 공한 도리로 그냥 딱 눌러 놓고 거기다 모든 것을 일임하고, 이끌어 가는 대로 모든 것을 놓고‘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서 해결하라.’하고선 그냥 내맡기는 그런 놓는 공부, 한 군데에 놓는 공부를 필연적으로 해야 된다는 겁니다.
살다 보면 말과 몸은 떨어져요. 우리가 헌 옷 벗어버리듯 떨어집니다. 몸이 떨어지면 말도 떨어지고 뱃속에 있는 모든 게 같이 떨어져 버려요. 그래서 내 마음은 길잡이요, 선장이요, 선장이 다스리는 채찍과 같은 거죠. 그런데 뱃속에 있는 생명들에게 오히려 선장이 말리면 배를 어떻게 끌고 가나요? 몸이 배라고 한다면 몸 속에 자생 중생들이 들어 있는데 선장이 배를 끌고 가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선장이 오히려 그 배 안에 탄 중생들한테 말려 들어가면 어떻게 선장이 채찍질을 하면서 배를 몰고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마음은 몸을 다스리고 몸은 마음을 다스려서 선정에 들게 되면 홀연히 공한 도리를 알게 되고, 그럴 때에 비로소 지혜의 무기를 만들어서 모든 데에 활용을 하고 돌아가면서 다시 고요한 거기에 놔서 양면을 평등하게 들면서 우리는 나가야 된다는 얘기죠. 그러니 스스로를 채찍질해 나가면서 일체 선지식들이 걸어가신 허공 길을 길을 삼아 걸어나가시기 바랍니다.
업식 어떻게 영향 주는지…
문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니께서 한마음선원에 나가셨던 것이 인연이 되어 저 역시 힘들 때마다 어머니께서 제게 주신 한마음 요전을 마음의 길잡이 삼아 나름대로 마음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국제무역센터가 테러로 붕괴된 지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고통받고 있고, 또 많은 가정이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악연으로 인해 이리도 많은 고통을 동반하게 되었을까요? 저도 지금 살면서 어떤 인연들을 짓고 있는가 하고 매일 생각하게 됩니다. 스님! 아무리 우리가 사는 이번의 생이 짧다고 하지만 이렇게 얽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긴 시간일수도 있습니다. 인연이 만드는 업식이 어떠한 정도인지, 우리들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답
업식이라고 해서 아주 무서운 걸로만 생각하는데, 우리가 10년 동안 회사를 다녔다고 한다면 그건 업적입니다. 10년 간의 업적이 있다고 하죠. 우리가 인생을 70평생 살았다 그러면 70평생의 업적이 남습니다. 살았다는 업적입니다. 업적이지 업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걸 업이라고 생각하니까 죄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취를 업적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업식이 고정되게 그냥 있다면 어떻게 자꾸 바꿔지겠습니까. 바꿔질 수가 없잖아요. 시대가 변할 수도 없고, 사람이 변할 수도 없고 늙어 갈 수도 없겠지요. 그래서 자꾸 변동이 되는 건데,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속에서도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저렇게 생각하면 속에서도 저렇게 생각하고,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작용을 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배어 있는 겁니다.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거죠. 이거 해야 하고 저거 해야 하는데, 음식을 먹으면 음식을 먹는 대로 소화를 시켜야 하니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가 사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이것도 한 세계입니다.
우리가 고정됨이 없이 살고, 몸 속에 있는 것도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고, 다 작용을 하고 살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우리 몸이 죽으면 그 생명들도 죽고, 생명이 죽으면 우리들도 죽듯이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면서 작용을 합니다. 이걸 넣으면 이것 때문에 작용을 해야 하고, 저걸 쓰면 저걸 쓰는 대로 작용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머리를 썼다 하면 머리로 생각하는 것으로 인해서 혈관을 다 움죽거려야 되니까 뭐가 고정돼 있다, 짊어지고 나왔다고 하는 게 없는 겁니다. 무슨 죄를 짊어지고 나왔다 이런 소리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고정됨이 없는 걸 말해요.
우리가 만약에 각자 인간이라는 뿌리가 없다면, 아니 벌레의 생명도 생명인 그 뿌리가 없다면 사람으로 화해서 창조가 되지 못할 것이고, 또 우리가 지금 사람이라는 이 뿌리가 없다면 나무가 없을 것이고, 잎이나 가지도 없을 것이고, 꽃도 못 필 것이고, 꽃이 떨어지니 열매를 맺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뿌리를 믿지 않으면 안되고 감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 역대조사들이 말씀하신 것은, 엉키고 엉킨 그 뿌리가 바로 바라밀로 돌아갈 수도 있는가 하면 뿌리 자체가 바로 육적으로 돌아갈 수도 있으니 윤회로서 돌아갈 수도 있는 그 엉키고 엉킨 뿌리가 바로 업이 되고 과보가 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 그 자체 뿌리가 바로 엉킴 없이 엉켜 있다면 우주간 법계가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만법의 이치가 되니 어찌 그것을 업이라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생각에 수미산만하게 업적을 지을 수도 있고 한생각에 수미산만한 거를 없앨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지어서 잘못해 놓고 자기가 고를 받고 한생각을 잘해서 고를 받지 않는다는 걸 현실에서 입증해 보이지 않습니까? 화가 불같이 일어나는데 불같이 일어나는 거를‘허허, 이렇게 화가 나는 것도 가르치려고 그러는구나. 지금 바쁘게 돌아가는데 이 화가 불꽃같이 일어나는 거를 막지 못하면 큰일나겠다.’‘네가 해 놓은 거니까 네가 있다면 할 것이고 네가 없다면 못하겠지. 네가 알아서 해.’하고선 탁 누르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고 편안히 다시금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도,‘팔자 운명 그런 게 붙을 자리가 없다. 너는 항상 찰나찰나 공해서 돌아가기 때문에 항상 과거도 돌아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고 현실도 공해서 없느니라. 그러니까 그대로 네 마음은 광대하고 무변하니라. 그러니 그냥 뛰어라, 벗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직선적으로 뛰라고 하지만, 사실은 마음 한번 먹는 대로 뛰는 건데 그거 왜 못해요, 글쎄. 육신이 고통을 받으니 못해요, 왜 못합니까? 본래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내 뜻이 그러하면 부처님의 뜻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진언에 대하여
문
진언(眞言)이란 무엇입니까? 아침저녁 예불 중에 외우는 경에도 많은 진언이 있고 또 다라니경(陀羅尼經) 같은 것은 주력이 있다 하여 예불 중에도 빼놓지 않고 외우는데, 그 진언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째서 효력이 있다고 하는 것인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답
누가 효력이 있다고 그러나요? 모든 사람들이 각자 효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자기네들이 하는 것뿐이죠. 예를 들어서 사람이 죽었을 때는 지장경을 염하고, 이게 진언이 되죠.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가난하게 살면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진언을 외우고, 또는 명이 짧다 하면 남의 말을 듣고서는 또 칠성에게 빌면서 진언을 외우고, 또는 아주 좋은 데로 가게 해달라고 지장한테 빌고 진언을 하고, 또 용신(龍神)한테 진언을 하고, 이거는 자기의 용도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진언을 하게 돼 있습니다. 그죠? 앞에 닥치는 대로요. 그런데 다 똑같은 진언이 아니죠. 모두가 자기 가정에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 진언을 하게 되죠. 병고가 있으면 바로 약사보살을 찾고, 길을 가다가 잘못될까 봐 걱정이 되면 바로 지신한테 진언을 하고, 이렇게 모든 게 우리 사는 용도와 똑 같죠.
그런데 내가 말하는 건, 바깥으로 노예생활을 하면서 노예로서의 진언을 하지 마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한 군데서, 여러분이 못났든 잘났든 한 군데서 모두 살림살이를 하고 갑니다. 누가 갖다주는 것도 아니고 뺏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못났든 잘났든 자기네들이 자기네들을 꾸려나갑니다. 그러면 자기를 끌고 다니는 바로 근본 자기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용도에 따라 닥치는 대로, 아까 말했듯이 명이 짧으면 짧은 대로 거기다가 되돌려 놓고 “너만이 할 수 있어. 병도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어. 안 되는 것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너야!”하고 모든 것을 거기다 놓고 돌아가는 것도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진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리 저리 쫓아다니면서 하는 것은 진짜 진언이 아닙니다. 그거는 바깥으로 떨어지는 진언이고, 이것은 안에다가 되돌려놓는 진언이기 때문에 우주 법계에 일체제불의 마음으로서 전부 통신이 되는 겁니다. 직결이 돼있고 가설이 돼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짜 진언이라는 것은, 그대로 그냥 진언입니다. 바깥으로 상대를 두고 진언을 하는 거하고, 상대를 두지 않고 직접 자기 자성(自性)에 진언을 하는 거 하고는 어딘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것은 항상 가도 노예가 될 수밖엔 없습니다. 그래서 노예로 가르치지도 말아야 하고, 노예가 되지도 말아야 합니다.
무정물도 윤회하는지…
문
불교의 윤회설에 의하면 중생들은 6도를 윤회한다고 하는데, 물론 성불하게 되면 그렇지도 않겠지만 천상, 인간, 지옥, 아수라, 축생, 아귀라는 육도를 윤회하게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러한 범주에 들지 않는 식물이나 바위 등 무정물의 경우에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답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돌이 서 있는데 비에 씻기고 바람에 스쳐서 그냥 반드르하게 한쪽이 달아나갔어요. 그런 걸 볼 때 그것이 바꿔지지 않은 거라고 할 겁니까? 육도 윤회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 노릇 할 때가 있으면 자식 노릇 할 때가 있고, 그런 게 윤회예요. 남편 노릇하다가 자식에게는 아버지 노릇을 할 때가 바로 윤회라니까요. 윤회가 별다른 게 아니에요. 살아서도 죽어서도 윤회예요. 그러니까 윤회도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아기로 태어나서 젊어지고 늙어지고 하는 것도 바로 윤회죠. 또 우리가 말을 했는데 그 말은 도망가고 또 딴 말을 해야 하니까 그것도 윤회구요. 그래서 마음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마음은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 바꿔지고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윤회도 없다, 붙을 데가 없다 이랬습니다.
생명이 태어나기 이전에는 암흑이었다고 봅니다. 암흑 세계에서 우리가 생명이 생기게 된 원인이 불·물·바람·흙, 즉 흙이라면 먼지를 말하죠. 그것이 한데 합쳐서 하나가 붙으면 하나가 커지고, 둘이 붙으면 둘이 커지고, 그저 굴러가는 대로 서로 엉기고 붙어서 인연이 있어서 불의 인연, 물의 인연, 바람의 인연, 흙의 인연이 한데 합쳐지니까 원인이 되어서 생명이 생기게 된 거죠. 생명이 생기니깐 바로 광력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생명이 생기고 밝아진 것입니다. 이 도리를 생각한다면 아주 어마어마한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밝아져서 그 하나하나가 별성이 생기고, 별성이 생김으로써 태양이 생기고, 태양이 생김으로써 만물을 기르는 어버이가 된 거죠.
이 산하대지는 만물을 길러내는 어머니와 같고, 태양열로 인해서 모든 만물이 자라나는 것은 아버지와 같다고 했습니다. 하다못해 물 속에서 사는 고기들도 천차만별로 모습과 이름이 많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름도 있고 알지 못하는 고기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바다 밑에서 사는 것도 있으니 그 태양열이 어떻게 거기를 한데 합쳐서 다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마음입니다. 마음은 태양열이 들어가지 못하는 데까지 들어갑니다. 마음의 문이라는 것은 깊이가 깊든 얕든, 높든 낮든 불문에 부치고,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가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무정물이라는 것도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니 됩니다. 모든 것의 근본, 지수화풍의 근본도 다 그 한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어떤 걸 없다라고 하고 어떤 걸 아니다라고 규정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지…
문
항상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마음을 지켜보는 공부를 하다 보면 마음의 속성을 알게 됩니다. 그 중에서 어떤 욕망과 욕구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끊임없이 반복됨을 알 수 있습니다. 몸은 마음에 따르는 것인 줄 알면서도 몸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자신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마음자리에서 보면 좋다 나쁘다는 것도 없고 떠오르는 마음을 좋다 나쁘다 하여 억누르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 생각되어 그 자리에 맡기고 지켜본다는 생각으로 계속합니다만 이 반복되고 떠오르는 마음들을 언제까지 지켜보아야만 하는지요.
답
그것도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가 없으니까요. 어느 때까지라는 게 없습니다. 본래 인생은 끊어짐이 없이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어가 자기가 죽는다고 해서 죽는 게 아니거든요. 자기를 또 배출해 놓고 껍데기가 없어지는 거 뿐이죠. 옷 벗어버리는 거나 같고, 또 자기가 자기를 늘려 놓고 자기 하나가 없어지고,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자기를 만들어 놓고 하나하나 개개인이 또 그 자리에 오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를 얼마나 만들어 놓는지 모릅니다.
그렇듯이 그 마음이 말입니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가 어디 있어요? 죽어도 죽는 게 아니고, 영원하게 자기는 이 세상을 자고 깨고 자고 깨고 하듯이 하는 걸요. 우리가 저녁에 잔다고 해서 죽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 죽고 살고 하는 생사에 관한 건을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죽고 하는 걸로 생각을 해보세요. 그렇게 아주 가까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상이나 욕망이 일어나는 거를 어느 때까지 지켜보고 있어야 되느냐 하는 것은, 그거는 아주 급하고 조급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조급한 생각도 없어야 되거든요.
모든 생명의 의식들이 제가끔 나올 때는 자동적으로 꽁지가 꽁지를 물고 자꾸 나오거든요. 그게 과거에 입력된 사실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입력이 돼서 자꾸 나오는 거라면 그냥 ‘어, 그 속에서 나오는 거로구나.’ 그러고선 잘 생각을 해서 이익할 거라면 감사하게 거기 놓고, 이익하지 않을 거라면 잘 돌아가게끔 거기 놓고, 이렇게 그냥 돌아가는 거죠. 그렇게 돌아가야 어느 때쯤 가다 보면 감응이 되고 알게 됨으로써 ‘아! 이런 거를 내가 그렇게 애를 썼구나!’하고 또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하여튼 모두들 지금 여여하게 살면서도 사는 게 없습니다. 여여하게 사는 반면에 어떤 거를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무(無)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즉 한마음 주인공이다 이겁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주인공을 무조건 믿고 무조건 거기에다가 놔야 된다, 맡겨야 된다고 했습니다. 무조건 맡기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서 화살을 쏘는데 똑바로 탁 들어가 맞아야 할 텐데, 화살이 이리로 가서 맞고 저리로 가서 맞는다면 그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매사에 의심이 가고 확신이 생기지 않아 마음이 안타깝고 그렇다면 중심을 꿰뚫는, 전체를 꿰뚫는 공부를 어떻게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사주팔자가 있는지…
문
사주팔자라는 것이 정말 있는지요? 몇 년 전에 흥미로 사주를 본 적이 있는데요. 가벼운 기분으로 보았지만 안 좋은 말을 들어서인지 계속 그 말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습니다. 털어 버리려고 해도 어느 순간 다시 불쑥 생각이 나고 조금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주인공이 하는 것이고 사주팔자를 본 것도 주인공의 장난이니 주인공에 되맡겨 놓으면 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진실한 믿음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주인공에 놓으려고 해도 주인공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금세 다시 걱정하는 마음이 되곤 하는데 나 스스로도 자신이 답답하고 어리석다고 여겨집니다. 불안한 마음을 털어 버리고 편안한 마음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
어떤 분은 이사를 가야 하는데 북쪽으로 삼살방이 들어서 계약은 해놓고 못 갔다는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삼살방이 들어서 집안이 잘 안되고 누가 죽는다고 그랬답니다. 또 누구는 어디로 이사를 가면 가환이 떠나질 않는다. 너는 내년에 꼭 죽을 사주팔자고 삼재가 들었으니까 꼭 잘못될 거다. 그러니까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미약하고 약했으면 자기가 인간이 되기까지 그토록 애를 써서 고귀한 생명을 형성시켜 가지고 이렇게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말에 흔들리고 자기로 살지 못하고선 남의 말에 따라서 그냥 휘휘 돌아가야 합니까. 그거는 그 사람들의 노예지 자기 스스로 사는 참사람이 못 된다 이겁니다.
그렇게 일상생활을 살아왔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우환을 면치 못하고 생사윤회를 면치 못하고 끄달리기에 급급한 삶을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넓어질 수도 없고 물리가 터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집안은 가난하고 항상 오락가락 융합이 되지 않고 한마음으로 돌아가질 않고, 자식은 자식대로 부인은 부인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친척은 친척대로 돌아가는 이런 문제가 어디에 있느냐. 모든 거는 자기가 지어놓고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겁니다.
우리 인생을 누가 갖다준 것도 아니고 누가 뺏어가지도 못합니다. 자기들이 지어놓은 것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녹여야 된다는 뜻입니다. 누구나가 제가끔들 살아나가는데, 그래서 혼자 왔다 혼자 가는데 서까래 공덕으로서 자기의 뿌리이자 씨가 있기 때문에, 영혼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뼈를 빌고 어머니의 살을 빌려서 이 세상에 탄생을 해서 인간의 됨됨이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나가느냐 하는 것에 달렸습니다. 그러한 모든 문제를 말입니다. 얽히고 설켜서 돌아가는 그 인연을 어떻게 녹여야만 하겠습니까? 이거는 물질로도 안되고 돈으로도 안됩니다. 이거는 마음으로 지은 거니까 마음으로 녹여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마음공부를 해라. 기복으로 나가지 마라. 바깥에서 그 많은 이름을 찾지 마라.’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름 없는 이름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엄마로도 이름이 쓰여지고 형님으로도 쓰여지고, 때에 따라서는 며느리로도 쓰여지고 딸로도 쓰여지고, 또 아내로도 쓰여지고 동생으로도 쓰여지고 누이로도 쓰여지고 갖은 각색으로 이름이 쓰여지는데, 어찌 같은 한 이름만으로 이루종차 부를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그러면 부처님이다, 관세음보살이다, 미륵보살이다, 용왕이다 조왕이다, 신장이다, 이건 한 사람의 마음에서 그 이름이 다 나가는 것을 어찌 그 이름을 일일이 이루종차 부르면서 타의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생활 불교이면서 생활의 진리이면서 이 세상에 우리가 태어났다면 어디까지나 이것은 인간 삶의 과학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연구하면서 또 계발하면서 나가는 것이 진실한 과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학이라고 누가 이름을 지어놨는지 이름을 지어놨기 때문에 그 이름이 과학이지,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것도 바로 마음에서 계발을 하고 나갈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써 생활을 융통성 있게 자유스럽게 해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무루와 유루를 한데 합친, 바로 으뜸가는 과학적인 우리 살림살이일 겁니다. 그런 과학의 삶을 어떻게 내가 주인이 돼서 이끌어가야 할 지를 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나 대면 이후 공부
문
현재의 나와 주인공이 한마음이고 둘이 아님을 체득하게 되는 것은 참나를 깨친 후에라야만 자유인으로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인지요. 깨치기 전의 과정에서 주인공을 절실히 믿고 관하는 과정 중에는 이루어짐(주인공이 다 알아서 하는 것)이 없는 건지요. 둘째는 참나와 대면한 후에 본격적인 공부가 더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것인지요. 더 나아가서 무엇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셋째는 주인공과 내가 만나기까지 걸리는 시간들이 사람마다 다를 것 같은데요, 노력 여하에 따라 다른가요, 아니면 다른 요인들이 있을까요. 너무 좀 앞서 조급증을 낸 듯합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스님 말씀에 눈이 번쩍해서 한참을 읽다가 질문 올립니다. 저도 크게 깨우쳐서 인간으로서의 참도리를 알 수 있는, 한마음으로 모든 이들과 하나가 되고픈 마음에 이렇게 질문드려 봅니다.
답
예전에 선지식들께서는 좀 미련한 듯한 사람이 공부는 잘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미련하니까 한 길만 파고, 누가 옆에서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해도 한 군데로만 파고 들어가거든요, 미련하게요. 그래서 미련한 사람이 더 빠르다 이런 말입니다. 그걸 알려고 한다면 머리가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내가 공부를 하고 있는데 모르니까 우왕좌왕하다가 보면, 누가 잘한다고 하면 그냥 그것 한번 들어보자 그러고는 그리로 우 몰리고 이러는데, 그게 말 배우러 다니는 거지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래도, 내가 깨우치고 난 뒤에 보면은 그거를 알게 된다하더라도 내가 깨우치지 못한 체 그냥 자꾸 그렇게 하면 안되죠.
그래서 깨우친 사람은 둘 아닌 공부를 할 수 있어야 되고, 둘 아닌 공부다 하는 것은 천차만별로 거기에 붙어 돌아가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육조선사도 둘 아닌 도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그렇게 십여 년이 넘도록 다니셨단 말입니다. 몸은 다녔으되 다닌 사이가 없이 면벽을 하고 다니신 거죠. 바깥 경계를 보면서 안으로 놓고 안으로 놓고 실천하면서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종류를 다 한꺼번에 하는 거죠.
그러니까 깨우치지 못한 사람은 항상 내가 말하듯 ‘주인공, 너가 있다는 것을 너만이 알게 할 수 있어. 증명할 수 있어.’하고 관해야 됩니다. 깨우친 사람에게는 모두가 둘이 아닙니다. 자불하고 상봉할 때, 생각이 안 났을 땐 떨어졌고 생각이 났을 땐 그냥 둘이 아니게 항상 붙어 돌아가게 됩니다. 전기도 내 전력과 저 전력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전부 한 군데서 전력을 쓰게 되고 불이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이게 둘 아닌 도리에서만이 무궁무진한 그런 이치가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깨우치고 난 뒤에 진짜 공부인 것이죠.
그런데 진짜 공부를 하려면 주춧돌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기둥을 올리려면 애당초 이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너만이 너를 이끌어 간다’고 해야 되는 겁니다. 그게 아주 받침이 돼야 됩니다. 여북하면 어떤 선지식들은 ‘부처님 법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니까 ‘너 나온 자리로 다시 들어가는 게 부처님 법이다’그러셨다지 않습니까. 그렇게도 말씀을 하셨다고 그러죠. 그런데 그건 말로써 그렇게 하신 게 아니라 그 뜻을 말씀하신 거죠.
우리가 지금 ‘주인공, 너만이 너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하고 관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형성시켰고 결국은 그것이 바로 자기이니까, 과거 수억 겁을 내려온 자기이니까 그런 거죠. 깨우친다는 언어도 붙지 않습니다. 본래 우리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렇게 하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사용을 못하고 제대로 용(用)을 못하기 때문이죠. 이거 쓸 때 요거 쓰고 요거 쓸 때 이거 쓰고 자유스럽게,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그렇게, 상황을 봐서 환경에 따라서 잘 그렸으면 특상을 받을 텐데, 그렇지 못하고 저기도 보지도 않고, 저 나무가 퍼런지 저 나무 줄기가 흙빛인지 그것도 보지도 않는 거죠. 자기 멋대로 그냥 갖다 그리는 거나 같다 이겁니다. 그러면 특상은 못 받죠. 그렇지 않을까요? 더불어 같이, 더불어 같이 공해서 돌고 도는 겁니다.
한마디로 쉽게 표현을 하자면, 시시때때로 찰나찰나 환경에 따라서 주어진 거고, 환경에 따라서 용을 하는 거고, 환경에 따라서 우리가 한생각을 내는 거 뿐입니다. 그러니 한 가지 색에 착을 두지 말고, 분홍색 따로 착을 두고 빨간색 따로 착을 두지 말고 욕심부리지 말아라 이겁니다.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한꺼번에 삼십 가지를 다 쓰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찰나찰나 내가 그림을, 갖추어져 있는 환경을, 오관을 통해서 잘 보고선 한 가지를 갖다 쓰고, 요거 다하고 또 한 가지 갖다 쓰고 하듯이 요량있게 공부해 나갈 수 있어야 유유하고 편리하다 이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