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독심이 죽음에 이르는 요인
8정도로 정신적 不死의 길을
<불본행집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위해 법의 수레를 굴리기로 결심하고 히말라야산을 내려오는 도중에 우파카라는 바라문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우파카는 부처님의 스승이 누구이며, 어떤 것을 배우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하며 ‘바라나시로 가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불사(不死)의 북을 울리리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불사의 북소리를 통해 잠자는 중생들의 의식을 깨우겠다는 선언은 부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어떤 것이 죽지 않는 혹은 사라지지 않는 불사의 북이 된단 말인가? 원래 불사란 말은 다른 말로 감로(甘露)로 번역되기도 한다. 범어로는 amrta(암리따)이며, 이것을 의역하면 죽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사 혹은 하늘의 술이란 의미의 천주(天酒)가 된다. 감로란 말은 한자어를 풀이하면 단 이슬이란 의미이며, 천신들이 마시는 음료를 지칭한다. 원래는 부처님의 교법이 중생들을 잘 제도할 수 있다는 데서 연유된 말이다. 따라서 ‘불사의 북’이 <사분율>이나 <오분율>, 기타 <방광대장엄경> 등에서는 ‘감로의 북’이라 표현되고 있다.
세상에 종교가 존재할 수 있는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죽음이다. 인간이란 살아있는 한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 죽는다는 것은 기정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면 절망과 공포 속에 휩싸이게 된다. 인간의 이러한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20여년전부터 죽음에 대해 학제간 연구가 진행되어 많은 성과를 얻고 있다. 생사학학회, 죽음준비교육학회, 사별과 비탄학회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죽음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생사학 연구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죽음과 관련해서 의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 생긴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죽음을 회피하고자 하며, 영원한 삶을 모색한다. 다른 종이나 생명체와 달리 인간은 죽지 않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서양에서 말하는 부활이나 중국의 신선술, 진시황제의 불로초 등이 그러한 인간의 노력을 웅변하고 있다. 많은 종교가들 역시 독자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들이 불안하거나 불만족스러운 것은 인연으로 잠시 화합해 있는 우리 자신을 변하지 않는 나라고 집착하거나 그것을 영속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데 원인이 있다고 본다.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흘러가고 있으며, 더구나 시간이 소유와 욕망, 영속성에 대한 인간들의 바램을 물거품으로 만든다.
부처님은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낱낱이 살펴보고 진정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자 한다. <샹윳타니카야> 권8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나온다. “부처님, 불사라 하는데 불사란 어떠한 것이고, 거기에 이르는 길은 어떠한 것입니까?” 이러한 제자의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수행승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움이 소멸하면 그것을 불사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길이야말로 불사에 이르는 길이다”라 대답하고 있다.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영원히 죽지 않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요소와 심리적 요소들이 영원히 파괴되지 않고 그 형태를 유지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이제까지 죽지 않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영원히 살고 싶어 하며, 죽음 앞에 서면 위축되거나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여기서 죽지 않는다는 것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육신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 죽음이야말로 더욱 심각한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도 송장과 같은 삶, 아니면 살아도 죽음 보다 못한 삶을 일깨워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 그리고 그로인해 야기되는 올바른 판단력의 상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정신적 죽음으로 내모는 요인들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현실이라면 이러한 요인들을 치유하여 정신적으로 죽지 않는 길을 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8정도인 것이다.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정념], 올바른 집중이 그것이다. 이 8정도를 다시 분류하면 견해와 사유는 지혜에 해당하며, 언어부터 정진까지는 계율에 해당한다. 그리고 새김과 집중은 선정에 해당한다. 다시 계율은 탐욕을 조절해 주며, 선정은 성냄을 조절해주고, 지혜는 어리석움을 치유해 준다는 점에서 8정도가 정신적인 불사의 길이 되는 이유로 삼고 있는 것이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