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그릇된 행동을 볼 때‘옛날 내 모습’으로 보세요
진짜로 믿는다면 되고 안 되고도 놓으세요
▲스님: 여러분에게 오계를 설하겠습니다.
첫째, 불살생계이니 일체를 내 생명과 같이 생각하며 내 몸과 같이 아끼겠습니까?
▲대중 : 아끼겠습니다.
둘째, 불투도계이니 일체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며 항상 베푸는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대중 : 가지겠습니다.
셋째, 불사음계이니 일체 삿된 마음과 음심을 버리고 항시 마음을 청정하게 하겠습니까?
▲대중 : 청정하게 하겠습니다.
넷째, 불망어계이니 일체 거짓말을 하지말고 입을 조심하여 항상 진실되게 살겠습니까?
▲대중 : 진실되게 살겠습니다.
다섯째, 불음주계이니 절대로 술을 과음하지 말며 자기와 남을 위하여 분수를 지키겠습니까?
▲대중 :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수계를 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얘기해 드릴 게 있습니다. 신도님들이 수계를 언제 받았다 언제 받았다 하는 거를, 수계첩은 버리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죽기 직전에 물 한 동이 떠놓고 왼손으로 들고 왼쪽으로 세 번 돌리고 네 번째, 즉 말하자면은 ‘두루 한도량에 전달이 되게 하소서.’ 하고 주인공에 관하고선 태우시는 겁니다. 열 장이 됐든지 스무 장이 됐든지 단 한 장이 됐든지 말입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은, 그렇게 함으로써 도리천에 모든 게 통신이 돼서 거기서 다 차원이 주어져 갑니다. 그러니 그 한 장 한 장이 얼마나 귀중한 건지 모릅니다. 그것은 그냥 글자만이 아니라, 이름만 불러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뿌리와 더불어 결부가 돼서 하는 거니까, 일체제불의 마음과 더불어 한마음으로서 결부가 되고 일체 만물만생과도 더불어 같이 결부가 되는 거기 때문에 그렇게 귀중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한 철 살다가 이 모습을 없애고 다시 또 옵니다. 그리고 또 그 모습을 다시 진화시키고 변화시켜서 다시 형성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은 상(上)세계의 차원이 주어집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모습을, 이 생명의 모습을 타고나지 않아도 될 수 있게끔 되는 것이죠. 왜, 은비까비라는 만화 보셨죠? 비슷하지만 그렇게 남들을 구제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고 내가 나타나게 하려면 나타나게 하고, 또 나타나서 안 될 일이라면 안 되게 하고 그럴 겁니다.
모든 생명들을 위해서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 위로는 부처님의 한마음으로 인해서 모든 거를 해 나가신다면 우리가 꼭 성공할 겁니다. 그래서 작년에 수계를 받았는데 뭘 또 하나 이러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하나하나 자기가 한 것이 자기한테 모두 연관이 돼서 돌아갑니다. 그러고 재차 말하지마는 이것은 정신계와 물질계가 혼합해서 같이, 공법으로써 말씀하신 거기 때문에, 평등공법으로서 말입니다. 평등공법으로 말씀하신 거기 때문에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입을 빌렸을 뿐이에요. 그러니 여러분이 잘 알아들으시고 지키시기 바랍니다.
한마디 또 할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해서 한 철 살다가 죽으면은, 항상 그런 말을 하지만 우리는 상(上)세계의 차원이 되느냐, 하(下)세계의 차원이 되느냐, 중(中)세계의 차원이 되느냐 하는 게 문제입니다. 이 중세계란 상세계와 하세계의 교차로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떠한 행동을 하고 어떻게 사는가를, 그것을 누가 봐서 점수를 매기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해 놓은 것이 자기에게 자동적으로 입력이 되는 겁니다.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정수, 누구나가 다 정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 정수에까지 도달한 사람은 그냥 자동적으로 변화해서 돌아가지만, 주장자를 쥐지 않고는 대뇌와 육신 속의 생명들과 통신이 되지 않습니다. 대뇌하고 정신계 또는 물질계, 이 몸 속에 있는 모든 생명들의 의식들이 다 한데 합쳐지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합치게 하기 위해서 일거수 일투족을 다 거기다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일체를 다 놓게 되면 정말, 즉 수억겁을 통해서 자기가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되고 형성되고, 진화되고 형성되면서 수 없는 그 세월을 거듭거듭 태어나면서 사람까지 왔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부처님께서는 내 부모 네 부모가 따로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 자식 네 자식이 따로 없고, 내 생명 남의 생명이 따로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나의 부모요 나의 자식이요, 나의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따로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 마음 내 모습 내 형제, 바로 부처님의 법이 우리들의 법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차원이 진짜로, 진짜가 아니면은 어떡하겠습니까?
우리가 종교를 떠나서, 종교를 떠나서 우리는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상대가 있는 거고 상대가 있으니까 내가 있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나서 종교를 믿으니까 그렇다고 하지 마세요. 첫째, 내가 나왔기 때문에 세상이 벌어졌고 상대가 있고 부처님법도 있는 것이고 진리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진정코 내 종자의 뿌리를 믿지 않으면 모든 게 도깨비장난 같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거, 내 주처의 불성을 진짜로 믿어야겠다는 거를 생각해야 합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나무들도 자기 뿌리가 없이 그렇게 열매가 열리고 꽃이 피는 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아서,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그러고 편안하고, 진실한 믿음으로 인해서 편안하다면 그것은 당신의 원력이, 예를 들어서 하늘이 무너지는데 손가락 하나로 받쳐서 모든 사람들을 다 살렸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니 평등공법에서 나오는 원력이 얼마나 광대무변하고 묘법이고 얼마나 보배력이 당당한지 모릅니다. 그거를 얘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쭉 말했죠?
그런데 말입니다. 진짜로 지금 얘기한 대로 믿고, 이 세상에 없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모두 있는 걸 말하는 겁니다. 진짜로 관하면 대뇌를 통해서 사대(四大)로 통신이 됩니다. 그건 진짜로 믿으셔야 될 겁니다. 사람 사는 것도 모두가 과학이니까요. 그래서 사대로 통신이 돼서 모든 맡은 소임자가 다 연락을 받는다 이겁니다. 그럼 통일해서 모든 것을, 적은 거는 채우고 많은 거는 덜고 해서 고르게 작용을 해 준다면 몸이 튼튼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 가지고 어디로 올라가느냐 하면 정수의 자동적인 컴퓨터로 올라갑니다. 거기에 입력이 되는 거예요. 입력이 안 되면 어저께도 생각 못하고 오늘도 생각 못하고 내일도 생각 못합니다. 그렇게 입력이 돼서 현실에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관습에 젖어서 항상 기복으로 한다든가 또는 바깥으로 끄달린다든가, 바깥의 형상과 이름을 보고 기도를 한다든가 해서는 안되는 거죠. 거기 연관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진짜로 믿고 하면은 앞서 입력된 업이라든가 유전성이라든가 영계성이라든가 세균성이라든가 업보성이라든가 인과성이 모두 삭제가 되는 거죠. 앞서의 입력된 것이 없어지면서 새로이 입력이 들어가니까요. 그 구녘에서 업을 제하지 않으면은 딴 구녘에서는 할 수가 없어요. 내가 나온 구녘에다가 바로 즉시 입력을 해야 그 구녘으로 들고남이 없이 들고나니까요.
그래서 수계를 받고도 한 번 받아, 두 번 받아, 세 번 받아, 받는 사람들은 마음이 제각각이겠죠. 허나 이것도 마음의 정성이죠. 그래서 보이는 거는 계첩이지만 안 보이는 거는 송두리째 다 입력이 돼서 올라가거든요. 여러분이 몇 번 받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올라가는 겁니다. 그런데다 더군다나 가시기 전에 그렇게 하면 지금 말로 그게 바로 빽이라고 할 수 있죠. 크나큰 빽을 얻는다는 얘기죠. ‘이렇게 정성스럽게 했으니 너에게 무엇을 주랴.’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하나 하나를 전부 소중하게 생각하세요. 나는 길을 지나가다가 보이는 돌을 봐도 소중하고 나무 한 뿌리를 봐도 소중한 생각이 듭니다. 왜,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내 어찌 공부를 했을까 하는 그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모두가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그러니 전부 내 스승 아닌 게 없고 내 형제 아닌 게 없고, 내 부모 아닌 게 없고 내 자식 아닌 게 없고, 모두 내 모습 아닌 게 없고 내 마음 아닌 게 없고, 그래서 공생·공심·공체·공용·공식으로서 진리는 끝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는 본래 평등공법으로서 걸림 없이 나의 주장자를 쥐고 여여하게 가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 소리를 마음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마 알아 듣지 못하게끔 돼 있거든요. 우리가 살아나가는데, 여러분한테 수차에 말씀드렸지만 고정되게 보고 고정되게 듣고, 고정되게 말하고 고정되게 만나고, 고정되게 가고 오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일상 생활에 움죽거리는 게 고정된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뜸을 들수계는 각자 마음의 뿌리와 함께 이고 있어요, 아시라고. 여러분이 길을 걸어갈 때에 항상 발자죽을 남기는가 하면 발자죽을 남기지 않고 한 발 떼어놓으면 한 발 없어지는 채로 그냥 떼어 놓습니다. 사실이죠?
▲대중: 예.
▲스님: 그런 거와 같이, 지금 지구가 초월해서 돌아가듯이 우리도 그렇게, 이거 보면 저거 봐야 하고, 이 소리를 들으면 금방 다른 소리를 들어야 하고 연방, 연방 이렇게 공해서 돌아가는 이 자체를 여러분의 마음이 관습에 의해서 의식을 갖고선 그거를 쥐고 오히려 매달려서 놓지 않기 때문에 업이 생기는 거고 고가 생기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지구가 쉴 사이 없이 빛보다 더 빨리 돌아가고 있는데 거기에 병이 붙을 게 뭐 있으며, 업이 붙을 게 뭐 있으며 유전성이 붙을 게 뭐 있으며 생사에 걸릴 게 뭐이 있겠습니까?
삼천 년 전 진리와 지금 현재의 진리와 다른 게 하나도 없고 시대가 변하는 대로 우리는 발전해 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때의 용어와 지금 용어가 다르구요. 다르지 않으면은 지금 세상 사람들은 모르니까요. 그래서 연방연방 그렇게 돌아가는 그 자체가 어디 여러분의 그릇에 담길 게 있어서 업이 됩니까? 한 발짝 떼어놓으면 한 발짝 없어지듯 인생살이가 다 그러한데 어디 그렇게, 업보를 담는 그릇이 따로 있어서 업보가 되고 유전성이 되는 겁니까? 단, 여러분의 마음이 ‘나는 이거 못해. 저거는 할 수 있어.’ 이렇게 분별하면서 반복해서 길을 걷기 때문에 그렇죠. 우리가 지금 사는 게 길을 걸어가고 있는 셈이에요. 끝없이 말이에요.
그러니 부처님께서도 이 중세계에서, 제일 첫번째 문제는 ‘네가 이 세상에 나온 줄 알아라. 네가 나온 줄을 안다면 수 억겁으로 통해서 너를 진화시키고 형성시킨 너를 보배로 삼아라. 너부터 알아야 상대를 알고 상대를 알아야 하나로 돌아가는 원리를 알 수 있느니라.’ 하셨는데, 여러분은 봤으면 자기가 봤다고 그러지 바람처럼 도망갔단 말은 안해요. ‘내가 오늘 아무개를 보고 왔는데.’ 이러거든요? 한 발짝 떼어놓고 왔다고 하는 거나 똑같죠. 한 발짝 떼어놓고, 놨으면 또 떼어놓게 되죠? 연방 바람처럼 구름처럼 흘러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흘러가는 도리를, 아주 흥겨운 도리를 모르고 항상 집착에 잠겨있고 관습에 잠겨있고, 또 어떤 사람은 부적을 해야 삼재가 안 생기고 애고가 안 생긴다고 그러고, 또 어떤 사람은 이사를 가는데도 부적을 하고 날짜를 봐야 한다고 하는데, 가뜩이나 여러분이 살기가 허득허득한데 거기에다 덧붙여서 그런 걱정까지 하면서 살게 돼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이게! 그런 문제가 어디 한두 가지입니까?
그거를 몽땅 다 놓는다면 하늘을 보고 허허 웃어도 그냥 공법이고 평등하고 여여하게 살 수 있고, 사는 게 그렇게 여여하다는 걸 아신다면 모두 갖추어 있는 것도 알게 돼요. 갖추어져 있는 거를 알게 되면은 헤아릴 수 없는 만법을 들이고 내는 데도 손색이 없게 되는 거죠. 이렇게 흐뭇하고 묘하고, 자기의 보배 구슬이 자기한테 제가끔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거를 써먹지 못하는 거예요. 마음이 가난하니깐 삶도 가난하구요. 혼자 무거운 거를 들려니 들어지지가 않죠. 그래서 부처님께선 안과 밖을 조복을 받으라고 하신 겁니다. 내 몸 안에 있는 생명들도 흡수해서 나로 만들고, 바깥의 것도 흡수해서 나로 만들고, 그러기 때문에 안과 밖을 둘 아니게 조복 받으라고 하는 소리죠. 그러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항상, 더 묘한 거는 자동적으로 정수에 물을 붓는다고 하죠? 부처님의 말씀이. 그런데 깨우친 사람에 의해서만이 그런 것도 아닙니다. 내가 주장자를 딱 쥐고 나가는 데는 항상 통신이 돼서 대뇌를 통해서 사대로 통신이 돼서 사대에서 통신이 되면서 바로 정수에 자동적인 컴퓨터에 입력이 되게 돼 있거든요. 그러니 이 진리가 심성과학이 아니고 뭡니까? 꼭 연구해서 어떻게 내는 것만이 아니라 말없이 묵묵히, 농사를 지어서 밥을 해내는 것도 과학입니다. 꼭 어떤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러니 일거수일투족이 다 심성과학이며 진리이며 여러분 앞에 보배가 있는 것이며, 그 보배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편리하게, 지금 세상에 내가 잘 살아야 요 다음 세상이 있는 거지 내가 지금 편안하게 살 수 없다면, 살지 못한다면 요 다음 세상도 그러하다 이겁니다.
그래서 과거도 오늘 볼 줄 알아야 하고 미래도 오늘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행동과 삶음, 또는 진실, 지혜로써 모든 거를 내 마음 내 모습 아님이 없이, 내 아픔 아님이 없이, 남이 아무리 벌레 짓을 하고 짐승같이 굴더라도 ‘저놈 짐승이야.’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나도 전자에 모를 때에 저런 모습으로 행을 했겠지. 옛날의 내 모습 같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라 이겁니다. 그래야 그쪽에까지도 불이 들어올 수 있어요. 짐승 같은 놈이라고 마음으로 욕을 하거나 비난을 한다면 그 줄이 딱 끊어지고 말거든요.
그래서 모든 거를 알고 본다면 여러분 육신 속에 수억겁을 진화해서 형성된 장본인들이 증명하기 위해서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걸 아신다면 우리가 한바탕 껄껄 웃게되죠. “참, 모두가 말은 할 수 없으나 너무 말을 할 게 많아서 말 할 게 없구나,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하고 껄껄 웃을 거예요. 사람 살아나가는 게 우연히도 없고 또는 누가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뺏어 가는 것도 아니고, 자기만이 자기를 편안하게 해 줄 수 있고, 자기만이 자기의 보디가드가 돼 줄 수 있고, 자기만이 자기의 해결사가 돼 줄 수 있고, 자기만이 자기의 의사가 돼 줄 수 있으니까요, 모두가.
요즘 가만히 보면은 위암이나 간암에 걸려서 앓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 좀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는데 생각을 안 하고 그냥 덤벙덤벙해요. 병원에 가서 수술을 안 한 사람하고 한 사람하고 보니까, 안 한 사람은 편안하게 그냥 살구요, 지금도 살고 있고, 수술을 한 사람은 그냥 죽도록 머리가 빠지고 구역질을 하고 그렇게 고생하다가 결국 나중에는, 이왕 죽을 거라면 왜 그렇게 죽습니까? 이것도 내 생각인지는 몰라도요.
그러니까 나를 버리는 사람은 그렇게 죽지 않을 거예요. 나의 모든 것을 조복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안에서 같이 울면서 작용을 해 준다는 사실을 꼭 아셔야 됩니다. 그래도 어떤 사람은 간절하게 믿지 않아도 어느 정도 주인공 주장자를 쥐고 나가면서, 만약에 병원에 가서 무슨 뭘 보는 거 뭐라 그러죠? 머리 빠지고 그러는 거, 방사선 치료. 방사선 치료를 하더라도 마음도리를 쥐고 가는 사람은 구역질도 안 나고 편안하게 받았다고 하는 소리를 무수히 들었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구역질을 하고 그렇게 고통을 받는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머리가 하나도 안 빠졌대요.
그게 어디입니까? 내가 삶음을 살아나가는데 한 발짝 한 발짝 떼어놓는 대로 자기의 주인공이 지켜주고 해결사가 돼 주고, 또 모든 걸 보호해 주고 나가니까, 자기의 보현신이란 말입니다. 이 몸 속에 있는 생명체들이 조복을 받았기 때문에 화해서 바로 보현신으로 나툰다는 얘기죠. 생략해서 지금 현재 말로 한다면, 여러분의 원자에서 입자가 나가서 보호하는 거나 똑같다고 말할 수 있죠.
그러니까 불교에 입문해서 다닌다, 또 다른 종교에 입교해서 다닌다 이거를 딱 떠나세요. 이 마음공부란, 갓난 어린애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응애’ 하고 우는 겁니다. ‘응애’ 하고 울기 때문에 상대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무궁무진하고 광대무변하고 묘한 진리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 진리 안에 모든 생활이 있으니 이게 심성과학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예수님도 그랬고 부처님도 그랬고, 자신을 믿지 않고 타인을 믿거나 타의의 이름과 형상을 믿는다면 도깨비장난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거는 다 똑 같이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예수는 자기를 가리키면서 말을 했기 때문에 고만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 하나로 몰려들었지만 그렇게 몰려들고 보니깐 갈 길이 막혔죠.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각자, 네 나무는 네 뿌리부터 보아라. 각자 네 나무는 네 뿌리부터 믿고 찾아야 공덕이 있지 만약에 타의의 형상과 이름을 믿고 기도를 한다면 그 또한 도깨비 같고 귀신 같느니라.” 그런 짓을 한다 이거죠. 그랬으니 우리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만사가 있는 거지 우리가 없다면 무효라는 거죠.
하여튼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이치를 알아서 혹은 지구를 한 손으로 들든지 반쪽 손으로 들든지, 한 손가락으로 들든지 두 손가락으로 들든지, 들어야 지구의 수명도 길어지고 더 넓혀서 우리가 나누어서 살 수도 있는 그런 계기가 생기고, 또는 생명이 안 산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에요. 다 꽉 찼어요, 생명들이요.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안 산다고 그러죠. 우리가 지구에서 사는 것처럼, 즉 말하자면 모든 혹성에서, 다는 아니겠지만 상세계에 이르지 않았겠습니까? 화성에도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꽉 차 있는 걸요. 그 모두가 살아나가는 모습이 다르고….
우리가 먹으면 똥 누죠? 자야 낮에 일을 하죠? 그것은 가운데 배 끈을 매야 되죠? 그래서 중세계예요. 우리가 나타나려면 그냥 나타나고 또 정원을 만들어서 거기서 즐기다가 떠날 때는 없어지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상세계로 지도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지금까지도 가르치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옥과 천당이 따로 없어요. 우리는 발로 땅을 딛고 다니듯이 땅속에 묻혀서 살고 있는 것도 있고, 질척한 데서 살고 있는 것도 있고, 알로 낳는 것도 있고, 태로 낳는 것도 있고, 모두가 차원에 따라서 차례 차례로 자기 삶이 주어져 있죠. 그래서 우리가 이 공부를 안 하면은 지금 주어진 채로, 더하면 하천세계로 떨어지고, 더 좋게 되면 상천세계로 올라가고, 이렇게 자기의 차원을 자기가 만들어 나가는 거지 남이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요.
어떤 때는요, 길을 가다가 다리를 못쓰는 사람을 쳐다보는 순간, 날은 추운데 손은 제대로 못 쓰고 한발한발 떼어놓으려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런데 바람은 불고 눈이 들이치고 그러는데 그 한 고개를 넘어가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다리를 제대로 떼어놓을 수가 없는데. 여러분이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겠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어떻게 해야 좀 그 사람이 쉽게 가게끔 할 수 있는지 말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조그만 일이 아니죠. 큰 일이 따로 없고 조그만 일이 따로 없어요. 어떻게 생각을 하세요? 어떻게 해야 빠르겠습니까? 아, 왜 대답을 안 하세요? 어떻게 해야 빠르겠습니까?
▲신도1: 주인공에다 관하면 안 됩니까?
▲스님: 하하하. 여러분이 ‘관(觀)이다’ 하면 그 관하는 속에, 마음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용도가 나와요. 보이는 대로 용도가 달라지죠. 저걸 보면 저것대로 달라지고 이것을 보면 이것대로 달라지죠. 그러니까 관하는 그 한마음 속에는 헤아릴 수도 없는 크고 작은 게 용도에 따라 나온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그런 용도에는 어떻게 써야 되겠느냐는 얘기죠.
▲신도2: 그 사람과 저하고 둘이 아니니까 한자리가 돼서 잘 가게끔 이끌라고 마음자리에 관하는 거죠.
▲스님: 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지혜를 좀 내지! 예를 들어서 그렇게 갈 수 있다면, 내가 이런 경험을 많이 해요. 가까운 어느 집의 사람을 끌어내요. 그러니까 그 속에 내가 들어가면 그 몸이 오지 않겠소? 쏜살같이 와서 ‘어유, 추운데 어떻게 가시냐’ 그러면서 여길 끼고 그냥 가더라구요. 언젠가 한번 또 여기 와서요, 저 아래 건물을 안 지었을 때 얘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술에 잔뜩 취해 가지고 엎드려서 오줌을 싸서 그게 얼어버린 거예요, 보니까. 들창을 열고 내다보니까 그냥 얼어붙었어요. 그런데 뗄려고 하니 떼져요, 그게? 흔들흔들 하면서 일어나질 못하는 거죠. 눈도 뜨지 못하고. 그럴 때 얼른, 예전부터 그런 때는 묘안이 생기더군요. 옆 집에 있는 누구라도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여러분한테 얘길 하려니까 이런 얘기까지 하는 거예요.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급하니까.
그런데 웬 두 사람이 저 위에서 내려오더니만 왜 그쪽을 봅니까, 또? 하하, 보더니 그 사람이 흔들흔들 하니까, 저 사람 어떻게 됐나 그러고선 둘이 와서 그냥 그 얼은 거를, 오줌을 싸서 얼은 거를 떼어 가지고 둘이서 번갈아 가면서 들쳐업고는 주머니에서 뭐를 꺼내서 보더니만 ‘이 집으로 가면 되겠구나.’ 하면서 가는 걸 보고 문을 닫았어요.
사람사람이 어느 사람 쳐놓고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아무리 돈이 많아서 잘산다고 하더라도 인생파도는 파도대로 치니까요. 그런데 그 파도가요, 아주 묘한 거죠. 파도가 치지 않고 소용돌이가 치지 않는다면 물밑의 생명들이 살 수가 없어요, 또. 그러기 때문에 양면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 파도가 치고 소용돌이가 친다는 것을 아셔야 돼요. 그리고 우리 몸이, 몸이 배와 같은 거죠. 이 몸이 배라면 뱃속의 많은 생명들을 중생으로 비유한다면 선장은 누구겠습니까? 여러분의 주인공 주장자죠? 그럼 선장이 몸인 배를 끌고 가는데 의식들이 그냥 이리 왈 저리 왈 끄달리고 온통 이리로 저리로 끄달리면서 죽겠느니 살겠느니 이러고 온통 난리들을 친다면 배가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이 몸이 흔들려서 죽도 밥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거죠. 선장이 어떻게 할 수가 없이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내 항상 주인공에다 진짜로 믿고 맡겼으면 그대로 믿고 맡기라고 합니다. 진짜로 믿는다면 다 버리는 게 믿는 거다. 다 버리지 않고는 거기다 맡겨놓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진짜 믿는다면, 진짜 자기라면 그렇게 맡기라는 겁니다. 그러고 죽는 것도 네 법이고 사는 것도 네 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속에서 자기 주인공이 껄껄 웃으면 자기도 좇아서 껄껄 웃게 되는 거예요.
색경을 한번 보세요. 색경을 보면서 손을 들거나 또는 눈을 흘기거나 그러면 똑같이 따라서 그런 모습이 보이죠? 우리가 지금 현실에 색경을 보는 육신이 자기라면은 그렇게 색경을 보고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그 그림자 같은 것이 바로 우리 육신이에요. 여러분 앞에 이렇게 목마르게 가르쳐 드리는데도 이 뜻을 모르신다면 아니 되죠. 그래서 하나하나 지금, 이것도 그냥 돌아가고 있거든요. 이것도 돌아가고 있구요. 지금 내 말도 돌아가고 있어요. 머물러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화엄경에 ‘머물러서 있다’ 이렇게 말하는 거를 ‘머물러 찰라찰라 화해서 나툰다’ 이렇게 해야 원칙이죠. 머무른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좌선이라든가 입선이라든가 행선, 또는 와선이 드러눕고 앉았고 섰고 일하고, 이러는 것이 몽땅 다 끊어지지 않고 참선이 돼야 되겠죠? 그러니까 끊어지지 않는 것이 그거예요. 네 개의 참선이 하나의 참선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여기 한도량에 이렇게 앉아 있어도 여러분보다도 더 곱쟁이, 여러분의 곱쟁이가 내면으로 듣고 있으니까요. 여러분 지금 혼자만, 이 껍데기 나만 듣고 있는 게 아니라 본래 자부처들이 듣고 있어요. 그 참, 볼 수만 있다면 멋지죠. 하하하.
하여튼 오늘은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그러고 연비를 받는 것이 보기에는 우스울지 모르지만, 이건 부처님 한도량에서 내려서, 오방천으로 하여금 사방천에서 모두 여러분을 응시하면서 찍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지금 육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크라고 합시다. 이 표를 가지지 않으면, 지금 말로 청와대에 못 들어간다 하는 그런 표시, 마크다 이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몸을 버리고 가도‘너는 모습을 어떻게 가지고 나가려느냐, 상대방한테 물어보고 삶의 권리는 얼마나 가지고 나가려느냐.’ 하는 거죠, 자기 원대로. 그러고 ‘어떠한 자식이 너한테 필요하다고 보느냐’ 하고, 다 자기 스스로가 알게 해서 스스로 받아 가지고 나오게끔 돼 있거든요. 그러면 ‘나는 다시는 생명으로 받지를 않겠소’ 한다면 ‘그럼 넌 천상으로 가거라’ 이럴 테죠.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