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육신은 정신세계의 심부름꾼
누가 말을 하게 하고 누가 가고 오게 하는지 생각해보면 자기의 근본 믿지 않을 수 없어


마음공부의 길

스님, 속가에서 불법을 실천을 해나가다 보면 왠지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남들로부터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고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고 살아가야만 하는 이 마음공부의 길을 언제까지나 끝없이 가야만 하는 것입니까? 스님께서 가르쳐주신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이 길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가르침 바랍니다.


그래서 옛날에 길을 만들어놓고 거기다 써 붙이기를, 하나는 길이 험 돌 사닥다리 골짜기로써 험하다고 써놓고, 한 군데는 아주 대로(大路)로 좋은 길이라고 써놓고, 또 한 군데는 가다보면 그냥 춤도 추고 술을 마시는 주막도 있고 쉴 자리도 많고 좋은 길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세 길을 가만히 보면은 공부에 뜻도 없는 사람이 볼 때는 대로가 좋다고 갈 거고, 또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은 ‘내가 대로를 찾으려고 왔느냐? 험하더라도 내가 갈 길은 꼭 가야만 하지.’ 하고 험하지만 바른 길을 택해서 갈테고, 또 그냥 논다니처럼 그런 사람은 ‘뭐, 젊음이 십일홍 넘어가면 다 없어질 텐데 아니 놀고 어떻게 가랴.’ 그러고선 험한 길을 되돌아서 가고 그럴 거예요.
그렇게 세 길로 나누어져 있는데 수행자가 택한 길은 아주 험악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죽은 해골도 그냥 널비하게 있고, 불쌍하게 죽은 축생들의 해골도 널비하게 늘어져 있고, 귀신도 많은 그런 길이에요, 아주 소로(小路). 그런 길을 걷고 있는데 가면서 모조리 집어먹지 않고는 해결할 수가 없지요. 둘이 아니다 하면 집어먹는 거니까. 둘이면 집어먹을 수가 없어요. 안 그래요? 그러니까 모조리 집어먹고 가다보면은 길은 빨라지고 정말 나를 수도 있는 길, 그냥 떠서 가는 길이 생기지요.
그렇듯이 만약에 지금 우리 앞길에 별의별 것이 다 쌓여있다고 한다면, 축생이나 아귀, 축생, 아수라 차원이 낮은 것들이 죽어서 쭉 있으면은 이걸 치우고 길을 가야만 하겠죠? 그래서 정말 참 선의 길은 아주 좁고 천야만야하고 좁은 골짜기고, 길이 험해도 가는데 사람이 죽어서 해골이 이리저리 구르고 그러는 데가 바로 우리 지금 공부하고 가는 길이죠.
그러니 속지 마십시오.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 자기가 속지 마시고.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것은 말 하면도 하지 않는 법, 눈으로 보면서도 보지 않는 법, 귀로 들으면서도 듣지 않은 법, 길을 걸어 다니면서도 걷지 않는 법, 이 네 가지를 다 한데 합쳐서 놓는 법이며 바로 이것이 삼매에 드는 법이며, 참선이며, 참 행이며, 도 행이며, 이것이 바로 인간이 자기를 깨우쳐서 광대무변한 무쌍한 법을 들이고 내는데 손색이 없고, 걸림이 없고, 여여함을 뜻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때에 따라서는 꿈에 뭐가 보이든, 낮에 서로 상대가 생기든, 어떠한 것을 보더라도 굴하지 말고, 어떠한 걸 보더라도 속지 마시고, ‘아! 저것도 모를 때 내 모습이겠지.’하고 이해를 하시고, 또 때에 따라서는 꿈을 잘못 꾸었다 해도, ‘화해서 모습을 보이는 게지, 저것도 내 모습이겠지.’ 이렇게 자꾸 하나로 돌린다면 우주도 바로 축이 있어야 돌아가고 지구도 축이 있어야 돌아가듯이, 맷돌도 축이 있어야 돌아가고 모든 기계도 축이 있어야 돌아가듯이 우리 인간도 축을 빼놓고는 안됩니다. 그 축으로 인해서 비행기 프로펠라가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그 도리를 배워서 생활이나 일체만법을 운용하고 나가면서, 영구적이고도 영원하면서 윤회에 끄달리지 않고 여여하게 활용할 수 있는 중용의 중심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길이요, 진리요, 도입니다.


병과 둘이 아닌 이유

스님의 자유인이 되는 길을 읽고 그 중에서 가장 의문나는 점이 있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제가 10년 이상을 아파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병과 내가 하나가 되라는 말씀, 둘이 아니라는 말씀이 어렵습니다. 병은 내가 반드시 물리쳐야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내가 죽어야 병과 둘이 아니라고 어느 스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도 아리송하고 스님의 감로수 같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죽어야 병과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몸이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현재 의식의 내가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생은 바람결처럼 덧없이 가는 거라고 하지만, 바람결같이 가는 것은 물질적인 모습이지 참자기는 일체 만법을 다 이롭게 해요. 그러니까 육신은 자기 정신계의 시자일 뿐이죠, 심부름꾼 말입니다. 자기가 보지 못하니깐 없는 것 같지만 반드시 있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놓고 공심으로서 살며 둘로 보지말고 모두가 공체로 살고 공생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들만 그런 게 아니라 바로 저런 나무나 돌, 풀 모두가 공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고 인간의 모습 속에 수천 가지의 생명이 살고 있는데 그 생명들도 모두 공생으로 살기 때문에 항상 둘로 보지 말아야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또 일체를 둘로 보지 말아야 된다는 뜻을 알게 하기 위해서 노랫말도 지어 놨어요. ‘삼세가 둘 아닌 도리’라는 제목의 노래를 지어 놨어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육신의 병을 앓고 있다 할지라도 일체를 둘로 보지 말라고 항상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들 몸을 볼 때 둘로 보지 말아야 되잖아요. 공했잖아요. 더불어 같이 살잖아요. 내가 공했는데 병이 어디 있어요. 내가 공했다면 병이 하나도 붙을 데가 없을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깐 병이 낫는 거예요.
왜냐하면 병으로서 오는 놈도 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오대양 육대주에 의해서 돌아가듯이 우리 뱃속을 좀 보세요. 세끈 모든 거 이 놈들이 전자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거예요. 태초의 모습들이 거기에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 그놈들이 한데 한마음으로 뭉쳐서 사람으로 하나를 형성시켜 가지고 진화하게 만들고 자꾸자꾸 마음으로 차원을 높이고 그렇게 해서 또 진화되는 거고, 진화가 됐으면 거기서 하나가 둘, 셋이 되고 자꾸 불어나가는 거고, 또 그것을 제재하기 위해서 때에 따라서는 그냥 싹 없애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린 어디 꼭지에 매여서 사는 것처럼 돼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 창살 없는 감옥이다. 또는 인간의 영화 게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안된다는 문제가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이겁니다. 마음 아니고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육신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어리석은, 비교한다면 혹성같은 데도 어느 동네라고 할 수가 있죠. 어리석은 사람들은 문을 닫아걸거든요, 들어오지 못하게. 이건 비교해서 참작할 일입니다. 그런데 문을 닫아건다고 못 들어가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둘로 보지 말아야 된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애당초 생길 때에 개구리의 모습을 가지고 나오기도 했고, 뱀의 모습을 쓰고 나오기도 했고, 수많은 역경을 거쳐서 인간이 된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모두 있는 거고, 전자에 모습을 알지 못한다면 지금의 모습들을 봐라 이거예요. 그러니 모두를 내 생명과 같이 아끼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죽이는 것도 살리는 거고 살리는 것도 살리는 거기 때문에 죽이는 게 하나도 없어요. 살생이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기 오면 병이나 고친다 이러지만, 전체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병뿐이 아닙니다. 병도 나타나고 가난을 면하는 것도 나타나고, 우환이 없어지는 것도 나타나고 그러지마는 인과응보라든가 유전성이 끊어지는 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모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그 절에 가면 병이나 고친다고 그러겠죠.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이 봄이 되면 꽃이 피고 화창하듯이 참 사람의 마음의 길을 인도해 주는 것도 마음속에 길이 있지 않습니까. 근데 그 마음을 회전시켜준다는 게 전체 보배를 찾아주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니 병뿐이겠습니까? 세세생생에 영원한 보배를 자기가 지니게 되고, 발견하게 되고 또 자기 육체도 이끌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그런 자신만만한 자유인으로서 길을 인도하는 거죠. 지금은 이렇게 공부하지 않는다면 안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리고 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천년 만년 살 줄 알지만 그게 아니잖아요. 바뀌어 태어나고 또 바뀌어 태어나고, 인간으로만 태어나는 게 아니고 잘못하고 살면 짐승의 모습을 태어나기도 하는 거죠. 여러 가지를 다 알려면은 내면의 주인공 자체를 진짜로 믿어야 해요. 자불이자 자기의 주장자이니까 모든 것을 거기다 놓고, 상대방으로 인해서 싸우게 되고 말다툼을 하게 되더라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것 또한 주인공에다 놓고, 아픈 것도 병을 물리치려고 하기보다는‘나를 공부시키느라고 이러는구나! 하고 둘 아니게 살게 하는 것도 너만이 할 수 있어.’ 그러고 자꾸 관하면서 마음을 안정해야 몸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렇게 해 보세요.


모두 해탈을 한다면…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해탈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해탈을 얻고자 하면 수 없는 고행을 해야만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해탈을 얻고자 한다면 과연 이 세상이 현재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저는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태어날 때 인연 따라 구도의 길을 가고 그렇지 않으면 평범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다 업과 인연따라 정해진 것인지요?


우리가 만약에 정신계를 추구해서 물질계와 정신계가 반반씩 100%가 돼서 움죽거리게 된다면 여긴 상세계가 됩니다. 중세계가 아니라 상세계요. 불국토가 된다 이 소리죠. 그건 왜냐하면 다른 혹성에다가 또 중세계를 만들 수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게 없어도 살 수 있고, 저런 게 없어도 살 수가 있는 그런 상세계의 차원이 된다면 없어서 안 되던 물건이 그냥 다 딴 데로 가 버리고 말거든요. 딴 데로 이동이 된다는 얘기죠. 사람이 물건을 실어 날라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 모든 마음을 가라앉혀서 내 몸 하나의 개체에 불국토를 건설할 수가 있어야 바깥의 불국토도 건설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 거죠. 그러니 심성이라는 것이 어마어마한 권리를 가지고 있고, 어마어마한 도법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이지 허공 가운데 꽃이 피어서 열매가 맺는다는 뜻과 같습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이치를, 권리를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하고 스러져 가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이 몸이 다하기까지 공부해서 다시금 진화해서 이 세상에 나올 때 차원에 따라서 다시 그 도리를 알고 나오시면…, 부처님께서도 그 도리를 다 알고 나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한테 보여 줘야만 모두들 믿기 때문에 그렇게 이끌었던 거죠.
우리가 지금 잘 살고 못 사는 건 내가 얼마나 진실히 믿고 몰록 놓고 실천하느냐에 달린 거죠. 어차피 중세계에서 사는 거, 어차피 우리가 행하는 것이 그대로 업이 되고 고가 되는 거니까, 그냥 업이 되고 고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냥 도의 길이며, 이것도 도요, 저것도 도며 도 아닌 게 하나도 없고 진리 아닌 게 없으니까요. 잘못됐다 잘됐다 할 것도 없어요. 그렇게 거기다가 자기 마음의 능력을 다 뺏기지 않고 좀더 진지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여러분이 모르는 거를, 해 보지 않은 거를 말을 해 봤자 말만 어설프게 알지 자기가 실천을 할 수가 없는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마음의 도리를 진실하게 배우셔서 자기가 완벽하게 알아서 실천을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정말이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가 다 지구를 집을 삼아 한 지붕 밑에서 살고 있는데, 그 집이 망가진다면 그 집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 생명들은 다 죽게 돼 있죠. 그러니까 ‘내 집을 내가 지키자. 또 몸뚱이 내 집을 내가 지키자. 내가 사는 사회를 내가 지키자.’하는 겁니다.
이 선법(禪法)에는 논설도 필요 없고 이론도 필요 없습니다. 이론을 따지다 보면 한이 없어요. 살아나가는 모든 것을 이론으로 따지는데, 무(無)의 세상에 공법의 도리로서 가고 옴이 없이 일을 하는 것은 그대로 내 한생각이라고 할까요? 생각이라고 해도 그것도 방편이죠. 이 탁자 위에 놓여진 컵을 봤을 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싶으니까 그냥 먹었을 뿐이죠. 모든 일이 그러하다 이겁니다. 여러분은, 나는 약해서 못 한다는 게 많고, 나는 모른다는 게 많고, 업이 많다고 하고, ‘얼마나 죄를 지었으면 이렇게 고통스러울까’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얽매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뜀박질을 해 보십시오. 마음으로 뜀박질을 할 때는 발이 땅에 붙지 않죠. 마음으로 뜀박질을 할 때는 발이 땅에 닿지 않고 갈 수 있죠. 그러기 때문에 한 찰나라고 합니다. 빛보다 더 빠르죠, 아주. 빛은 오히려 가다가 탈이 생기지만 마음의 빛은 보이는 빛보다 더 빠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 지구의 대기권에, 오존층이라고 하나요?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만약에 구멍이 난다든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면 모든 물질적인, 즉 말하자면 남극 북극의 얼음이 점차적으로 녹게 돼 있죠. 그러면 물난리 불난리에 계속 사람들이 살 수 없게 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저걸 막아야 되겠구나.’하는 마음이 있다면 몸을 가만히 앉혀 놓고, 만약에 여러분 각자가 거길 간다 합시다. 가도 몸뚱이는 여기 있는 거지 몸으로 거기 가는 게 아니죠. 그렇지만 내 마음이 결단을 내리면 스스로 그렇게 가게 되는 거지요. 아주 확고하게 하겠다는 그 의지가 있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발산을 하지 않게끔 다 조치를 취해 놓으면 흠집은 있다 하더라도 그런 일이 차츰차츰 줄어들면서 얼음이 녹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죠.
그 대신에 우리 집이 지구라고 한다면, 집이 작은데 식구가 많다면, 얼른 쉽게 말하는 겁니다. 잘 데도 없어서 같이 붙어 있으면, 왜 배추씨나 무씨를 밭에 뿌려 놓으면 한데 그냥 붙어서 모두 나죠? 그럼 그걸 솎아 줘야지 솎아 주지 않으면 먹을 게 안 나오죠, 자라지도 않고. 그래서 솎는 일이 점차적으로 많아진단 얘깁니다. 이건 자연의 법칙입니다, 솎는 일이 생긴다는 건. 솎는 일은 생기되 같이 붙어 있는 건, 고추나무도 큰 것이 서로 한데 붙어 있으면 하나는 뽑아 내야 한 놈이 살죠. 그렇죠? 그렇게 크고 작은 걸 막론하고 붙어 있는 놈들은 다 솎아 내듯이 말입니다. 이 세상의 만물만생이 다 그러합니다. 그렇게 뽑아 내는 일이 점차적으로 생긴다, 그러니 이 마음공부는 누구는 하고 누구는 안해도 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필연적으로 해서 이 중세계를 벗어나 자유스럽게 살아갈 수 있어야만 눈물 흘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의심없는 믿음 가지려면…

내 삶을 잡고 갈 동아줄을 주셨기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는 믿음으로 놓고 관하라는 것이 어떤 믿음인지요? 알고 있는 것이 믿음인지 바뀌지 않는 생각이 믿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의심도 마음이라 인지가 안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믿고 놓으면 되는 것도 있고 안되는 것도 있는데, 똑같은 믿음으로 놓아도 안되는 것은 믿음의 정도문제인지, 그렇게 하는 게 오히려 나를 위해 하는 것인지, 하늘이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는 믿음을 어떻게 하면 갖게 되는지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이 자체도 놓고 관해야 하는지 그리고 틀 밖 이야기도 많이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일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진짜로 믿으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다면 몰록 일임해서 놔버릴 수가 없죠. 그러니까 우리 내공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마는 인간의 씨들이 있기 때문에 바로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기 때문에 또 움죽거리게 되고, 삼합이 구성돼서 공존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자는 겁니다. 증명해 보는 대로 알 수 있다 이거예요. 우리가 만약에 분별이 없으면 목석일 것이고, 영원한 생명의 실상이 없다면 송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육신이 없다면 보이지 않으니까 무효이니까 삼위일체가 공존한다는 거를 전부들 알아야 돼요.
그럼 부처가 어디 있느냐? 그렇다고 해서 부처를 무시하라는 게 아닙니다. 부처의 형상과 부처님의 말씀을 무시하라는 것도 아니에요. 오직 부처님 앞에 갔을 때는 부처님 형상이 내 형상이요,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이요, 부처님이 이날까지 가르쳐주신 그 말씀이 바로 내 뜻이다 이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몰록 놔버리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상 모든 일체 만물이 다 공해 버렸으니 그 공한 자리에다 너도 놔버리라는 겁니다. 그럼 놔버리는 자는 누구고 놔라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놔버려라’ 하는 자도 공이요 ‘놔버린다’ 하는 자도 공이기 때문에 말을 했으면서 말을 한 사이가 없다는 이 소리만 났을 뿐이지 말한 사이가 없죠.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가 말한 것은 컴퓨터처럼 오관을 통해서 자기가 알고 있더라 이거예요. 잊어버린 것도 잊어버린 거지만… 자기가 이날까지 지내온 거를 자기가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 아는 게 부처님이 아는 거예요, 자기 실상이 아는 거고. 딴 사람이 아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알고 있어요.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자체를 믿어라 이거죠. 자기가 알고 있는 그 무엇이 자기가 하나하나 해나가는 과정을 역력히 알고 있을까? 그 아는 놈이 누굴까? 그 아는 놈은 자기의 생명수와 같기도 하고 자동적인 컴퓨터 같기도 하고 자기의 영원한 주인공이죠. 주인공이라는 건 이름도 없으면서 바로 그 에너지로 충당돼서 컴퓨터처럼 책정이 되는 걸 아셔야 돼요. 그러니깐 놔버리라는 건 어디다 놔버리라고 하는 거냐하면 알고 있는 자기가 바로 공했다 이거죠. 체도 없고 빛깔도 없으면서 자기가 알고 있다 이거야. 그건 부정 못할 거예요. 모든 걸 거기다 놔버려라 이거야. 공이자 색이고 색이자 공이니까.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바로 언짢은 일 좋은 일을 보는 거고, 그 좋은 일 언짢은 일 다 한데 합쳐서 알고 있는 자가 누구냐, 이거죠. 그러니까 고달프다 고달프지 않다, 좋다 즐겁다, 나는 못살겠다 나는 괴롭다, 주먹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자기가 해 놓고 자기가 알고 있거든요. 자기가 해 놓고 자기가 잊어버리는 게 아니고 모르는 게 아니야, 너무도 잘 알아요. 자기가 한해, 24시간 걸어오는 거를 자기가 너무도 잘 알죠, 남은 몰라도.
자기가 알고있는 그 생명수와 같은 자기 에너지가 전체의, 나 하나의 에너지가 아니라 이쪽에도 있고 저쪽에도 있고, 다 있으니 만큼 그 에너지는 차이점이 나질 않죠. 그래서 같이 돌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그러기 때문에 그걸 포착해서 내가 쓸 수 있는 거는 ‘용’ 이라고 하죠. 자기가 진짜로 자기를 나쁜 거든 좋은 거든 모든 걸 책정해서 아는 그놈이, 그놈이 컴퓨터 전체 모든 걸 하고 있거든. 오관을 통해서 컴퓨터처럼 들이고 내고 하는 것도, 바로 탐지기도 텔레파시도 통신도 무전도 다 하고 있는 거야, 고놈이. 내가 나쁜 거 좋은 거, 일한 거 말한 거 하루 24시간 걸어온 거를 저녁때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 알게 되죠? 다 알게 하는 고놈 말이예요. 여러 가지를 하고 있는 고놈, 한놈이 그렇게 여러 가지를 하는데 벌써 그 여러 가지 한 걸 다 알고 있더라 이거죠. 알고 있는 고놈이 바로 주인공이자, 공이자 색이고 색이자 공이라는 겁니다. 부착돼 있으니까. 내 몸에 부착이 돼 있으니까….
그래서 항상 여러 가지 생각하고, 여러 가지 말하는 근본처 그 주처가 바로 누구냐? 이게 도대체 무엇이냐? 주처에서 24시간 여러 가지 하고 왔지 않느냐? 주처에서 여러 가지 말을 하고 왔지 않느냐? 행을 하고 왔지 않느냐? 그러니까 억겁 전서부터 나를 이끌고 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예를 올릴 수 있는 바로 내 조상이자 바로 자아 부처, 원소인 것이죠. 그래서 이름해서 주인공이라고 하는데, 주처라고 해도 좋고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고 심주라고 해도 좋고 마음의 주인이라고 해도 좋아요, 뜻만 알면. 그래서 벌레가 나방이 될 때도 벌레가 생각을 고렇게 했기 때문에 끌고 간거죠, 나방으로… 그렇듯이 사람도 이날까지 억겁을 거쳐오면서 화해서 낳고 질척질척한 데서 낳고, 태로 낳고 알로 낳고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벌써 고등동물로서 화하게 된 거죠.


부모님과 부딪치는 일이…

저는 무남독녀 외딸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성정이 급하고 저에게 많은 걱정을 끼칩니다. 여지껏 저는 어머니께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폐를 끼쳐 드린 적이 없는 모범적인 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에게도 외딸이라서 혜택 받는 일이 있지만 자기감정을 삭이고 해야될 말 안 해야될 말을 구별해서 하고 이 말을 하면 딸이 걱정되니까 하지 말아야지 라는 어른다운 모습이 없고 아무 말이나 하고 그 말에 동감을 하지 않거나 서운한 말을 하면 아주 기분 나빠합니다. 그러면 저의 마음도 너무나 불편합니다.
다른 집은 자식이 부모 속을 애태우는데 우리 집은 부모가 자식을 아주 힘들게 합니다. 자식한테 반찬 만들어 주시는 것 보다 마음을 힘들게 안해주셨으면 합니다. 제 욕심이지요? 부모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저도 저 때문에 부모님이 고통받았으면 하는 나쁜 마음까지 듭니다. 너무도 저를 배려 안하고 언제까지나 다 받아 줄 줄 아는 부모님이 야속합니다. 스님 어떻게 저의 마음을 다스려야 됩니까. 제가 전생에 부모님께 마음의 빚을 많이 지어서 입니까?


그래서 항상 얘기하듯이 부모 자식기간이나 형제간의 인연에 대해서, 끈이 달려서 맺어 있는 게 아니라 탯줄이 붙어 있듯 인연 줄이 붙어 있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아무리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서 경찰서에 가고 속을 썩여도 자식이기 때문에, 그 잘못한 거를 번연히 알면서도 자식이기 때문에 한 게 없단 얘기예요. 자식이기 때문에 잘 했다는 게 아니라, 잘했든 잘못했든 자식이기 때문에 그 한가지가 남는다 거죠. 그 남는 건 어느 부모나 다 똑같을 겁니다. 자식의 근본이나 부모의 근본이나 또 모든 여러분의 근본이 다 똑같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버릴 수가 없는 것이죠. 아무리 자식이 잘못한다 하더라도 버릴 수가 없고, 자식이 보기에 아무리 부모가 잘못한다 하더라도 부모이니깐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는 부모이니까요.
그래서 그 공한 뜻과 우리가 공생을 하고 있고, 공용으로 공식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아실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거든지 생활 속에서 공심으로 해나가기를 바라는 겁니다.
부모가 아무리 잘못을 하고, 자식이 싫다는 거를 강요하거나, 자식이 반대하는 대로 나간다 하더라도 잘 돌려서, 어떤 경우라도 잘 돌려서 잘 살게끔 해 주는 것이 부처님 원력이고 부처님 법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나가는 거는 옳고, 저렇게 나가는 거는 틀리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건 모가 나는 거죠. 그건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법이 아니야. 그래서 잘못 나간다 하더라도 잘못 나간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이지 그게 아니라고 주인공에다 맡겨서 잘 돌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하나하나 이것이 옳다 그르다하면서 판단을 자꾸 한다면, 밉다 곱다 판단을 한다면, 남편도 잘한다 못한다 판단을 하고, 아내도 잘한다 못한다 판단을 하고, 부모도 못한 잘한다 판단을 한다면 잘못 나가는 겁니다. 모두가 잘못 나가는 겁니다.
그러고, 내 갈 길이 지금 바쁘고 나한테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거를 지금 놓고 맡기고 가는 것도 바쁜데 남의 일까지 걱정을 해요, 또. 남의 참견까지 할 때가 아니에요. 남이 말하는 거 듣고 온통 참견을 하는 겁니다. 남이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어! 그거야 네가 죽인다고 하는 거지만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하고 놔버려야 할텐데, 모두 끄집어 내가지곤 꼬리가 꼬리를 물고 돌아가면서 미워하고 결별도 하고, 자식들도 미워하고 그냥 다 팽개치고 이혼하려고 그러는 사람도 있는데 그거는 좁은 소견이죠.
그래서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부모가 아무리 옳지 못하다 하더라도 자식을 잘되게 하는 마음으로서 그렇게 하는 거니까 부드러운 말로, “지금 세상엔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 “아버지, 시대가 달라져서 그래요”이러고 잘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으니 그런 구태의연한 말 하지 하세요.” 그러면서 구박이나 주고 이러면 안됩니다. 왜? 좀 융통성 있고 지혜롭다면 “예, 아버지”“예, 어머니. 어머니가 잘되라고 하시는 그 말씀 깊이깊이 새기겠습니다”하고 공손하게 대답을 한다면 그거 서로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 부모님은 자기가 그렇게 말해서 자식들이 잘된 줄 알고 좋아서 기쁘고 건강하게 살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겁니다. 그러고 또 관하는 도리를 가르쳐 드리면 그 또한 얼마나 좋겠습니까? 돈이 드니 못합니까, 무슨 노력이 드니 못합니까? 자기가 자기 믿고 그렇게 하라고 하는데 뭐가 원통해서 못합니까?
그렇게만 한다면 위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아래로는 자녀들을 잘 이끌어주고, 승천을 허지 말래도 승천을 하게 돼 있어요. 벌써 죽기 사흘 전에 턱 하니 저절로 자동적으로 가게 돼 있어요.
무조건 힘들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뭐가 있었겠어. 미움도 고움도 없었지? 그렇지만 당신이 그래도 어머니를 빌어서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할 수 있고 인생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걸 생각을 해봐요. 고생을 했기 때문에 인생공부를 배웠지, 고생을 안했더라면 인생공부를 어떻게 하겠어요. 남이 쓰린지 고운지 또는 아픈지 그거를 느끼지를 못 했을 거예요, 아마. 그런데 그런 거를 느끼게 됐거든. 곱게 편하게 자란 사람보다 더 한층 공부를 시켰으니 사자가 사자새끼 벼랑에다가 내리 팽개친 거와 다름없잖아?
그러니 고맙게 생각하고 꽃이라도 사서 드리면서 무조건, 무조건 밉고 이쁘고 떠나서, 부모야! 부모란 말이야. 어머니가 살을 주고 아버지는 뼈를 주셨어. 당신의 영혼이 거기에 부합이 되니 삼합이 합쳐서 딸이라는 사람이 나왔는데 그래도 감사히 생각하고 인제는 모든 거를 다 버리고 ‘어머니 감사합니다’ 잘못한 거 잘한 거를 떠나서 무조건, 이제부터라도 모든 거를 다 그 자리에 맡겨봐. 모든 거를 용광로에다가 집어넣기만 하면 새로운 쇠로서 생산이 돼서 밝게 빛이 날거야.
그러니까 힘이 들더라도 그렇게 해보면, 진실하게 마음을 가진다면 얼굴도 환하게 필 테니까. “어머니! 이 꽃을 받으세요. 이 꽃이 내 마음의 꽃입니다. 이제는 어머니 건강하시고 꼭 오래 사세요. 딸 노릇을 꼭 할겁니다.” 하지는 않고 자기만 힘이 든다는 생각이 어딨어요? 그러지 말아요. 아무리 부모가 잘못했더라도, 자식이 아프거나 힘들어하는 걸 보면 자식이 아팠던 것보다 몇 십 곱절 아팠을 거야. 그거를 알아야지. 부모는 자식을 배신하는 법도 없고 또 죽이는 법도 없어요. 환경이 그렇게 만든 거지. 그런데 그런 환경을 누가 가져왔어? 자기가 과거에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현실에 닥쳐오는 거지. 바로 과거에 자기 산대로 닥쳐온 거지. 누구의 탓도 없어. 알았죠? 낳아준 은혜, 길러주신 은혜만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는 거죠. 어머니가 밉다는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내려놓고 그런 어머니를 위해 관해 드린다면 어머니도 변하시지만 본인도 마음이 넉넉해지고 오히려 나중에는 고맙다는 마음이 생길 테니까 내 말을 믿고 꼭 그렇게 해 보세요.
2002-11-06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