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선원사 터
10월의 강화는 해무(海霧)의 계절이다. 마식령 산맥의 살붙이인 김포반도가 침강하여 섬 아닌 섬이 된 강화는 서울의 문턱에 자리한 까닭에 늘 폭풍우 치는 역사의 바람받이가 되었다. 강화대교를 건너 곧장 갑곶돈대를 향해 방향을 정하면 해안도로의 코스모스, 갯벌의 물봉선화들이 해무 속에 화장을 지우고 있다. 먼 바다를 떠돌던 거룻배는 지친 듯 돌아와 포구에 턱을 괴고, 갯벌의 풍성한 인심으로 배를 불린 철새 떼들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허공에 군무(群舞)를 그린다. 떠나는 자 떠나고 돌아오는 자 돌아 오라. 파도는 뭍으로 달리고 뭍은 희부듬한 안개가 되어 바다로 풀린다.
용진돈대, 오두돈대, 인진나루, 외포리 나루, 올해도 파도와 갯바람에 씻긴 강화도 왕골들은 튼실하게 종아리가 굵었다. 맑은 가을볕 아래 쟁쟁하게 말리면 십장생, 사군자로 되살아나 티 한 점 없는 화문석이 될 것 같다. 강화도의 추억은 개펄에 새긴 상형문자가 아니라 빳빳한 왕골에 칼과 끌로 새긴 화문석이다. 낮은 자리의 백성들이 왕조의 아픔, 백성의 아픔을 씨와 날로 엮어 만든 질기고 편안한 돗자리이다.
강화도는 수난과 질곡의 역사로 점철된 한반도의 축소판이다. 강화에 가면 거대한 고인돌 무덤이 섬의 중량감을 더해주고, 고려궁터, 강화산성, 용흥궁 등 옛 왕조 상흔들이 잃어버린 역사의 애증을 더해준다. 강화에 가면 무엇보다 만발한 연꽃 향기에 흠씬 취하게 된다. 정족산의 전등사, 석모도, 보문사, 마니산 정수사, 그리고 선원면 지산리의 선원사 터 등 모두가 한결같이 해풍 속에 피고 지는 맑고 부신 연꽃들이다.
강화도의 정서는 불교의 정서이고 강화도의 긍지는 불교의 긍지이다. 마니산의 ‘마니(摩尼)’는 악을 제거하고 탁한 것을 맑게 하며 화(禍)를 막아주는 보주(寶珠)이다. 도감마을의 ‘도감(都監)’은 대장도감이 설치됐던 고려대장경의 마을이니 섬 전체가 만다라요, 불법의 성지인 것이다.
세계적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탄생시켰던 선원사(禪源寺) 터. 간단치 않은 섬의 내력을 탐색하며 목적지인 선원사 터에 다가서면, 어느새 해무는 사라지고 어디선가 톱질소리, 대패질 소리가 들린다. 그 옛날 대몽항쟁의 원(願)과 한(恨)이 서린 곳. 그 날의 함성이 물소리 바람소리가 되어 끝없이 섬 주변을 떠 돌고 있는 것이다. 제법이 무상하다하나 선원사터만큼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눈 앞의 안개는 사라졌어도 지독한 세월의 안개는 지산리 일대를 덮은채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선원사 터는 참으로 오랫동안 물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강화 섬 자체가 본토를 지척에 두고도 섬으로 남았듯이 대장경의 고향, 선원사 터는 오랜 세월동안 세월의 파도에 침강되어 섬 속의 섬이 되어 있었다. 선원사 터는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학술조사단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건져 올려졌다. 경판도, 경판을 깎던 쟁기도 어디론가 떠내려간 채 깨진 기왓장, 부서진 석축, 전돌과 치미 등 만이 가까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조선 태조 7년에 폐사되어 7백여년간 황량한 폐사지로 남아있던 선원사 터는 1977년에야 사적 제 259호로 지정되었다. 1993년 성원스님이 선원사지에 터를 잡고 민가를 헐어 대웅전을 지으면서 복원의 원력은 점차 파동을 치게 되었다.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끝에, 금당터를 비롯 인공폭포 유적이 발굴되는 등 고려인의 불심과 구국의 얼도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선원사는 고려가 몽고의 난을 피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우가 1245년(고종 32)에 창건한 절이다. 전국에 걸친 몽고족의 만행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특히 대구 부인사에 봉안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자 부처님의 가피로 몽고병을 물리치기 위해 민심 단결의 원력으로 구국의 원찰, 선원사를 조성하게 되었다. 선원사는 강도시대 최고의 국찰이었던 만큼 거대한 규모로 축조되었으며, 역대 주지에 진명국사 원오국사 자오국사 원명국사 광연선사 등 당대의 신망 두터운 고승들이 차례로 부임할만큼 국난극복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순천 송광사와 함께 고려의 2대 선찰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던 것이다.
헌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서원으로 만들었던 초조대장경을 잃은 고려는 대장도감을 선원사에 설치하고 팔만대장경 판각불사를 다시 시작하였다. 강화로 도읍을 옮기고 대몽항쟁 의지를 불사르던 1236년, 천도 4년 뒤의 일이었다. 고려 왕조의 저명한 문사 이규보는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判君臣祈告文)>을 지어 ‘임금이 문무 백관과 함께 크나큰 발원을 세워 이미 구당관사(句當官司)를 설치하고 대장경의 판각을 시작하게 되었다’라고 후대에 고하고 있다. 대장경 판각불사는 16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1251년 9월 완성되었다. 책의 날인 10월 11일은 바로 팔만대장경이 완간된 그 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1995년 경주 석굴암, 서울 종묘와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위원회에 등록된 우리나라 팔만대장경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글씨가 정교하며 오자 탈자가 없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장경 판각불사에 국력을 총동원하고 정성과 원력을 기울였던 고려인의 지극한 불심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짐작케 한다. 고려대장경 그 자체만으로도 명실상부한 세계문화유산이며 이 나라 국보(제32호)이지만 그 정성과 기술 또한 세계적으로 보전되어야 할 한민족의 우수성이요, 한국 불교의 저력이 아닐 수 없다.
대장경은 판각된 이후, 147년 동안 선원사에 보관되었고, 조선 태조 7년(1398) 한양의 지천사로 이운되었다가 다시 합천 해인사로 옮겨져 봉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총 1,516종의 경판과 8만 1,258매에 이르는 방대한 숫자의 장경은 그 글자 한자 한자가 창검보다 강인한 불심의 결정체이다. 왕실과 백성, 승과 속, 모두가 하나가 되었음은 물론, 산벚나무 돌배나무 자작나무 이 땅의 흔하디 흔한 초목들이 대장경 불사에 아낌없이 그 몸을 바쳤다. 만고의 성보를 만들기 위해 해풍과 눈보라도 불사를 거들고 바닷물도 그 염도(鹽度)를 더하였던 것이다.
선원사터는 팔만대장경이 용진돈대·용골돈대를 거쳐 강화를 떠난 후 고려말 신돈이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불태워졌다는 쓸쓸한 뒷얘기를 남겼을뿐, 그 흔적조차 더듬기 어려운 폐허가 되어 운무 속을 떠돌고 있다. 폐사지의 풀들은 바람 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가. 마른 강아지풀들이 주저앉아 넋을 놓고 있는 선원사 터에는 발굴을 위해 베어낸 해송들의 그루터기가 주초처럼 선명하게 금당터를 지키고 있다. 나무와 인연을 맺은 절터이니 만큼 망가진 뒤에도 뿌리깊은 우듬지들이 지키고 있는 것이다.
<시인·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사진 = 고영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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