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다는 생각 없어야 홀연히 깨칠 수 있는 지름길
문
목표를 달성하는 마음 자세
스님, 요즘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항상 어떤 일에 대하여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면서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아니면 그냥 관하면서 물 흐르는 것처럼, 조금은 그러한 일들에 대하여 마음을 놓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 하겠습니다.
너무 열심히 하려다 보니 거기에 얽매이는 느낌도 들고 몸도 따라 주지 않아서 힘들고, 반대로 그냥 놓으면서 힘닿는 대로만 살려고 하니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아 항상 반대로 열심히 하려고 마음을 돌려놓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게 제 욕심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아직 주인공 공부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지만 바르게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답
여러분이 진짜로 자기를 믿고 절감을 해야 되는 거지 그걸 내가 말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죠. 아주 급박할 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그 심정이 되야 겨우 ‘너만이 할 수 있다.' 하고 믿고 그 자리에 놓게 되는 거죠. 어떨 때는 외국지원에 계시는 신도들이 절박하게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알았어. 절박한 만큼 간절하게 관해 봐!”그러면 그 이튿날이고 전화가 또 뚜르르 옵니다. “해결되었어요.” 하거든요.
그래서 감사하다고 그러면 나는 그럽니다. “네 전깃줄과 내 전깃줄이 둘이 아닌 까닭에 불이 들어왔을 뿐이다. 내 전깃줄은 제일이고 네 전깃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네 마음의 전깃줄과 내 마음의 전깃줄을 같이 합쳐졌으니까 불이 들어온 거다. 그러니까 내가 낫게 한 것도 없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역시 진정으로 믿고 그렇게 하면…. 자기 뿌리를 자기가 안 믿으면 누굴 믿을 겁니까? 이름을 믿을 겁니까? 형상을 믿을 겁니까? 또 스님들을 믿을 겁니까? 어떻게 할 겁니까? 자기를 이끌어 가는 진실한 자기를 믿어야죠.
이런 고로 우리가 좀더 생각해서, 한 번 더 생각하고 생각해서, 일을 할 때나 잠을 잘 때나, 또는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항상 자기 뿌리를 잊지 않을 것을 자기 뿌리에 맹세하는 반면에 자기 싹은 열심히 뛰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내가 예전에 이런 말을 했죠? 부처님이 안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할 테니 너는 뛰어라.’라구요. 그 말이 그냥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지금 그렇게 하고 가시는데 여러분은 패기가 없어서 과감히 뛰어넘을 줄을 모르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더 있다 죽으나 덜 있다 죽으나, 이따 죽으나 또 먼저 죽으나 죽는 것은 똑같아요.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뭐가 두려워서 뛰어넘질 못합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마음인데 말입니다. 죽으나 사나 뛰는 마음 자체가 바로 피안으로 넘어서는 도리입니다. 한 생을 살면서 ‘이거를 이렇게 하면 어쩌나, 저렇게 하면 어쩌나’ 하고 망설이기 때문에 넘지 못하는 분들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결사적으로 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거, 결사적으로 이 도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왜인가? 여러분이 각각 소임을 따로따로 가지고 있습니다. 교직이면 교직, 회사원이면 회사원, 장사면 장사 이렇게 제각끔들 다 가지고 있는 그 소임에 따라서 터득을 하면 그게 개척이고, 그게 계발이고, 그게 바로 나를 내가 승화시키는 길입니다. 억지로 높은 자리를 뺏어서 올라갈 양으로 애쓸 필요 없이 자기가 맡은 소임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과정에서 누구나가 다 그렇게 해 나가야 발전이 있는 겁니다.
발전이라는 것은 마음의 발전을 말합니다. 마음의 발전이 되면 스스로 행도 발전하게 되므로 그것은 바로 여러 사람들에게 다 좋은 일입니다. 그걸로 인해서 또 천차만별의 소임이 발전한다면 그 뒤에 발전을 못 하고 가는 사람들도 덩달아 다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못 먹고 굶주린다고 해서 나의 자부처를 탁탁 털어내 버리려고 애를 쓰지 마세요. 내가 과거에 그렇게 남을 못살게 해서 지금 못사는 거니까 그 뜻을 아시고 ‘그렇게 못살게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못살게 된 원인이 거기에 있으니까 내 탓이다. 수행해서 이걸 다 녹이리라.’ 하고선 모든 걸 거기다 놓아 나가야 하는 겁니다. 거기다 놓기만 하면 없어지는 겁니다. 조금도 에누리가 없거니와 조금도 허탕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이런 말을 하죠. 주인공에 놓고 진짜로 믿는다면은 거기서 보디가드도 돼 줄 수 있고 해결사도 돼 줄 수 있다구요. 해결사가 돼 준다고 해서 잔뜩 잘못해 놓은 거를 금새 없애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또한 다 녹이고 끈기 있게 나갈 수 있는 길을 인도하는 그런 위치에서 얘기하는 겁니다. 내가 대충대충 이렇게 말씀드렸는데 이것도 내가 한 게 없이 부처님께서 하신 거죠. 잘못한 거는 중생이 한 거고 잘한 거는 자기 자부처가 한 거니까, 허허허….
우리가 살면서 더불어 함께 도반으로서 모든 것을 이렇게 배우고 나간다면 요다음 생에 어떠한 차원으로 나와도 여러분이 낳아 놓은 자식들도 염주알 꿰지듯 따라서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잘못해도 같이 따라 들어가고 잘해도 같이 따라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내생이 따로 있고 현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얼마 안 가서 내생이 되고 현생이 됩니다. 그러니 거리가 멀지 않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도 변치 않고 주인공에다 모든 걸 몰아서 한도량에 한마음으로 넣고, 일체제불과 한마음이 돼서 우리가 결산을 본다면 크게 이룰 겁니다, 아마. 허공에 꽃이 피어서 그냥 비 내리듯 말입니다.
문
죄와 업을 녹이는 도리
저는 사회에 그릇된 죄를 지어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부처님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생활하던 중 스님의 법문을 접하게 되었고, 모든 것을 제 탓으로 여기며 무사히 출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에 돌아오고 나서 하고자 하는 일이 되지 않으면 “내가 죄가 많고 팔자가 사나워서 이런 고통을 겪는구나. 우리 집안 조상님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아서 남들처럼 쉽게 일어서지를 못하는구나!” 하며 자책 아닌 자책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수감시절 항상 수지독송했던 뜻으로 푼 천수경에는 “죄는 본래 자성 없고 마음 따라 일어나니 마음 만일 없어지면 죄업 또한 스러지네. 죄와 망심 모두 놓아 마음 모두 공하여야 이를 일러 이름하여 진실한 참회라 하네.”라고 쓰여 있던데, 저처럼 죄와 업이 많아서 저를 도와줄 부모도 없고 의지할 만한 사람도 없는 사람도 부처님의 말씀처럼 저의 근본자리에 맡겨놓기만 하면 죄와 업이 녹아지고, 장애 없이 하고자 하는 일을 어렵지 않게 해나가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
일체 만법이 나한테 부딪치고 돌아가는데 내가 공한 도리를 안다면, 내가 공했는데 업보가 어디에 붙나요? 상대도 공했고 나도 공했는데 어디에 업보가 붙고 인과가 붙느냐 이겁니다. 간단히 비유해 보면 알잖아요?
그러니까 전생이라는 걸 붙이지 말라 이거예요. 과거를 붙이지 말아라. 왜? 전생에 살던 습성을 내가 지금 현재에 가지고 있고 불성은 전생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건데 구태여 왜 그거를 업보다, 인과다 하느냐 이거죠. 그리고는 무슨 조상의 탓을 하질 않나, 또 부모가 어떻게 해서 자기가 잘못됐다고 자식들이 원망을 하는데 그런 사람을 보면 참 기가 막혀요.
아, 내가 낳기 이전도 조상이요, 부모가 낳기 이전도 조상인데 아니, 조상이 둘이냐는 겁니다. 부처 낳기 이전도 조상이요, 다 조상인데…. 그런데도 조상 탓을 한단 말입니다. 그래 어느 부처가, 어느 부모가 자식 잘못돼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런 법은 없어요, 그 뒷면의 뜻을 보면. 잘못돼서 내가 죽게 되고 부모로 인해서 죽게 됐다 하더라도 오히려 뜻으로는 고맙게 생각을 하고 부모를 속썩이는 게 안타까워서 울어야 할 것인데 왜 부모를 원망합니까.
업보가 있다고 한다면 소멸이 안돼요. 여러분의 마음이 진짜 중요한 겁니다. 그냥 생각을 하고 사느냐 한생각을 하고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내가 생각을 하면 나 혼자만 생각을 하는 게 아닙니다. 몸 속의 모든 생명들이 다 더불어 같이 해주기 때문에 생각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거를 알면 한생각이 되는 거고 그걸 모르면 그냥 생각이 되는 거죠.
그래서 과거 수많은 세월을 걸어오면서 습이 많아진 그 자체를 어떻게 단번에 소멸을 시킵니까. 참회를 아무리 해도 참회한 것이 도로 없어지고 또 다른 일을 저지르게 되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 안의 근본에 맡겨놓아라. 이 몸은 시자일 뿐이다. 심부름꾼일 뿐이다. 나의 원동력인 근본이 나를 움죽거리게 하고 보게 하고 듣게 하니 모든 거를 거기다가 맡겨라.” 하는 겁니다.
죄를 지었든지 안 지었든지 일거수일투족을 다 거기다가 맡기라는 겁니다. 왠 줄 아십니까? 살아오면서 물들은 습관과 업장이 너무 진하기 때문에 업장을 소멸시키는 데는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죠. 모든 걸 관하고 놓으면은 그 반면에 소멸이 되니까요. 소멸이 되니깐 이루어지는 겁니다. 소멸이 안되면은 그게 이루어지지 않죠.
그러니까 업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바로 업보라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못 벗어나는 겁니다. 다만 성장하는 수행 과정이지 업보가 아니에요. 누가 자기 잘 되려고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모르니까 그러는 거지. 자기가 모르니까 불어닥치는 일들이 고통스럽다고 하는 거지, 모든 걸 수행 과정으로 알면 힘이 들지 않아요, 남을 탓하고 원망하지 않게 되죠. 그러니까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아마도 사형선고를 받고 사는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사형선고에다가 무기 집행유예를 받고 한 계단 한 계단 조심스럽게 마지막 계단까지 가는 것입니다. 절더러 이런 말을 한다고 심하다고 하실 지 모르지만 그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신다면 아마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공부하는 길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깊은 정글 속을 지금 가는데 거기는 사자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또는 부딪치기만 하면 말아서 피를 빠는 풀들이나 나무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정글을 지나가야 대로(大路)가 나오는데 어떻게 거기에서 남을 탓하고 죄와 업을 탓하면서 정신을 팔 수 있겠습니까? 오직 가는 길, 어떠한 게 닥친다 하더라도 지금 걸어가는 길만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일체를 내 안의 근본에 맡겨놓고 지극하게 믿고 실천해 나가신다면 내 앞에 대로(大路)가 열릴 겁니다.
문
생활 속에서 도를 이루는 과정
『삶은 고가 아니다』라는 책을 통해서 스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또한 많은 것을 깨닫게 하는 진리를 이렇게 이해하기 쉽고 분명하게 보여주시니 정말 고마울 따름입니다. 스님들께서는 진리를 깨치기 위하여 몇 년씩 토굴에서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수도를 하신다는데 그런 과정을 책으로 보면서 일반 중생이 이 복잡하고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살면서 이생에 깨달음의 경지를 이루어 낼 수 있을까 두렵고, 도를 구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꼭 스님이 되어야 이생에 득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고승들의 득도 과정을 보면 실로 일반인들에게는 다른 세계로 보입니다. 근기의 문제이고 업의 문제이겠지만, 일반 중생도 견성을 하여 확철대오 할 수 있는지요. 그것이 생활 속에서도 가능한지요. 또 그것이 어렵다면 생활을 떠나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지요.
답
세속에서 공부를 한다 출가를 해서 승(僧)으로서 공부를 한다 하기 이전에, 내 마음의 근본을 계발하고 발견하려면 주인공 자리를 항시도 놓치지 말고 일체를 그 주처에서 한다는 것을, 또 주처에서 들이고 낸다는 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관을 통해서 주처에서, 한군데서 들이고 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바로 거기에다가 모든 것을 일임하니까 몽땅 놔버리는 게 되는 것입니다.
일체를 놔버리라고 했지만, 일체를 놓아버리면서도 여여하게 살라고 한 거지 여여하게 살지 말라고 한 게 아닙니다. 공했으니까 자기까지도 놔버리라고 하는 거죠. 주처에서만이 움죽거리게 하는 거니까 말입니다.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는다면 육체가 움죽거릴 수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몰락 놔버리라고 하는데 ‘몰락 놔버림을 받는 자는 누구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말로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진실로 주처를 알려면은 주처와 지금 현재의 내가 둘이 아닐 때에 비로소 자유인인 것입니다. 이거는 세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죠. 그럼으로써 이 세상의 생명, 유생 무생이 다 나 아님이 하나도 없을 때, 비로소 내 앞에 있는 인연들도 다, 그때는 자기 마음대로 건질 수가 있다 이 소리입니다. 물질로 건지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의 작용으로 건지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첫째, 속에서부터 내 스스로서 그것을 알고 바깥으로 나오고 바깥에서 들이고 내고 하는 데에 여여하게, 그대로 진실하게 들어가야 되지 않나, 진실하게 한다고 그래서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처음에 배울 때는 진실하게 할 양으로 노력을 해야지 노력 없이 관해서는 안됩니다. 관하는 것도 노력을 해야 되는 거죠.
장님이 지팡이 짚듯이 주인공을 잡고 그렇게 가다가 보면 눈을 뜨게 되니 지팡이는 저절로 둘이 아니게 되는 거죠. 그때는 지팡이를 짚지 않아도 다닐 수 있는 거죠. 그때가 돼야 하지마는, 하여튼 잡은 거조차도 없다고 할 때까지 그 지팡이를 쥐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마음 공부를 해서 깨달으려면 아주 투철하게 해야만 되고, 고가 따라야 공부가 된다 하는 것도 고정관념이에요. 그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그것도 놓으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걸 먹었으면 이것도 놔버리고 저것을 먹었으면 저것도 다 놔 버려야해요. 빈 깡통 들고 애쓰지 말고, 앞으로 올 것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먹고싶으면 먹고 목마르면 그냥 떠서 마시면 돼요. 그리곤 그냥 다 놔버려요. 하나하나 자기 주처에다 놔버리게 되면, 다 거기서 한다고 놔버리게 되면 톡톡한 게 오는 게 있어요. 그것은 자비의 칼이죠. 시퍼런 자비의 칼이 완벽하게 설 때가 있어요, 그때에 비로소 뜻이 같아지는 거죠.
그러니 열심히 해서 이 도리를 깨우쳐야 내가 하는 이 말이 이해가 갈 거예요. 그러니까 한번 해 봐요. 이 세상에 눈 가지고 코 가지고 남과 같이 태어나서 왜 못해요? 누가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하지 말래나요, 공부를 하지 말래나요, 돈을 벌지 말래나요?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말래나요, 나가 놀지를 말래나요. 다만 일체를 주처에서 한다는 걸 진짜로 믿고 들어가라 이겁니다.
그럼으로써 선(禪)이라는 자체는 내가 한다는 생각 자체도 없어야, 급하니까 빨리 해야지 하는 것도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면서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돼야 빨리 성장이 되는 것이고 홀연히 깨우칠 수 있는 것이지, 만약에 빨리 한다, 나는 이렇게 해야 한다, 하나서부터 열까지 한다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일을 하면서도 일을 한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고, 자면서도 잔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고, 보면서도 본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고, 들으면서도 듣는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고, 발로 딛고 다니면서도 다닌다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 가지 법을 손으로 주무르고 일을 했다 하더라도 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는 것이 바로 홀연히 깨우칠 수 있는 직접적인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이 맑으면 달이 나타나 보이지만 물이 흐리면 달은 숨어버리고 만다. 맑은 물을 따라 달이 오는 것이 아니고 흐린 물을 따라 달이 가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도 그와 같은 것이므로 마음이 청정하면 부처가 나타나지만 마음이 어두우면 부처가 보이지 않는다. 부처가 다른 곳에서 온 것도 아니요, 부처가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도 아니다. 모든 번뇌를 여의고 마음이 고요하여 맑고 청정하면 부처는 저절로 나타나고 육진의 도적을 막아내고 육근의 작용이 걸리지 않으면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청산은 말이 없고 유수는 터가 없는데 자연과 같이 마음이 정중하여 변하지 않으면 그 마음이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라고 써서 공부하는 데 지침이 되도록 했습니다.
이 뜻을 잘 음미해 보시면서 어떻게 해야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해야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도를 이룰 수 있는지 진실하게 생각해보시고, 내 근본을 지팡이 삼아 길 아닌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문
참다운 의정을 내려면
스님의 가르침을 삶의 지표로 삼아 생활하고 있는 청년 법우입니다. 이제는 마음공부에 대해서 조금 확고해지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생긴 것 같습니다. 생이 다하기 전에 확철대오 하고픈 마음은 간절하나 그 마음마저 근본 자리에 돌려놓고 스님께서 설법하신 법어집과 테이프, 그리고 매주 나오는 현대불교신문을 스님께서 직접 설법하시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믿고 지극한 마음으로 공부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부해 나가다가 의정을 내어야 한다는 스님의 법문을 보고 어떻게 하면 참다운 의정을 낼 수 있는지 궁금하여 질문을 올립니다. 하찮은 질문이다 여기지 마시고 가르침 주신다면 소중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답
의정이라는 것은 못 믿고 모르기 때문에 이게 뭘까 하고 들어가는데, 보이는 이 육신은 가아(假我)이고 진짜 자기는 깊은 내면 속에 들어 있다는 거를 알면 아는 대로 넘어서는 겁니다. 의정을 떠나서 넘어서는 거죠. 진짜 의정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진짜 자기와 가아 자기가 같이 만나서 공부할 때 그때 비로소 진짜 의정이 나오는 거죠. 무의 세계 광대무변한 거를 다 배우려니까, 알지도 못하고 그냥 의정을 내겠다고 해서 내는 거는 무모하기가 짝이 없고 내가 줄을 잡아타고서, 즉 말하자면 소 고삐를 잡고 피리를 불 때 그 피리소리가 얼마만치 가는지 되돌아오는지 그것도 알게 되는 거죠.
예전에 내가 공부할 때 먹지도 못해서 걸음을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간신히 엉금엉금 물 흐르는 데 기어가서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그게 배우는 일이죠. 나의 줄을 잡았으니까 거기서 가르치는 거죠. 그 물을 허덕거리면서 세 모금을 마시고 났는데 문뜩 생각이 나기를 ‘그 세 모금은 그대로 있느냐!’ 이 소리입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가르쳐 나가는데 그거는 뭐 대의정이라고 볼 수도 있는 거죠. 이거는 시공을 초월한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거든요. 그러니까 ‘네가 세 모금을 먹었어도 한 모금을 세 모금으로 대처할 수도 있느니라, 아홉 모금이 세 모금이 될 수도 있고 한 모금이 될 수도 있고 한 모금이 한 모금도 아닐 수도 있다.’ 이거죠.
그러니까 그런 데서 의정이 있는 거지. 이거는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의정이 있는 거죠. 순간 그런 것뿐이 아니에요. 이제 나투는 방법과 어떻게 해서 마음이 하나뿐이 아니라 수만 개의 분자로 화해가지고 입자로 화해서 보살로서의 응신이 될 수 있을까 할 때, 나툴 때 그렇게 의정이 날 수가 없더라구요.
그런데 지금은 의정을 낼 게 하나도 없이 무조건이죠. 무조건! 무조건 대문을 탁 치고, 있다면 대답하라고 하는 거죠. 무조건 맡기고 말입니다.
갓 태어난 어린애들이 아장아장 걸음을 걸을 때에 무조건 걷기 때문에 낭떠러지가 있다고 해도 모르고 그냥 팔딱팔딱 뛰어가죠. 근데 반드시 애들 앞에는 어른이 지켜보고 있어요. 지금 우리의 자성 부처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거와 같다고 할 수 있죠. 어린아이들이 어디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하고 부모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낭떠러지가 생기면 무조건 딱 붙잡는 거예요. 붙잡아서 낭떠러지가 없는 데로 데려다 놓는 거죠. 이거를 진짜로 믿어야 해요. 그러니까 어디 떨어질까 봐 걱정하지 말고 무조건, 아버지는 대문 없는 대문 안에 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꼭 찾아야 되겠다 하는 격이나 마찬가지죠. 그렇게 우리가 정진하면서 배우는 겁니다.
화엄경에도 그렇게 쓰여 있어요. 부처님의 곳처는 어디에다 두었는가. 또 사람들이 배우는 과정을 어디에다가 이름을 뒀는가, 명칭은 어떻게 정하는가. 그러나 그것을 이렇게 한 건지 저렇게 한 건지 봐도 모를 거예요. 그냥 글자로만 풀이를 해놨으니까 그 속에 숨어 있는 뜻을 모를 겁니다. 그렇게 심오하게 말씀하셨는데도 말입니다. 글을 떠나서 써 놓을 수 없기 때문에 글을 떠나지 않고 그 뜻을 표현하려고 하니까 어떤 때는 몇 자가 더 적어진 곳이 있어요.
『한마음요전』이나 『허공을 걷는 길』도 한 달에 한 번씩 얘기해 놓은 것을 편집한 건데, 한 달에 한 번씩 나오는 비디오도 있고 또 일주일에 한 번씩 나오는 현대불교 신문도 있으니까, 근데 죽은 글이 있는가 하면 산 글이 있어요. 살아있는 글에서는 샘물이 나오지만 죽은 글에서는 샘물이 나오지를 않죠. 아무리 읽어도 물리가 터지지 않습니다. 이론으로만 편집이 되어있기 때문이죠. 무한량으로 에너지가 거기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배우는 모든 사람들이 증득하기를 바래요. 이건 내 개별적인 마음이 아니고 개별적인 말이 아니에요. 그건 포괄된 여래의 법이므로 나는 입만 빌렸을 뿐이에요.
그러니 자꾸 넓게 펼쳐 나가도록 하세요. 아무리 광대한 법이라고 해도 적은 그릇에다 자꾸 퍼부어 봤자 흐르기만 할 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우선적으로 그릇을 크게 만들면서 바다를 집어삼킬 수 있게끔 열심히 해나가세요.
문
제사 꼭 지내야 하는지?
조상님의 제사는 꼭 지내야 하는 것인가요? 저의 큰 형님은 교회를 가니까 제사를 소홀히 하고, 둘째 형님네 부부는 사네 마네 하고 있고, 누나들은 세째인 저한테 제사를 모셨으면 하고 이야기를 하지만 저도 집사람한테 이야기하기가 면목이 서지 않아서요.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괜찮던데 꼭 지내야만 하는 것인가요?
답
우리 신도님들은 집에서 제사를 지낼 때 우주 떡하고 과일 세 가지, 향과 초를 켜고 흰 꽃과 큰그릇에 물 한 그릇 떠놓고 지내라고 일러줍니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방편으로 말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안되니까요.
그런데 왜 꼭 해야만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건 아래 자손들이 부모님의 은혜를 알게 하는 교훈도 되고,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그 영혼이 하나는 태어나고 하나는 있고 하나는 돌아다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때 삼혼묘묘귀하처(三魂杳杳歸何處)라고 하지 않습니까. 근데 조상이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죠. '이 괘씸한 놈' 그러고는 뒤돌아서서 아마 휘적휘적 갈 거예요.
절을 한다 안 한다 이걸 떠나서 사람이 자기가 고개를 숙일 줄 모르면 자기가 자기를 승화시킬 수가 없어요. 자기가 자기를 고개 숙이게 할 줄 알아야만 된단 얘기죠. 벼이삭도 익으면 고개가 숙여지듯이 사람이 권리가 주어지면 고개를 숙여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아래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잊지 않고 꼭 챙겨야 하는 겁니다. 쓸데없는 게 아니에요.
이런 얘기가 있어요. 어느 어머니가 슬하에 외아들을 두었는데 그 외아들이 그만 죽었어요. 근데 그 어머니가 타파가 되도록 아들의 제사를 지내주었어요. 그런데 그 아들이 다른 집에 가서 태어났어요. 어머니가 그렇게 지극하게 하시니까 좋은 데로 태어나서 사는데, 꼭 어느 날짜만 되면은 꿈에 자기가 어느 집을 찾아가서 제사 밥을 먹고 오는 거예요. 그러니깐 참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일년에 한번씩은 꼭 어느 집으로 찾아가서 제사 밥을 먹고 오는데, 그 집에는 하얗게 머리가 센 노파가 앉아서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는 거예요.
그러다 하루는 어느 스님이 오셨기에 그 일에 대해서 물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분은 바로 너를 낳아주신 전생에서의 어머니다. 그러니까 꿈에 갔던 길을 찾아가서 그 집에 가봐라.’ 하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말 찾아서, 몇 해를 두고 항상 다녔으니까 그 길을 잘 알죠, 꿈에 다녔으니까. 그래서 찾아가니까 정말 그런 오두막집이 있는 거죠. 그래서 들어가 보니까 제사 상을 차려놓고 정말 그 노파가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날 현생의 자기 집에 가서 얘기를 했어요. 그리고는 그 전생의 어머니를 모셔다가 현생의 어머니와 함께 두 어머니를 섬겼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게 없는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태어나서 산다 하더라도 우리가 잘 살아야 되겠죠, 사람답게. 그러니까 제사를 잘 지내드려야만 된다. 그래야만이 그 밑으로도 잘 될 수가 있다 이런 겁니다. 그 어머니가 외아들이라고 얼마나 정성스럽게 했으면 좋은 집에 가서 태어났겠어요. 또 자기가 과거의 어머니로서 그 자식의 현재 어머니와 같이 살았겠어요. 그러니 여러분도 부모가 주신 이 모습을 아주 은혜롭게 항상 생각하시고 사세요.
그래서 신도님들이 오시면 제사 잘 지내느냐는 말도 하고 천도재는 지냈느냐, 얽히고 설킨 거를 다 편안하게 활연하시게 했느냐 얘기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떤 신도님네는 한 쪽은 기독교를 믿고 한 쪽은 불교를 믿는데 불교 믿는 식구는 한 사람이고 기독교 믿는 식구는 여러 사람이 되니까 우겨서 제사를 추도식으로 지낸대요. 근데 하나도 마음에 담기는 게 없기 때문에 조상들이 어디다가 몸을 의지하고 좋아질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 한 거나 안 한 거나 마찬가지지 않겠습니까.
어떤 신도님네는 다른 종교를 믿는 형제들이 추도식을 했다는데 가만히 보니까 부모의 영혼들은 가지를 않았어요. 가지 않고 여기 다니는 막내 아드님한테 따라오셨더라고요. 거길 안 가고. 참 이거 혼란스러운 일이지만 이게 사실이라는 거를 아셔야 합니다. 그런 걸 보고 다 끝내고서 돌아서서 나갈 때 다 무너지는 거 같아요. 내 몸이 말이에요. 그러니 안 보인다고 무시하지 마시고, 다른 형제들이 못 지내는 형편이면 지낼 수 있는 자식이 소박하더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지내 드리는 게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