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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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선택은 위대한 포기
‘대중위한 헌신’ 일체의 것 포기
부처님 선택 이성의 빛난 승리

옛날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시 중에서 프로스트의 ‘두 갈래 길’이란 시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삶의 도정 속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할 때면, 또는 자신이 팔방미인이 아니라서 부득이 어느 한 길은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에는 더욱 더 이 시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에서 갈등과 주저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확고한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순간이기도 하며, 최선의 가치를 채택했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부처님도 우리들과 같은 선택의 갈림길을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고나자 삼칠일간 법열에 잠겼다고 한다. 이때 당신이 깨달은 법의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일반대중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있다. “내가 깨친 법을 전하려 해도 저들은 어리석어 믿고 수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헐뜯고 비방하며 삼악도에 떨어져 많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라 회의하며, 대중교화를 포기하려고 한다. 이때 범천이 나타나 법을 청하고 있다. “중생세간이 비록 번뇌와 망상에 뒤섞여 있고 청정하지는 못하지만 부처님의 깨달음도 그러한 번뇌와 망상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근기에 맞추어 설법하신다면 중생들이 삼악도에 떨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범천이 설법을 권유하는 이유이다. 불전에 나타난 이때의 장면은 논리적인 비약이 심하고 신화적인 성격이 농후하지만 범천의 세 번에 걸친 간청과 부처님의 세 번에 걸친 거절의 형식을 거쳐, 마침내 설법을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법을 전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장면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다만 부처님의 위대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전기 작가들이 미화한 것 정도로 생각한다. 필자는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장면에 불교의 기본적인 종교적 특징이 들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달았더라도 그것으로 중생들을 깨우쳐 주지 못한다면 그 진리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깨달았으되 혼자만 즐기고 만다면 진정한 의미의 깨달은 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길을 떠난다는 것은 비로소 진정한 부처가 탄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원대하고 끝없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동시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소극적이고 정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동적인 것임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후 전개되는 수많은 가르침은 모두 중생들을 위한 수기설법이라는 점에서 길 떠나는 이의 강한 신념과 지혜를 엿보이고 있다.
필자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점은 법열에 잠긴 삼칠일간에 범천과 설법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는 점이다. 범천은 인도의 전통 민속과 브라만교에서 우주를 주재하는 임금이며, 인도고대 신화 속에서는 창조주로 등장하고 있다. 부처님이 막 깨달은 당시에 한정해서 생각해 본다면 범천이 부처님을 찾아와 설법을 권유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범천과 진행한 문답이 부처님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심리적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자연환경과 문화적 환경이 열악했던 당시의 인도에서 중생들을 위해 한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사 그것이 필요한 일이고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안락과 주변의 일체를 포기하고 대중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범부와 성인의 길이 그래서 다르다할지라도 너무나 크고, 어렵고, 고독한 일이기에 부처님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들 같으면 어떠한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쉽게 살 수 있는 삶의 길과 어렵지만 가치 있는 삶의 길에서 두 길을 동시에 갈 수 없다면. 부처님께서도 당시 선택의 갈림길에서 우리들과 같이 회의와 주저, 갈등과 선택 그리고 번복을 수십번씩 하지 않았을까. 극적으로 범천의 권유에 의해 위대한 길을 선택했다는 것은 다른 한편 위대한 포기를 전제하고 있다. 포기 했기에 위대한 선택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연출하게 만드는 조연인 범천의 정체는 무엇일까? 필자는 범천을 깨어있는 이성이라 해석한다. 편안하지만 작고 좁은 길을 선택하지 않고, 어렵지만 넓고 큰 길을 선택하게 만든 것은 부처님의 내면의 소리, 이성의 소리였던 것이다. 원효 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일반 범부들은 활짝 열려 있는 천당문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고, 굳게 닫혀 있는 지옥문으로 들어가려 아우성친다”고 말하고 있다. 살아야 한다는 것의 당위성과 참다운 가치의 문제를 둘러싼 양보할 수 없는 내적 갈등 속에서 이성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부처님의 출발은 이성의 승리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
200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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