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충주 목계나루 청룡사 터
청계진보 간직한 ‘버려진 묵정밭’

찬서리 몰아치니 남한강 물굽이도 물소리가 깊어진다. 옛사람 서성이던 탄금대 언덕엔 가얏고 소리도 끊긴지 오래인데, 목계나루 억새풀들은 저 혼자 어깨춤이다. 기러기들 ‘ㅅ’ 자로 ‘ㄱ’자로 북천(北天)을 향해 노 저어 가는 청계산 머리. 텅 빈 계곡 어디쯤에 옛 도량이 숨어있는지 시름겨운 낮달은 해종일 늙은 느티나무 둘레를 맴돌고 형형색색의 잎새들은 적멸의 무게를 안고 시린 대지 위에 화엄성중을 모자이크 한다.

원주 섬강 자락에서부터 충주 탄금대 합수머리까지 남한강 1백리 강변 길엔 질 좋은 수석(壽石)만큼이나 세월의 무늬 아로새겨진 옛 절터들이 널려있다. ‘농무(農舞) 의 시인’ 신경림 시인의 시처럼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목계나루를 깃점으로 19번 도로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일 먼저 소태면 오량골에 청룡사 터를 만나게 되고, 다시 섬강 기슭 문막을 향해 다가서면 덕은리 고삿길을 넘어 정산리 거돈사터와 부론 법천사터를 만나게 된다.
지난 여름 불두화 만발했던 법천사지 지광국사 부도비는 지금쯤 금잔디에 발목을 묻었을 것이고, 황량한 거돈사 터 정산초등학교 교정에 누운 외짝 당간지주는 겨울잠을 청하기 위해 모로 누운 팔베개를 고칠 것이다. 그 뿐이랴. 갈참나무 옹이보다 더 깊이 청계산 기슭에 뿌리내린 청룡사 터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은 불 탄 절터에 그을음이 무성하고 늙은 느티나무조차 천명을 다해 삭정이로 부서져 내려도 좀처럼 거동을 않는다. 유정이든 무정이든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면 뿌리가 내리는 법이다.
길머리를 다시 달천 쪽으로 돌리면 강변 넓은 들 가운데 우뚝 솟은 신라인의 향기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중앙탑으로 널리 알려진 탑평리 7층대탑이요, 거기서 서북 10리쯤 용전리 입석마을에 이르면 비각 안에 자연석 그대로 비문을 새긴 고구려 장수왕비와도 조우하게 된다. 이 비석은 1천5백여년 동안 잊혀졌다가 1979년 남한 유일의 고구려 비석으로 확인되어 역사의 대접을 받게된 고구려인의 숨결이다.
중원 유역은 삼국시대 이래 내륙 수운(水運)의 대동맥이자 군사 요충지였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이어 백제의 영토였다가 장수왕의 남하로 고구려의 깃발이 꽂혔었고, 6세기 후반부터는 진흥왕의 한강유역 확보에 따라 신라의 영토가 되는 등 환란이 많았던 곳이다. 역사의 물결이 거칠었던 만큼 이 일대에만 4점의 국보급 유물들이 있다. 탑평리 7층대탑(국보 제6호), 입석마을 장수왕비(국보 제 205호), 그리고 부론 법천사 터 지광국사 부도비(국보 제 59호)와 이번 찾아가는 오량골 청계산 기슭 보각국사 정혜원융탑(국보 제 197호)이 그것이다.
법천·거돈·흥법사 터가 이미 세인들의 주목을 받은 폐사지라면 소태면 청계산 자락 청룡사지는 버려진 묵정밭이나 다름없다. 마른 풀섶이 뒤엉킨 사지(寺址)의 사적지 지정은 물론, 국보와 보물급 석물들 조차도 마땅한 주인이 없어 어둠침침한 산그늘을 가사인 양 걸치고 있을 뿐이다.
<잊혀진 가람 탐험>의 갈 길이 바빠 그냥 지나치려던 청룡사터를 다시 찾은 것은 무슨 미련 같은 것이 청룡사 터에 남아있기도 하고, 목계교 건너 강변횟집에 참매자조림이 그리워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찬바람이 불면 살이 야물어져 비로소 제 맛이 난다는 그 음식이다.
여느 때처럼 강변횟집에서 참매자조림으로 점심을 먹고 강변길을 10여분 정도 달려 오량골에 들어서자 예년보다 일찍 겨울이 찾아든 탓인지 길섶의 산국(山菊)들은 벌써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고, 민가 울타리의 수세미 넝쿨은 힘없이 늘어져 있다. 골짜기 초입의 제일 먼저 만나는 청룡사 ‘위전비’(1692)는 여전히 반갑고 연이어 항아리 모양, 낟가리 모양 소담하게 엎딘 ‘적운당’ 부도도 암회색 미소 그대로다.
능선 길 산행의 절정은 아무래도 보각국사 정혜원융탑과 부도비(보물658호), 사자석등(보물 656호)을 참배하는 일이다. 산짐승이나 솔바람만이 오르내릴 이런 산길에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다운 조각품들이 숨은 듯 감춘 듯 오순도순 모여있단 말인가. 나뭇가지에 매달린 ‘문화재 애호’ 현수막 글씨가 바람에 찢겨 눈에 거슬리지만 않아도, 깊은 산 속에 철책을 둘러 이만큼이라도 문화재를 지키려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진다.
숲 속 성보(聖寶)의 주인은 여말선초의 고승으로 고려의 멸망과 조선 건국을 지켜보았던 보각국사 혼수(混修) 환암(幻菴)스님(1320~1392)이다. 보각국사는 강화도 선원사, 순천 송광사의 주지를 역임하며 공민왕과 우왕의 국사로 국운이 다한 고려왕조와 민생들을 어루만지던 당대의 선지식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 역시 돈독한 신심으로 대사에게 귀의하여 대업 도모의 지혜를 구하고자 하였으며, 대사가 청룡사에서 입멸하자 보각국사 시호를 내리고 사리탑 및 탑비를 세우게 했던 것이다.
팔각의 몸돌에 유난히 배가 부른 보각국사 부도는 각면의 신장상 조각과 반룡이 휘감긴 배흘림 부조가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여 조선초기 석조미술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몇발짝 조용히 뒤로 물러선 탑비 역시 귀부도 이수도 없고, 덮개돌도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은채 양끝 모서리를 접은 듯 처리한 것이 이채로우며, 사자 모양의 석등 또한 양주 회암사 쌍사자 석등과 함께 당대의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그야말로 ‘청계진보(淸溪珍寶)’들이다.
일부러 눈여겨 찾지 않는다면 빈 걸음으로 내려가기 십상인 절터는 며느리풀, 새초, 칡넝쿨 등의 줄기가 한데 엉켜 마른 그물을 걸치고 있다. 풀그물들은 도대체 무엇을 낚으려는 것일까. 금당터가 어디인지 일주문이 어디인지 바람도 별도 관심이 없는데 무엇을 길어 올려 새 회상을 기약하려는 것일까. 그을음인지 이끼인지 풀그물에 걸린 석축의 검버섯 무늬가 폐사지의 허망함을 말해준다. 그렇다. 이제 청룡사터 폐사에 얽힌 전설의 비밀을 밝힐 때가 되었다.
청룡사는 부속암자인 연회암(宴晦庵)에서 금강경주석서인 <금강반야경소찬요조현록(보물 제720호)>및 <선종영가집> 등 목판본을 출간하는 등 7백여년 동안 향화를 밝혀온 충주 일원의 대표적 거찰로 밝혀지고 있다. 그런 청룡사가 폐사가 된 것은 구한말 판서를 지낸 민대룡(閔大龍)이 소실의 무덤을 쓰기 위해 절의 스님을 사주하여 불을 지른 까닭이라고 한다. 믿기 어려운 이 전설은 이번 답사 여행에서 절터 뒤쪽 능선에서 웬만한 능(陵)에 버금가는 묵뫼(墓)하나를 발견하여 놀랍게도 사실임이 밝혀졌다. 늘 내 앞에서 답사 여행을 인도하는 눈 밝은 고영배기자가 갈참나무 묘목과 다북솔 숲에서 용케도 그 무덤을 찾아낸 것이다.
청룡사 복원을 꿈꾸며 근년에 세워진 법화종 계열의 새 청룡사 지킴이인 김경애(46세) 보살의 말로는 10여년 전까지 이 무덤을 돌보는 이들이 있었으나, 다녀가고 나면 이상하게도 재앙이 닥쳐 지금은 찾아오는 발길이 없단다. 천년 성보를 망친데 대한 신장들의 분노일까. 묵뫼는 풀한포기 조차 제대로 가꾸지 못한채 솔잎 그늘 속에 쓸쓸히 야위어 가고 있었다. 사랑도 제대로된 사랑이라면 청룡사터 고욤나무 열매처럼 단맛이 들어야 할터인데 속절없는 청룡사 터 민씨일가의 사랑은 그 뒷맛이 몹시 씁쓸하다. 아무리 부처님의 영험과 선열의 숨결이 깃든 천년 고찰이라도 대물림이 잘못되면 청룡사터처럼 어제는 삼론종의 소유가 되고 오늘은 묵정밭이었다가 내일은 다시 법화종에 등기가 되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시인·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다음은 충주 상모면 미륵대원지

청룡사터 가는길

청룡사 터 답사는 교통편이 여러 가지가 있다. 고속도로는 중부고속도로로 일죽IC나 호법IC에서 내려 장호원 38번 국도를 따라 30여분 가량 달리면 된다. 중앙대탑 못 미쳐 목계교를 건너 19번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곧바로 소태면 방향의 청룡사터 이정표가 나온다.
대중교통으로는 동서울터미널에서 제천, 엄정행 버스를 타면 되고, 충주시내에서는 원주행 시외버스에 승차하거나 소태,주치리, 구룡동 버스를 타고 엄정지서(목계)에서 내리면 된다. 현 청룡사(043-855-8856)
2002-11-13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