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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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발전 있어야 삶도 발전
입력이 된 데다가 되입력하면
앞서 입력한 것은 없어지는 것

아침저녁 자고 깨는 것도 실감나지만 우리가 흩어졌다 모이는 것도 실감이 나죠. 허허허! 이렇게 흩어졌다가 모이는 것도 일종의, 우주 자체도 그렇게 흩어졌다가 모이고 모여졌다 흩어지는 작용을 쉴 사이 없이 하거든요. 여러분이 가정에서 살면서 내 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회 또는 내가 살고 있는 그 자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것도 생각해볼 수 없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나가는 수가 많습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자기 죽을 날도 생각하지 못하면서, 죽는다는 것은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죽을 날을 생각하지 않는 거죠.
요새 난 상당히 그 무엇인가, 여러분이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억압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거를 생각할 때 너무나 딱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참,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창살이 없으면서도 창살 속에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면서 억압을 받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나 하고 말입니다. 폭넓게 생각을 해보십시다. 사람들이, 사람뿐만 아니라 천차만별의 사생(四生)들이 살고 있는 그 모습과 행동하는 것과 그 모두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모든 천차만별의 사생들은 자기가 살아온 습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거를 왜 이기지 못할까요?
표현을 한번 한 가지로 해봅시다.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자리를 떠나서 세상 천지를 돌아다니다가 알을 낳을 때는 그 자리에 다시 와서 자기 모습을 형성해 놓고 자기의 모습은 없어지는 그러한 생을 쉴 사이 없이 왜 벗어나지 못할까요.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은 길게 살아오면서 우리가 모습들로 하여금 먹히고 먹고 이러면서 살아온 그 습의 결과입니다. 그 습이 쉴 사이 없이 반복되는 반면에 누적이 되고 누적이 되고 하면서, 하여튼 그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려고 한 번도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왜 그대로만 따라갈까요?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우리 마음은 발전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의 발전이 있어야만이 우리의 삶도 발전이 되고, 또는 발전이 되는 반면에 우리는 창조력이 생기고, 창조력이 생기면 그때는 물리가 터지고, 물리가 터지면 지혜로워지는 겁니다, 마음이 넓어집니다. 그래서 우주 천지를 곳곳마다 심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자유스러운 사람이 되는 거죠.
그렇게 넓게 본다면, 어떻게 넓게 봐야 하나? 첫째, 우리가 공기 주머니 안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 사실만 해도 그것은 아주 폭넓은 생각에 속하죠. 그런데 그렇게 알고만 있어서도 안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항상 얘기하죠.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 과거·현재·미래를 한찰나에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행동할 수도 있고, 삼천 년 전을 지금 현재에 일 초로 갖다 놓을 수도 있습니다. 미래를 일 초로 갖다 놓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못을 박아서 미래의 어느 때에 갖다 놓을 수 있다고 하는 게 아니고 시공을 초월해서 멀고 가까움이 없이 또 가고 옴이 없이 자유롭게 가고 옴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힘이 어디서 생기냐는 거죠. 마음이 폭넓어지고, 폭넓은 무리들이 사는 그 가운데에 바로 나도 더불어 함께 한마음으로서 지금 생활을 하고 있고 그런데, 나를 형성시킨 놈이 어떤 놈인가? 내가 나를 형성시켜서 지금 끌고 다니는데, 물론 혼자는 할 수 없어서 부모를 등장시켜서 정자 난자를 빌고 몸을 빌어서 우리가 형성이 되는 겁니다. 벌레가 나무를 의지해서 자기 몸을 비틀어 매서 진화를 시키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기대지 않고는 못 살아요. 그래서 항상 여러분한테다 해드리는 말이 공생(共生)·공심(共心)·공용(共用)·공체(共體)·공식화(共食化)하고 돌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아무도 없는 먼 데로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 어디 산으로 올라가서 공부를 하겠다, 혼자 앉아서 공부를 하겠다는 이런 생각은 아주 어긋나는 일이죠.
어떤 제자가 스승님께 이런 말을 했답니다. “여기가 너무 시끄럽고 분주하고 대중들이 많아서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올라가서 토굴을 짓고 공부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까 그 스승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그러면 너는 지금 곧바로 가되 땅을 딛지 말고, 남이 짜준 옷도 입지말고, 남이 농사지은 밥을 먹지도 말고, 남이 떠다 놓은 물도 마시지 말고, 남의 땅에다가 오줌도 누지 말라. 그러고 남이 농사짓고 나서 나온 걸로 지붕을 만든 건데 그 지붕 밑에서 어떻게 자느냐? 남들이 다 해놓은 데서 너도 더불어 같이 살면서, 더불어 같이 사는 너의 모습과 너의 생명과 너의 아픔을 다 버리고 무슨 공부를 한다고 하느냐.” 하시더랍니다. 그런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허! 이게 모두가 한도량이구나!’하는 그 뜻을 그때서야 알고 가는 바도 없고 오는 바도 없이 공부를 했더랍니다.
그런 도리를 우리가 꼬집어서 어떻게 말로 다하리까? 말로 해서 마음이 승화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말로 꼬집어서 다 할 수가 없거든요. 비밀문서라는 것이 전부 정신세계의 비밀이니까요. 우리가 가고 오는 것도,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것도 비밀이에요. 예전에는 모습을 가지고 축지법을 썼지만 지금 시대에는 정신계의 축지법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정신을 먹고살고, 정신을 뺏기느냐, 정신을 잡아먹느냐 하는 싸움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구순히 사는 것 같지만 전체가 전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런 싸움을 안 하고 어떻게 평등하게 공법으로써 대치를 해나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점이 있다는 거죠.
모두가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내 형상 아님이 없는데 어째서 모든 거를 밟아서 먹고 살아야만이 인간의 도리를 다한다고 볼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그렇지 않게 할 수 있는 법은 없을까? 그래서 부처님, 삼천 년 전이라고 합시다. 삼천 년 전에 부처님께서 그 뜻을 일러주시고 지금까지도 일러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수많은 사람이 그 도리를 깨달았다 해서 각각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이 얘기를 자세히 들어야 해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수많은 사람, 깨달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무리 마음을 통해서 들어와도 두드러지지 않고, 그 여러 부처님의 마음이 마음을 통해서 바닷물 내놓듯이 다 내놔도 줄지 않는 다는 것을요. 이렇게 광대무변하고 묘한 도리가 우리들에게 다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도 그 관습에 매달리고 그 습에 매달려서, 인연줄에 매달려서 꼼짝을 못 하고 그냥 있는 거예요. 부부지간이라 할지라도, 부모자식지간이라 할지라도 그 자식들의 몸을 붙잡고, 남편이나 아내의 몸을 붙들고 매달리지 말고 그 마음을 둘 아니게 놓고 슬기롭게 굴린다면, 몸은 저절로 붙들어지고, 사랑은 저절로 화(化)해서 자비가 되고 자비의 정이 되고, 뗄래야 뗄 수 없이 이어져 가는 그런, 더불어 하나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묘법이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어떡하면, 어떡하면 요것을 요리를 잘 해서 맛있게 먹여서 그 요리 맛을 알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무지… 땀이 부쩍부쩍 나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은 지구에 붙어서 사는 우리 사람 벌레가, 우리는 화(化)해서 한 발을 떼어 놓아야만이 우리는 공기 주머니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그래야만이 자유자재할 수가 있고, 그래야만이 내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가 있는 그런 자리의, 즉 평등봉(平等峰)의 같은 자리를 할 수 있어서 여래 자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벗었다고 해서, 이 생에 살면서 입었던 옷을 벗었다고 해서 죽는 게 아닙니다. 옷을 벗으면 자기가 살던 차원대로, 참 TV를 보니까요, 배를 갖다가 놓고, 같은 배인데도 크고 작은 것을 가리려고 갖다 놓고선 굴러 떨어뜨립디다. 적은 것은 적은 대로 굴러 떨어지고 큰 거는 큰 것대로 굴러 떨어지게 해요. 그러니 같은 배건만 크고 작은 걸 가려내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작은 건 작은 것대로 놓고 팔고, 큰 것은 큰 것대로 놓고 팔고, 중간치는 중간치대로 놓고 파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모습이 다른, 그 자체 천차만별의 모습들을 죄들 각각 놓고 경쟁을 하고 있는 거죠. 그 경쟁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살아온 습, 그 습으로 인해서 오는 인연에 따라서 인과가 되는 거니까 그것이 업이 되는 거죠. 그게 악업이 되느냐 선업이 되느냐, 또 사랑도 하다가 어떠한 문제 때문에 헤어지면 악업이 되죠. 선업이 그냥 악업으로 순간에 변해 버리고 말게 되는 거죠.
그러니 악업 선업이라는 자체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은 짐작도 못하실 겁니다, 아마. 여러분 몸 속에 다 들어있어요. 갖은 각색의 모습을 해 가지고 의식을 가지고, 그거는 하나도 벗어날 수가 없는 그런 업식이 굴레에서 그냥 고대로, 컴퓨터에 넣으면 고대로 나오듯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업식이 고대로, 딱 아주 기정 사실로 들어있거든요. 그런 거를 지금 내가 말해드리는 건, 그렇게 뺄래야 뺄 수 없고, 끼울래야 끼울 수 없이 입력이 돼서 나오는데, 그렇게 나오는 것을 팔자 운명이라고 하죠. 그러고 영계성·세균성·윤회성·업보성·인과성 모두가 거기에 속해서 나오는 것이 전부 몸 안에 들어있어요. 누구도 부인 못 할 겁니다, 아마.
그래서 나로부터 이 세상이 벌어졌고 나로부터 상대가 생겼고, 나로부터 업식이 생긴 거니까 모든 것을 전부 내 탓으로 돌리라고 하는 겁니다.
묘한 거는 과거에 이렇게 살았다는 겁니다. 과거에도 이렇게 살았어요. 살면서 그 인과라든가 유전성이라든가, 세균성·업보성 또는 영계성까지도 종합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인과가 되는 거죠. 인과가 돼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된 겁니다.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이 말입니다. 입력이 돼서 여러분을 지금 이끌어가고 있죠.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이 녹음이 돼서, 입력이 돼서 나오는 것처럼 됐는데, 사실 입력이 돼서 나와요.
그런데 입력된 것을 어떡하면은 없앨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입력이 된 데다가 되입력을 하면 앞서 입력한 것은 없어지는 것 아니에요? 그렇죠! 그러니깐 그렇게 빨리 인식이 되고 동감이 될 수 있도록 얘기해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그냥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나오는데 거기에 말려서 그대로 습성으로 돼버리고 말았죠. 그래서 모두 살아나가고 있는 거죠. 그런데‘그 자리에다가 믿고 되놓아라, 제 나무는 제 나무 뿌리를 믿어야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제 나무는 제 뿌리를 믿어야 수분과 에너지를 모두 흡수해서 올려보낼 수 있어서 나무가 푸르르게 살 수 있는 것이지, 남의 나무의 뿌리를 믿고, 아이고! 좋게 살게 해달라고 아무리 빌어도 그건 기복이며 이익이 하나도 가지 않는 것이며, 공덕이 될 수가 없는 것이죠.
공덕이란 말은 뭘 뜻하느냐 하면, 천체가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진리를 하나로 묶어서 더불어 같이 돌아가고, 같이 살고 말과 마음이 이어지고 돌아가는 것을 바로 여래라고 하죠. 그러고 공덕이라고 하고요. 어떤 일을 할 때에 나 한 사람이 하는 경우도 있지만 크게 문제가 생기면 모두 거기에 관여가 된 모든 사람들은 전부 모여야 그 일이 성립이 되죠. 전부 모이지 않고는 혼자 해결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더불어 같이 모여서 공동 분담으로 해결을 할 수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주인공입니다. 우리가 공(空)해서 전체가 다 이어져서 돌아가니까, 내 주인을 먼저로 치고 그 내 마음 주인으로 하여금 모두 보풀어져서 더불어 같이 돌아가는 그 자체를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 몸 속의 모든 중생들이 의식들을 꼭 고렇게 가지고 있으니까, 변화를 시키려면 내 마음의 선장이 그 자생중생들을 다, 내 몸이 배라면 다 태워 가지고 지금 다니는 거거든요. 배에 탄 중생들은 다 그 선장의 말을 듣게끔 돼있거든요. 즉 말하자면 질서 있게 그 행동을 마음의 선장에 의해서 따르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악의적으로“어휴! 저놈은 죽었으면 좋겠다.”하면은 안에서도“저놈 죽었으면 좋겠다.”하니까, 그쪽으로 음파가 그냥 가버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쪽에서도 아예 더 마음이 부풀어지면서“두고 보자.”하게 또 만들거든요. 그러니깐 몸 안에서 의식들이 내 마음의 채찍의 다스림에 따라서 나가서 마음도 조절하고, 나쁘게 조절하느냐 아주 평화스럽고 좋게 해결사로서 조절을 하느냐에 달린 것도 바로 자기 생각에 달려 있다는 거죠. 이건 기정 사실입니다.
그 셀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의식을 가지고 있고 천차만별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악업 선업의 천차만별의 업을 가지고 있으니까 거기서 하나하나 나오는 대로에 맡겨 놓으면은 다 통신이 돼서 결정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 자꾸 바깥으로 끄달리고 자꾸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생각에 의해서 작용을 하게 되거든요. 오늘은 요런 자세한 말을 하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얘기를 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하시라도 마음을 넓게 가지면서 거기다가, 만약에 꿈을 꾸었다든가 상대의 어떠한 문제로 인해서 나에게 잘못되는 일이 돌아올 기미가 보인다던가, 또 나를 그냥 꼭두각시로 만든다던가, 또는 나를 적대시 한다하더라도, 이런 문제들이 허다 많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될 거를 벌써 내가 그 기미를 알게 되면은, “너만이 그렇지 않게 할 수가 있잖어! 그 마음과 둘이 아니게 내 마음으로 쓸 수 있게끔 너만이 할 수 있잖아!”하고 모든 신호를 거기다 맡겨놓을 때에, 이건 의학적이기도 해요. 맡겨놓을 때에 대뇌를 통해요. 그러고 고 다음에 소뇌를 통하고 중뇌에서 결정을 짓게 되면 하달이 되는 거죠. 사대(四大)로 통신이 되고요. 통신이 돼서 제각기 소임을 맡아 가지고 그때는 뛰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에요. 안과 밖으로 다 뜁니다. 그래서 내면의 절차가 다 잘되어 있어야 외부의 절차가 다 잘된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안에서 깨진 바가지가 바깥에 나가면 새지 않느냐는 속담의 말도 있죠? 그러니 내 안에 들은 모든 생명체들의 의식이 바로 내 주인이자 내 하인이자, 그리고 내 육체가 또 그네들의 주인이자 바로 심부름꾼이며 관리인이자 집합소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더불어 같이 사는 거지 개별적인 혼자가 없어요. 모두들 살아나가는데 내가 했고, 내가 살고, 이거는 내거라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 것이 없다면 바로 욕심이 다 떨어지는 겁니다. 보세요. 내가 벌어놨다 하면은 그게 조금만 없어져도 그냥 안타깝고 속상하지만 더불어 내 것이다, 더불어 한마음이다 한다면 가지고 다녀도 무겁지도 않고요, 도둑맞을 일도 없지 않습니까? 하하하. 또 생짜배기로 돈이 나가지도 않을 거구요. 전부 자기 돈이라고 그러는데, 더불어 같이 모두의 돈이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생짜배기로 나갑니까? 그러나 내 것이라고 한다면 무슨 핑계를 대고라도 그 돈이 다 나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오늘은 여러분이 허심탄회하게 질문들 하시길 바랍니다. 질문하는 동시에 세세한 것도 그 속에서 나올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세계적으로 볼 때도 그렇고 모두 상대를 놓고 기도를 하게 만들어 놨고, 전부 상대를 놓고 참, 그것도 기적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상대를 놓고 빌고 기도하게끔 만들어 놓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자기가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그 사실을 안다면 누가 대신해 줄 수가 없다는 것을 알텐데 말입니다. 정말 집 안에 들어가서도 말을 못할 일이 생기고, 말을 그렇게 할 수가 없이 자기 혼자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닐 겁니다. 남을 위해서도 그렇고 또는 모든 일이 전부 혼자서 먼 산 보고 울어야만 하고, 자기 혼자서 새겨야 하고, 참아야 하는 일들이 살다보면 건건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래서 올 때도 혼자 왔기 때문에 갈 때도 혼자 가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가르쳐 주는 건, 혼자 온 것이 없기 때문에 혼자 갈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까 연어가 알을 낳을 때는 다시 자기가 태어난 자리로 와서 낳고 자기 몸을 벗는다고 얘기를 했듯이, 자기가 태어난 그 자리에 다시 와서 자기를 다시 형성시켜 놓고 자기는 그냥 옷을 벗어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영원히 사는 거지, 우리가 뭐 죽었다 살았다 할 것이 없는 것이 바로 우리가 저녁이면 잠자고 아침이면 깨는 거와 같기 때문입니다.
▲질문자1: 스님, 이렇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제가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은 견성에 대해서 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달마조사 혈맥론(血脈論)에 의하면은, 부처를 찾고자 하면은 반드시 우리가 견성을 해야 된다고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런데 우리가 염불을 하거나 또 경을 외우거나 계율을 지켜도 마음의 발전이 없으면 별로 이익이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뭐 경을 외우면은 총명을 얻고, 계율을 지키면은 천상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고, 보시를 하면 우리가 복된 과보를 받되 부처는 될 수가 없다는 말씀도 있거든요. 그렇다면 우리 수행하는 불자들이 반드시 견성을 해야 된다고 생각이 되는데, 본래 마음이라는 것은 체가 없고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어서 우리가 볼 수는 없는데, 단순히 그 작용하는 거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고 보고 듣고 하는 걸로 알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제 주인이 마음이고, 또 저를 지금까지 형성시켜온 것이 그 마음이라고 알고 있거든요. 근데 이렇게 알고 수행하는 자체가 견성인지 아니면 저희들이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그 어떠한 다른 경계가 있어서 말씀을 하신 건지 그 점이 상당히 궁금해서 스님께 가르침을 구하고 있습니다.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님: 여러분이 그렇게 이론으로 잘 알려고 하면은 오히려 공부를 못 하죠. 잘 아는 것이 앞을 막아서요. 그렇다고 몰라도 된다는 건 아닙니다.
▲질문자1: 글쎄, 아리송해서요.
▲스님: 그러니까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움죽거리는 것은, 과거에 살던 자기이기 때문에 부(父)죠? 부가 되죠. 그래서 지금 현재에 형성된 자기는 자(子)가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부로 하나가 되고, 생각을 냈다 하면 자로 하나가 된다고 하는 거죠.
그런데 그냥 자동적으로 가만있으면 부(父)가 되고, 자동적으로 생각을 냈다 하면 그냥 자(子)가 되는데, 가만히 있으면 자가 부로 하나가 되고, 또 생각을 냈다 하면 부가 자로 와서 하나가 되고, 그러니 부다 자다 할 것도 없는 자기 주인공을 진실히 믿는 데에 있는 겁니다. 진실히 믿고 잘하든 못하든, 알든 모르든, 경을 보든 안 보든, 즉 말하자면 경을 보면은‘아, 이건 부처님께서 말씀해 놓으신 거지!’이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또 따로가 되는 거죠.
그런데 내가 말하는 것은, 삼천 년 전에 부처님이 말씀해 놓으신 거든, 현재에 말씀한 거든, 내가 없으면은 다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있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있기 때문에 책을 볼 수도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말을 할 수도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마음 공부도 하게 되는 거니까 이렇게 천차만별의 작용을 하면서 살고 있구나, 그러면 그렇게 작용하는 나를 누가 형성시켰냐 하는 건데, 바로 자기란 놈이 형성시켜 놨잖아요. 그렇죠?
▲질문자1: 예.
스님: 자기란 놈이 형성시켰으니까, 나를 형성시킨 고 놈이 바로 부가 되는 겁니다. 참자기가 되고. 그런 거니까 형성된 자(子)의 마음은 바로 부의 마음과 둘이 아닌 까닭에, 나무는 반드시 제 뿌리를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무는 제 뿌리하고 뗄래야 뗄 수가 없는데 미쳐 자기 뿌리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걸 무명이라고 합니다. 흙이 덮여서 나무가 제 뿌리를 못 보는 것을 무명이 덮였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도 영원한 근본 자기 뿌리를 못 보는 것은, 바로 무명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뿌리를 자기가 못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잘 알고 모르고 그걸 떠나서 진실하게 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러고 그 나온 자리에다가, 지금 현실의 모든 일체 작용이 나오는 자리에다가 모든 걸 되맡겨 놓으면, 입력이 된 데다가 다시 입력을 해서 맡겨놓으면은 앞서 입력한 내용은 없어지고 새 내용으로 다시 대치를 해서 쓸 수 있는 그런, 그래서 일체를 모두 그 자리를 믿고 맡겨서 재 입력을 하라는 겁니다.
▲질문자1: 스님, 그러면은 제가 선원에 나오기 시작해 가지고 지금까지 느낀 점과 체험한 것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선원에 나오기 시작한 지가 약 5년이 되거든요. 스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주인공을 믿고 오로지 그 자리에다 맡기는 공부를 하다 보니까 사실은 아까 스님 법문에도 말씀하셨습니다만, 과거의 나쁜 습관으로 인해서 처음에는 참 공부가 안 되는 거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욕심도 나고, 미워하기도 하고, 시기하기도 하고, 질투도 나고, 음란한 생각도 들어가고, 어리석은 마음도 나오고 이래서 처음에는 참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제 생각에는 이 공부는 내가 사람 몸 받았을 때 반드시 하고 가야 된다는 그 생각에 의해서 한번 꾸준히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점 그러한 생각에서 벗어나고 그 생각이 점점 적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마음이 상당히, 말하자면 편안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오 년여 동안 선원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치료를 위해서 치과에 몇 번을 갔지만 몸이 아프거나 그래가지고 병원이나 약국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는데 제가 그 중간에 선원에 나오기 시작해서 한 7개월 정도 됐을 때 제 엉덩이에 종기가 밤알 만한 게 아마 10개 이상 났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나를 공부시키는 기회구나 하고서 밀어붙였어요. ‘주인공! 당신 몸이니까 당신이 낫게 해야지.’하고 병원에도 안 가고, 그전 같았으면 아마 병원에 가서 마이신을 맞는다, 뭐 한다 난리를 쳤을 텐데, 그 자리에다 맡겨놓고 그냥 밀어붙였어요. 그랬더니 이상하게 종기가 그렇게 크면서도 아픔이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한 십여 일을 지나더니 그냥 스스로 나아지는 겁니다. 그래 그 뒤로는 몸이 어디 좀 아프거나 하면은 그냥 주인공 자리에다가 맡기면은 스스로 낫기 때문에 병원에 갈 필요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 마음공부가 얼마나 굳건한 신심으로 진실히 믿고 맡기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을 저는 누구보다 절실히 그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습이 너무 많아 가지고 지금도 가끔 삼독심(三毒心)이, 미워하고 시기하고 욕심내는 마음이 저도 모르게 제 마음자리를 비집고 들어와요. 그럴 때는 사실 참 저 혼자 저 자신을 돌아보면서, ‘5년 동안 네가 뭘 공부했느냐?’이런 자책감도 드는데, 그럴 때마다 제가 주인공 자리에 이렇게 관합니다. ‘오 년 전하고 지금하고 한번 비교를 해봐! 그때의 너하고 지금의 너하고 얼마나 다르냐? 그러면 내가 공부가 된 게 아니냐?’제가 제 자신에게 말하면서 제 몸을 밝게 끌고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고 가는데 스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누구의 말대로 소 고삐를 올바로 잡고 끌고 가는 것인지 한번 스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스님: 올바르게 이끌어가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발광을 하고 습성이 나올 때에 왜 거슬립니까? 그냥 한번 비죽이 웃어보세요. 어떠한 생각이 나오든지 거기서 나오는 줄 알면은 그냥 웃어버릴 수가 있고 또 그렇게 해도 속지 않고 그것도 주인공자리에서, 화해서 모습을 바꿔가지고 자꾸 진드기를 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꾸 건이 생기죠. 그런 거를 가지고 거기에 끄달리면 어떡합니까? 끄달리면 속는 거죠.
동짓날 팥죽 쑤는 얘기를 가끔 예를 들어 말하는데, 팥죽 솥에서 팥죽이 끓는데 방울방울이 따로따로 올라오지 않습니까? 한솥의 죽방울인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개의 죽방울이 한 죽 솥에서 나오는 거니까, 뭐 다른 데서 들어오는 것도 없고 나갈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면 비죽이 웃음이 날 것 아닙니까? 그러니 걱정될 게 하나도 없죠, 뭐!
▲질문자1: 아직 공부가 덜 돼서 그런 거 같습니다.

※위 법문은 1993년 11월 7일 법형제 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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