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채색의 향연
수묵 시대의 채색화, 불화만의 매력
고려불화의 차분함에 비해 밝고 강렬
◇청평사 지장시왕도(1562년, 비단에 채색, 95.2×85.4㎝, 일본 코미오지(光明寺) 소장).
조선불화만큼 다양한 색채를 간직한 미술도 흔치않다. 고려불화는 차분하고 깊이 있는 색조로 일관된 반면, 조선시대에는 부드러운 색조, 밝은 색감, 강렬한 색채의 대비 등 시대마다 그 특색을 달리했다. 조선시대에는 색채를 화폭에서 아끼는 수묵화가 발달하였기에 불화에 펼쳐진 채색의 향연은 더욱 소중한 존재로 여겨진다.
16세기 전반 문정왕후 시절에 부드러운 색조의 불화가 등장하였다. 1562년 보우스님이 춘천 청평사에 봉안한 지장시왕도(일본 코미오지(光明寺) 소장)는 그 시기 불화 가운데 하나이다.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는 유교를 숭상한 조선시대에 불교의 중흥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녀는 아들인 명종이 1645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면서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이 때 보우스님을 앞세워 여러 불교관련 정책을 펼쳤다. 선종과 교종을 활성화하고, 승려가 출가할 때 국가에서 그 신분을 보장해주는 도첩제도(度牒制度)와 승과(僧科)를 부활시켰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하여 유생들과의 갈등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리하여 급기야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마자 보우스님을 제주도로 귀향 보낸 뒤 죽이고 앞서 시행한 불교의 여러 제도들을 폐지시켰다. 유교를 표방한 조선의 왕실에서 유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를 공식적으로 후원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짧은 20년간의 역사지만, 오늘날 청평사 지장시왕도를 비롯하여 10여 점의 불화가 전하여 당시의 뜨거운 열정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문정왕후와 보우스님과 관련되어 조성된 불화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채색에서 이 시대의 고유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차분한 색조의 바탕에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채색이 가미되어 있는 것이다. 청평사 지장시왕도를 보면, 시왕, 무독귀왕, 도명존자는 갈색으로 칠했지만 중심의 지장보살은 금빛을 찬란하게 발하고 있다. 금색이 여러 색채들 가운데 두드러져 보이는데, 이는 빛깔에 의하여 위계적인 질서를 부여한 것이다. 그렇지만 얼굴과 구름에 베풀어진 갈색은 화면 전체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분명 고려불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으로 부드러운 색조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그런 가운데 청록색, 자주색 등 파스텔 톤의 색채가 이 시기만의 세련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는 이마의 아랫부분과 콧잔등을 백색안료로 하이라이트 처리를 하여 입체감을 내었다. 이 음영법은 중국에서는 당나라와 송나라 때 유행한 것으로 원래 여인들의 화장법과 관계가 있다. 색채에 보이는 이러한 특징은 다분히 남성적인 명료함보다는 여성적인 감성에 가깝다. 이 불화에 나타난 부드러운 색조는 혹시 문정왕후의 취향과 관련 있지 않을는지?
■경주대 문화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