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나로부터이니 나부터 알라
이번에 포항 지역의 여러분과 더불어 이곳 비치호텔 모든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가 많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지원을 세우기 위해서 너무나 애들 쓴 것 같고, 모두 한마음으로서 서로 주고받는 마음의 전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점안식을 마쳤습니다. 점안식을 하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시리라고 생각하지마는, 진정한 뜻이 어떠한 것인지 그것을 자세히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에 큰스님네들께서 점안식을 하실 때 귀를 뚫고 눈을 뚫어서 모든 중생들이 오게 되면은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되고 통해서 이롭게 하는 영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모든 일체를 다 갖춘 장엄하신 부처님께서 점안을 하셨지,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내면과 통하지 못하는 그런 분들이 점안을 하시면 ‘사불'이 되는 것입니다. 이거를 우리가 잘 알아야 해요. 예전에 돌부처라도 그렇고 점안식을 한 부처님은 끝없이 여러분을 위해서 항상 마음과 마음을 전달하고 말과 말로 전달을 해서 이익을 갖다 줍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은, 그저 만들어 놓은 걸 사다 놓고선 점안식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거는 사불이 돼서 여러분한테 이익을 갖다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복으로 하면은 절대로 나한테 이익이 없는 것입니다. 물질세계의 50%만 갖고 산다면 정신세계의 50%가 걸려서 여여하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만약에 동맥만 있고 정맥이 없다면 돌아가지 않을 거고 정맥만 있고 동맥이 없다면 또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살수가 없죠. 안에서도 그렇듯이 바깥에서도 상대성 원리가 없다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혼자 살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 마음으로 통하고 서로 말로 통하고 전달이 되고 이렇게 해서 서로 주고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도 거저가 없죠.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만큼 우리가 철두철미하게 생각해서 잘 행해야 됩니다.
자기 몸은 나무와 같고 영원한 자기 뿌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뿌리만이 자기를 살립니다. 그래서 딴 나무를 아무리 믿고 아무리 기도를 하고 아무리 수분과 에너지를 달라고 해도 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뿌리만이 흡수를 해서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달마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시주를 하고 아무리 많은 정성을 들였다 하더라도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양무제에게 말을 했죠.
그러니 모두가 이 도리를 알고 행해야 나한테 공덕이 있고 이득이 있고, 나의 마음을 발전시키고 창조력을 기르고 해서 내 가정을 이끌어가면서 어떠한 문제라도 타파를 하고 넘어갈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천자만별로 각자 모두, 여러분이 뿌리가 있듯이, 또 풀 한 포기라도 제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 뿌리만이 제 나무를 위해서 모든 흡수를 해서 살립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그렇죠.
우리가 지수화풍으로 뭉쳐졌습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우리는 지수화풍을 먹고살고 지수화풍이 없으면은 우리는 죽습니다. 이게 지수화풍으로 뭉쳐진 거죠. 지수화풍으로 뭉쳐져서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이 내 몸 안에 지금, 여러분 몸 안에 모든 생명이, 모습과 의식이 있습니다. 딴 데서 나오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영계성·유전성·업보성·세균성 또는 생사 윤회도 다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병고도 애고도 다 거기서 나오는 거죠.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인 입력이 돼가지고 현실에 그 입력이 풀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한테 항상, 네 뿌리에서 나오는 거니까 네 뿌리에다가 놓고, ‘네가 하는 거니까 네가 그렇게 안 할 수도 있잖아!' 하구 거기다 직접 직결해서 놔야 거기서 통신이 돼서 두뇌로 올라가서 두뇌에서 대뇌를 통하고 소뇌를 통해서 중뇌에서 결정을 내려서 사대로 통신이 됩니다. 통신이 되면은 그 통신이 되는 대로 작용을 해줍니다. 작용을 해주면, 작용을 해주는 것은 내 마음이 그렇게 통신을 했기 때문에 그 마음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작용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마음으로써 내 자생중생들을 다스리라는 겁니다. 마음의 선장이기 때문에 다스리라는 소립니다.
다스린다는 게 별난 게 아닙니다. 좋게 생각을 하고, 좋은 결과를 맺고, 모든 걸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내 탓으로 돌리고,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나로부터 생긴 거다, 누구한테서 나오는 게 아니고 나로 인해서 끼리끼리 만난 거니까 누구를 원망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내 탓으로 돌리고 내 뿌리에 모든 것을, 헌 물이 나오면 새 물로 바꿔 쓸 수 있는 그런 돌려놓는 방법을, 그래서 한 구녘으로 넣고 한 구녘에서 나온다, 이런 말 있죠. 내면 한 구녘에다 넣고 한 구녘에서 베풀어진다. 넣고 꺼내는 건 한 구녘이지 두 구녘도 아니다 이런 소립니다.
포항의 여러분한테 이런 소리를 되풀이하는 것은 여기는 아직 처음 오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기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릇이 크면 큰 대로 담겨질 것이고 적으면 적은 대로 담겨질 것입니다. 큰 거를 아무리 줘봤던들 그릇 위로 모두 흘러내립니다.
그런데 여러분한테 한마디 할 것은, 산과 들과 물이 있고 허공에는 공기가 있고 태양이 있습니다. 그럼 그것이 따로 있느냐? 그것이 아닙니다. 따로 있지 않습니다. 산도 그렇고 들에도 우리가 한발 딛고 다니는 것도, 예를 들어서 우리 뿌리에서 철분이라든가 이런 것을 모두 우리가 감촉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러니까 몸에서 기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내 스스로 뿌리에 합류화시켜서 모든 것을 올릴 수 있게끔 만드는 겁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이 몸을 위해서 기를 얻으려고 한다면 그건 소인에 불과하죠. 대의적으로 우리가 근본에서 자아내서 즉 샘물을 퍼 써야지 묵은 물에서 퍼 쓴다면 그거는 썩은 물을 먹는 거나 같습니다. 그래서 단전호흡을 하거나 이래 가지고 그 기를 빼지 못해서 그냥 병이 나는 점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그게 물이 들고나고 해서 기를 조절을 해야지 그렇지 못한다면 잘못되는 거죠. 그래서 원래 근본 자리에서 나고 드는 것을 자유자재권(自由自在權)을 얻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가 떨어지면 기를 넣고 자기 마음대로죠. 컴컴하면 스위치 올려서 전기 불을 켜고 들어가듯이, 또는 켜지 않아야 되겠다 하면 자동적으로 끄고 들어가듯이 자유자재권을 모두 여러분이 가지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산천초목 풀 한 포기라도 전체 뿌리에서 모든 영양분을 흡수를 하고 그거를 전체 합해서 에너지라고 한다면 그 에너지와 수분을 흡수시켜서 나무 위로 올려보낸다 이 소립니다. 나무 위로 올려보내면은 나무들은, 우리와 똑같습니다. 나무들은 태양열과 공기를 흡수해서 또 아래로 내려보냅니다. 그렇게 해서 정맥 동맥이 돌아가듯 전달을 하고 이어서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산천초목의 어떠한 풀 한 포기라도 우리한테 이익을 주고 또 우리는 그네들한테 이익을 조달합니다. 대변과 오줌 같은 것을 다 줍니다. 자동적으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것입니다. 이건 누가 준다 안 준다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네들은 공기를 흡수해서 저장했다가 우리한테 또 공급합니다.
여러분이 벌어먹는 것만 알지 그 벌어먹기 위해서 어떤 것을 대비하고 어떤 것을 대치해야만이 모든 걸 타파해 나갈 수 있는지 원천적인 것부터 알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종교란 무엇입니까? 불(佛)은 모든 일체 생명을 말합니다. 교(敎)는 말로 전달이 되고 마음으로 전달이 되고 통신이 되는 것을, 우리가 죽은 세상이나 산 세상이 전부 조달이 되는 것을 교라고 그럽니다.
그러니 어느 종교라 해도 불교 안에 있지 불교는 어떠한 사람이, 사람의 개별적인 어떠한 이름이 아닙니다. 천체적인 진리를 이름해서 불교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 이 세상은 불바퀴가 안 돌아가는 데가 없어요. 우리는 그 불바퀴가 나한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근본적인 뿌리 그 자체가 불바퀴니까 모든 걸 불바퀴에다가, 즉 말하자면 애고라든가 병고라든가 유전성·영계성·업보성·세균성 모든 것을 거기다가 맡겨놓고 다시 환원해서 요리를 해서 먹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무와 배추가 있으니까 그냥 넣어서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는 겁니다. 그와 같이 천차만별의 음식을 맛있게 요리를 해서 먹듯이, 여직껏은 요리를 해보지 못해서 맛있게 먹지를 못했지마는 인제는 알아가지고 요리를 하는 방법을 다 여기 스님들한테도 물어봐서 관(觀)하는 법을 아셔야 됩니다.
그런데 물에서는 또 안 그렇습니까? 물에서도 여러 생명체들이 얼마나 우리한테 공급을 합니까? 그 모든 모습의 고기들이 헤아릴 수 없이 우리한테 공급을 합니다. 우린 뭐 주는 게 있을까요? 우리는 먹고 대변과 소변, 또는 정신력의 모든 것을 다 줍니다. 그럼으로써 바다에서는 반 이상 더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태양력과 태양열이. 그러기 때문에 너무나 신기하게도 바람이 일고 태풍이 붑니다. 그것은 우리를 못 살게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모든 생명체들을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마음과 마음이 연결이 되니깐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밑에서 사는 고기들도 다 살기 위해서 마음이, 의식들이 있기 때문에 그냥 땅바닥까지 다 송두리째 뒤집힙니다. 그래서 물을 환원을 시켜야 살 수 있는 거죠. 태양열과 공기와 모든 것이 다 서로 살기 위해서요.
그거는 어떠한 관계상 그렇게 되나?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달이 안 되는 데가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서 고기들과, 아니 벌레, 곤충들은 촉각이 아주 잘 열려서 금방금방 대치를 하고, 앞으로 내다보고 그러는 것은 대치를 하고, 사는 방침을 세워야 하니까 그렇게 됐지만 인간은 촉각이 발달이 된 게 아니고 내다보고 우리가 가는 그런 느낌과, 즉 말하자면은 여섯 가지의 대치를 해서 감각· 촉각· 시각 등 여섯 가지를 다 합해서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아주 깊게, 이거 말로 하려면 어렵지만 깊게 우리가 알 수 있는 거, 촉각보다도 더 총 합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내 뿌리를 믿는 데서 조달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과거도 미래도 다 알고 앞날도 현재 요 시간 넘어서 거기서는 스스로서 알게 하고 스스로서 가게하고 스스로서 완화시킵니다. 그러니 몸과 정신이 둘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본이 없으면 무효입니다. 또 생각을 해내지 못한다면 목석이기 때문에 무효입니다. 몸이 없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불교는 여러분이 계시니까 있는 거지 여러분이 없으면 무슨 불교가 있습니까? 나는 그렇습니다. 모셔놓은 부처님의 형상을 나를 떠나서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믿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나로부터 모두가 있는 거니까 나부터 알아라, 나의 마음의 안테나부터 세워놔야 오고 가는 것을 다 통신할 수 있다는 거죠. 통해야 뭐가 어떤지 알 수 있지 않느냐는 거죠. 나로부터다, 내 주처는 나한테 있다, 나의 뿌리는 나한테 있지 딴 데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들과 물과 산, 허공의 생명까지도 모두, 즉 말하자면 고기 잡는 거 뭐죠? 그물! 한 손으로 그물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한 손으로 그물을 들어서… 그물 드는 게 하나로 돼 있는 거는 뭐냐 하면, 내가 어떠한 지경에 빠져도 대치하는 것은 스스로서 입력이 됐기 때문에 스스로서 손 없는 손이 발 없는 발이, 즉 말하자면 내 마음의 주장자가 하늘을 받치고 굴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묘하고 광대무변한 법을 부처님께서 49년 동안이나 설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상대를 믿고, 상대의 뿌리와 이름을 찾고, 다른 나무의 이름을 찾으면서 기도를 하고 온통 야단들이니 뭐가 전달이 되고 뭐가 이익이 있고 뭐가 공덕이 되겠습니까?
공덕이란 무엇입니까? 모두 뭉쳐서 서로 너나가 없이 해주는 그런, 아픔도 둘이 아니게 서로가 알고 위로해주는 그런 마음 자체가 바로 공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개별적으로 기도를 하고 정성을 들이고 시주를 했는데도 나한테 이득이 없다고, 이게 얼마나 공덕이 되겠습니까? 복덕은 우리 사는 데에 아주 기간이 짧은 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복덕하고 공덕하고는 천지차이입니다. 복덕은 잠시 잠깐 그저 불 반짝 켜주다가 꺼지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나 공덕은 세세생생입니다. 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세세생생의 밝음을… 언제라도 꺼진다 켜진다 이런 것이 아닌 밝음의 세계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덕이 돼야지 복덕을 찾아서는 아니 된다 이런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내면의 자기 자성을 믿는데, 자성의 뿌리로서 내가 살고 있구나! 그런데 내가 혼자 먹는 건가? 내 몸 속에 내가 얼마나 많이 들어 있나, 일한 것도 혼자 했나? 언제든지 말은 좋게 하죠. ‘내가 죽도록 애를 쓰고 벌었다.'고 그러거든요. 참 내! 아니 혼자 벌은 게 어디 있어요? 수십만 명의 생명들, 의식들, 모습들이 한데 작용을 해줘서 자기 몸 하나가 움죽거려서 벌은 거지 혼자 벌은 게 어디 있어요? 혼자 먹는 게 어디 있고 혼자 벌은 게 어디 있고, 혼자 듣는 게 어디 있고 혼자 만나는 게 어디 있고, 혼자 걸어가는 게 어디 있습니까? 말씀들 좀 해보세요.
그런데 내가 했다고 내세울 건덕지가 있을까요? 내가 했다고 세워서 ‘아, 내가 잘못했어.' 하는 것도 없고, ‘내가 잘했어.' 하는 것도 없고, ‘내가 얼마나 과거에 잘못했으면 업이 이렇게 많을까.' 하는 것도 없어요. 모두가 공생·공심·공용·공체·공식화하고 돌아가고 있어요.
반야심경이 이 세상 돌아가는 진리, 팔만대장경을 축소해서 한데 합쳐 놓은 거예요. 근데 여러분은 글자 풀이로 해서 화엄경이니 금강경이니 반야경이니, 어떤 경을 막론해 놓고 달달달 외우면 무슨 공덕이 들어올 줄 알고 그냥 아침저녁 염불을 하지 않나, 절을 하지 않나, 별거를 다하고 있어요. 그거는 단시일내의 복이지 세세생생 벗어나는 공덕은 될 수가 없습니다.
한 생을 사는 게 한 철 왔다가 가는 겁니다. 마음은 영원하지만 모습은 한 철입니다. 마음의 차원은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도리를 벗어나서 알고 본다면 살고 죽는 것도 없고 그대로 영원하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질문자1: 스님의 법문을 책이나 비디오를 통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의문나는 세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첫째, 인간에게는 원죄라는 것이 있어서 인연, 또는 죄업이 전부 다 젖어 있는데 이것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고행을 해야 되고, 또 많은 헌금을 갖다 바쳐야 되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좀처럼 구제 받을 수 없다는 문제와 그 다음은….
▲스님: 먹는 것도 퍼 넣으면 체하지 않아요? 따지고 본다면 내가 얼마나 현명하게 얘기해 드렸습니까?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공동분담이니 내세울 게 없다 했죠? 그랬으면 업이 어디 붙을 자리가 있습니까? 업 붙을 자리도 없고 애고 붙을 자리도 없고 병고 붙을 자리도 없는데 여러분의 관습 때문에, 어리석기 때문에 항상 ‘오늘 이사를 가는 데 손이 있다지?' 하는 요 생각부터 머리에 들어오는 겁니다. 또‘무슨 공장을 해야 할 텐데 고사를 지내야 된다더라.’ 하는 요 습관, 또 ‘고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데….' 하는 그 습, 착! 이 모두가 여러분 머리 속에 그대로 배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지, 아니 누가 그렇게 하라고 그랬나요?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강조하던가요?
이 허공은 탁 터졌어요. 지붕도 없고 상하 사방이 툭 터졌어요. 마음은 체가 없는 거라 지금 마음으로 집을 갔다 올래도 갔다 올 수 있죠? 예? 그래서 지구를 벗어나서 저 달나라, 태양, 다른 혹성에 한 찰나에 갈 수도 있고 한 찰나에 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게 마음이에요.
한 옆만 보는 게 아닙니다. 마음에 가고 옴이 없이 볼 수 있는 것은 심성 안에 천안, 이 보이지 않는 눈은 가서 천체를 다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대로.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끌어다가 그냥 보는 거예요. 그런데 업이 붙을 자리가 있을까요? 여러분 관습 때문이고 그 어리석은 의심 때문이고 습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살아야지, 살아나가는 게 이러니까 이러해야지.’ 이것 좀 바꾸면 어떻습니까? 그래서 내가 고 얘기를 해드린 겁니다.
몸 안에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의 의식들이 들어 있다. 그것이 쉴 사이 없이 좋은 거 할 때는 좋은 것이 나오고 언짢게 한 거는 언짢게 나오고 수시로 나오는데 나오는 그 구녘에다 다시 입력을 한다면 앞서 입력이 없어지지 않느냐? 이런 거를 말씀해 드린 겁니다. 그렇다면 뭐가 남습니까? 일체를 다 거기다 넣고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어. 모든 것을 네가 한 것이니 네가 해결해야지.' 하고 모든 것을 거기다 다시 놓으라는 소립니다. 놓고 굴림을 알아라. ‘고가 나오는 것도 너한테서 나온 거니까 애고가 없게 하는 것도 너 아니냐.' 하고 거기다가 되돌려 놓으면 입력돼서 술술 나오던 게 다시 입력을 하니까 앞서의 입력된 것은 없어지고 새로 입력된 대로 나온다, 이런 소립니다.
▲질문자1: 사람은 죽어서 축생으로 태어날 수가 있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 주위에 살고 있는 개라든지 고양이·닭·소, 이와 같은 동물도 태어나기 이전에 과거에 사람으로 한 번씩 되었는지 또 다시 죽어서 앞으로 사람이 되는지, 이런 것이 상당히 궁금합니다. 그리고 타종교에서 이런 것을 질문을 하면 저희들이 그 답변을 하는데 상당히 애로가 많습니다. 저희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침 바라겠습니다.
▲스님: 그렇게 하십시다. (대중 웃음) 허허허. 물이 돌아가듯이 우리 인간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모습을 가지고 나온다 이겁니다. 그러니깐 악과 선을 다 거기다 놔라.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하게 놓고 언짢은 일이 생기면 ‘너한테서 나오는 거니까 너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거기다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현실에 모습이 주어지고,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미래에 주어지니까, 현실의 미래가 현실로 다시 오니까 그 모습을 가져 왔을 때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모습이 주어지는 거죠.
그래서 세세생생에 벗어나지 못하는 지옥에 든다는 소리는 뭐냐 하면은 모습을 만약에 독사로 가지고 나왔다 하면, 독사로 태어나면은 독사의 습이 그냥 배서 당최 인도 환생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독사로 수없는 나날을 돈다, 개구리로도 되고, 오간지옥이다 한다면 그냥 땅 속에 묻혀서 사는 벌레 있죠? 그러니까 국내 밥내도 못 맡는 그런 곤충이 된다, 이건 오간지옥의 꼴을 겪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모습이 순간순간 바꿔집니다. 사람이 살아나가는 데도 내가 잘하면 잘한 게 오고 못하면 못한 게 금방금방 옵니다. 그건 에누리가 없어요, 우연도 없습니다. 그렇듯이 잠깐잠깐 내가 잘하고 못하고 하는 데서 회사도 망할 수도 있고 회사가 발전할 수도 있는 그 도리가, 우리가 생사의 윤회에 걸림을 받는 것은 우리의 마음 씀씀이에 따라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그 모습을 가지고 오는 겁니다, 영원토록 말입니다.
▲질문자1: : 방편으로 말씀하시는 건지 아니면 실제인지요?
▲스님: 실제입니다! 아니, 실지지 실지 아닌 걸 어떻게… 방편입니까, 그게? 정말 실지입니다! 정말 에누리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도리를 알아보면은 자기 뿌리와 현재 자(子)가, 즉 말하자면 전자에 살던 조상이기 때문에 자기 부(父)와 현재 자기 자(子)와 둘이 아니게 상봉을 해야만이 그 도리를 알게 돼 있습니다.
▲질문자1: 부처의 구원은 육체가 멸한 후의 그 세계에서만 있는 것이지, 즉 말하자면 육체가 있는 동안에는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으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저희들이 좀 알기 쉽게 말씀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님: 아버지가 있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가정살이를 하시죠? 만약에 자식이 공부를 안 하고 가방을 싸 짊어지고 나갔다 한다면 아버지가 억지로 하시겠습니까? 억지로 하다간 부러지죠. 그러기 때문에 억지로 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잘 해서 오게끔 만듭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항상 그런 마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싸 짊어지고 나간 놈이 나가서 행동을 해보고 ‘아, 이건 막다른 골목이구나.' 하는 것을 자기 본인이 알아야 들어오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항상 부러짐이 없이 다시 돌아서 들어오게끔 살리시는 겁니다, 건지시는 겁니다. 그거와 똑같죠.
그러니까 “인연 없는 중생은 어찌 할 바가 없느니라." 한 것이 뭐냐? 가는 거를 잡지말고 오는 거를 마다하지 마라. 가는 거를 그대로 둬야 막다른 골목인 줄 알고 다시 되돌아 올 때가 있다. 그러면 잘못하는 것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다. 왜? 잘못하는 사람은 항상 잘못하기만 하는 게 아니거든요. 또 잘하는 사람도 항상 잘하기만 하지 않으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냥 마음을 다스리면서 잘 이끌어나간다면 이익 하도록, 남과 나가 이익 하도록만 이끌고 간다면 그대로라고 했거든요.
그러니 “인연 없는 중생은 어찌 할 바가 없느니라." 한 것은 우리 단시일 내에 아들과 어머니 아버지를 비유해 볼 때 그거 고집이 세고 이렇게 하겠다, 고것뿐이 아니죠. 요거는 요렇게 하겠다고 그냥 악착같이 들 때는 엄마 아빠가 자식을 위해서 말을 해도 듣지 않으니 내번져둬야지 어떡합니까, 그거.
그러다가 어느 시기에 보면은 또 싸 짊어지고 ‘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구선 들어오게 되는 이치가 많죠. 고 때를 말하는 겁니다. 고 달아나가는 그 마음 자체, 막 들이덤비고 화내고 그럴 때 고 때를 말하며, 인연 없는 중생을 어찌 할 바가 없다고 하나 끝없이 돌아가는 거니까 인제는 고렇게 잘못하던 아이들도 잘할 수 있다. 앞으로 그 때를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인연이 없으면 할 수 없고 인연에 따라서 또 다시 돌아올 테니까 느긋이 믿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거죠.
▲질문자2: 스님 법문을 이곳 포항에서 듣게 되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함께 모여서 공부할 수 있는 도량이 생겨서 더욱 고맙구요.
저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이 공부한 지 얼마 되진 않았는데요. 학교에서 아이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아, 저놈들도 자기 씨앗이 있겠지. 내가 옆에서 어떻게 한다고 될까?' 이런 생각도 드는데요. 근데 또 한편 생각해 보면 제가 학교에서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그런 것들, 잘못된 행동이나 말들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걸 보면 저 애들도 자기 씨앗은 있지만 내가 이 학교에서 아이들의 씨앗이 잘 트도록 물과 거름 역할을 하는구나. 근데 아직 나는 많이 부족한데 제대로 된 그 씨앗을 싹트게 할 수 있는 물과 거름이 될 수 있을까. 제대로 된 그런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 생활 속에서 어떻게 관해야 할지 그 부분에 대해서 스님께서 좀 가르침을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스님: 이 불이 여기 세 군데 들어왔지? 우리 여럿이 다 같이 앉았는데 밝게 앉았죠?
▲대중: 예.
▲스님: 그런데 전력은 똑같아요, 학생들이나 선생님이나. 응? 씨앗은 똑같다 이 소리야. 그러니까 자가발전소는 똑같다 이거지. 그러니까 이 불을 켜고 안 켜고 하는 것은 그 마음에 달려 있지? 그러니까 마음은 전달이 되지 않으면서 전달이 될 수 있어.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돼서… ‘아, 조놈들 저렇게 됐으면' 하는 생각이 있으면 전달이 되는 거야. 그리고 말로 통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씨앗이 커지고 싹이 커지지.
그래서 우리가 가르치는 역할은 항상 그 씨에 수분을 주고 흙을 골라주고 해서 그 싹을 틔어주는 거라고. 싹을 틔어주고 고 다음엔 그 싹이 길러지는 거를 말하지. 그러니까 잘해서 좋은 역할을 하도록 해요.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는 우리가 한 스위치만 이렇게 올려도 불이 전체가 들어와서 밝게 같이 살 수 있는 이런 거지. 그러니까 마음의 스위치는 그렇게 모두 전달이 되게 돼 있어요. 이 천차만별의 만물만생이 전체가 다 그렇게 연결이 돼 있어요. 그런데 학생들과 선생님이 고것쯤이야 연결이 안 되겠소? 허허허.
▲질문자3: 집사람이 일주일 전만 해도 몸이 아주 안 좋아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만에 여기 포항까지 올라왔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스님: 하하하. 그것 보세요. 마음과 마음이 연결이 돼서 조달이 돼 가지고 안에 생명의 의식들이 작용을 해주는 데는, 병원에서도 전체 연결을 시켜서 하지 않거든요. 어디서 병고가 나왔는지, 병고는 똑같지마는 병고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행할 수가 없죠. 그래서 정신계의 50%를 모르기 때문에, 현실 물질계의 50%만 알기 때문에 못 고치는 게 많다 이런 문제가 되죠.
그래서 중노릇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십니까? 아주 가난하고 어쩔 수 없는 사람, 나처럼 못난 사람을 볼 때는 너무도 가슴이 찡하고 눈에 눈물이 어려요. 이것이 내가 못난 건지 잘난 건지는 모르지마는 인간 삶이 돌아가는 본분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중노릇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하는 거는 자나깨나 쉴 사이가 없고, 자나깨나 정신력이 항상 그대로라야 되겠죠. 천차만별로 들고나는데 말입니다. 새 물이 들어왔다 헌 물이 또 들어오고, 들어오면 또 새 물로 갈고 이렇게 연방연방 대치를 얼마나 잘해야 되는지….
여러분이 시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받은 사이가 하나도 없다. 여러분도 준 사이가 하나도 없어요. 이 도리를 아신다면 참 영리한 겁니다. 왜냐하면 천만금을 갖다줬어도 나는 한푼도 받은 사이 없습니다. 이거를 비유해서 말하자면, 가게 물건 사러 갔을 때 돈 갖다 준 예 있습니까? 물건을 가져왔는데. 물건 사러 갔으면 물건 사 왔으니까 돈 준 사이가 없죠? 그리고 또 그쪽에서는 돈 받은 사이가 없죠. 준 사이도 없고 받은 사이도 없어요. 요런 거나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전에 어느 조사께서 말입니다. 누가 천도를 시키러 오니까 재비를 가져온 걸 가지고 아주 불쌍한 사람들이 방을 못 얻어서 거리로 나앉아서 모두 옹기종기 있는 것을 보고 그거를 줘 가지고 방을 얻게 해줬거든요. 그래서 물건 사러 갔다가 못 사고 그냥 왔는데 아, 천도를 안 시켜 주느냐고 자꾸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천도를 안 시켜줬다고 생각을 하면은 도로 돈 가져가라 한 거죠. 나도 그래 본 예가 한두 번이 아니니까요. 하하하.
오늘도 그런 뜻에서 한마음으로 이렇게 이룩하셨으니 여러분의 그 정성과 결단이 아주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처음에 생각하시고 이렇게 이룬 그 분에게 참 감사를 드리고요. 내가 감사할 건 없지만 말이에요. (합장하시며) 하하하.
또 질문할 분 없습니까? 여기 계시는 분들은 다 여래가 되셔서, 하하하, 질문하실 분도 없으신가 봅니다. 하여튼 간단하게 이렇게 말씀을 해드린 거를 참작하셔서 병고도 애고도 붙을 자리가 없다, 내가 한 게 없다. 그렇게 수십 억의 모습과 생명과 의식이 있고, 혼자 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거기서 한 거니까 거기서 다 알아서 하라고 다 맡기세요, 그냥.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