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오백년 역사의 허리쯤에 우리 민족은 무려 네 차례의 전쟁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 1597년 정유재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문제는 전쟁 뒤의 참혹한 상황이다. 미국과 혹독한 전쟁을 치른 아프가니스탄, 그 나라의 선수들은 지난번 부산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는데 비행기 삯을 아끼려고 배를 여러 번 갈아타는 수고로움을 겪어야 했다. 조선시대도 예외가 아니다. 연이어 전쟁을 겪은 17세기 조선 경제사정은 피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시기의 불교계에서는 사찰을 재건하는 움직임이 기적처럼 일어난다.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과 대적광전, 화엄사 대웅전과 각황전 등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불전 가운데 거대한 것들은 바로 이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불전을 크게 세우니 불화와 불상도 덩달아 커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거대한 괘불이 성행한 시기도 바로 17세기 중엽 이후이다. 이 시기의 불화를 보면 색채가 밝고 명랑하다. 혹독한 전쟁을 치른 시기의 불화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전혀 어두운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색구름이 찬란한 밝은 색조가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18세기를 조선의 르네상스라 부른다. 특히 정조가 통치한 18세기 후반을 조선문화의 절정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불교미술의 잣대로 본다면 18세기보다는 오히려 17세기가 불교미술의 르네상스에 해당한다. 17세기 불교미술은 스케일이 크고 역동적인 생동감으로 가득 차 불교를 중흥시키려는 강렬한 의지가 곳곳에 엿보인다. 18세기가 되면 앞세기에 보여준 에너지의 분출은 잦아들고 무언가 풍요로움에 안주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17세기 불교미술을 중흥시킨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외세의 침략에 항거한 승병들의 활약상이다. 임진왜란에 휴정과 유정이 전공을 세웠고 병자호란에는 각성과 명조가 큰 역할을 해냈다. 전쟁이 끝난 후 각성(호는 벽암)은 완주 송광사, 화엄사, 쌍계사 등 여러 사찰의 재건을 주도하였다. 특히 화엄사에서 볼 수 있는 웅장한 전각들은 그와 그의 제자인 성총이 건립하였다. 1623년 각성이 화엄사를 개수하려고 하자 많은 시주자들이 거리를 메워 어느새 총림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각성에 의하여 재건된 화엄사의 대 역사(役事)는 1653년에 조성된 영산회상도 괘불에까지 미쳤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보현보살과 협시보살이 좌우에 앉아 계시고 그 아래 사천왕이 호위하며 십대제자와 나머지 사천왕이 서있다.
이 괘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상들의 눈빛을 눈여겨보면 매우 강렬함을 느낄 수 있다. 마치 각성 스님을 비롯한 불교신도들의 강렬한 열망이 영산회상도에 모여든 권속들의 눈빛 속에 활활 타오르는 듯 하다.
■경주대 문화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