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가때 인연도 불연으로 승화
행자때 신심 간직…늘 젊은 스님
재가불자들이나 세속의 사람들은 출가스님들의 삶이 무척 외롭고 쓸쓸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피붙이 가족과 친지를 떠나 평생 홀로살기로 서원하고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깊은 산속 수행승의 이미지가 각인된 까닭일 것이다. 하지만 스님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남들 생각처럼 그렇게 외롭고 쓸쓸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출가는 단절과 고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재출발이 본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산해서 행자생활을 할 때부터 도반이 생기고, 강원과 선원 생활을 통해서 뜻을 함께하고 의지가 되어주는 좋은 벗들을 만날 수 있다.
수암스님은 나의 행자도반이다. 입산해 아직 머리도 깎지 못하고 부엌일을 거들며 행자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을 때였다. 해질녘에 새로운 행자가 왔다고 하여 가보니 두꺼운 안경을 쓴, 나이가 무척 많아보이는 처사 한명이 와 있었다. 그 처사가 나와 같은 날 삭발을 하고 수계도반이 된 수암스님이었다.
스님들 사이에서 행자도반은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다. 때로는 출가의 뜻과 마음을 일생 함께 할 수 있는 까닭에 출생을 함께한 혈연보다 더 굳은 관계가 되기도 한다. 행자생활이 중요한 이유는 출가생활의 기본이 행자시절에 거의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 알속에서의 고통과 성숙해가는 과정을 견디면서 마침내 계를 받아 스님이 되는데 있어 속세의 과거를 뛰어넘어 출가인으로 새롭게 탈바꿈하는 과정을 함께하는 것이 행자도반이다.
나이들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같은 또래였던 수암스님은 출가전에 고교와 대학시절 불교학생회활동이 인연이 되어 입산하게 된 계기가 같아 다른 도반들보다 좀더 친밀할 수 있었다. 가끔 먼저 입산한 상행자들의 부당한 태도에 속상해 하고 힘들어 할 때 은근히 다가와 같이 욕하기도 하면서 위로와 격려를 해주기도 했고, 며칠 늦게 입산했으면서도 절사정에 밝아, 여러가지로 어려움에 부딪치면 오히려 가르쳐주는 일이 더 많았다. 큰 스님의 49재를 만나 매주 수천명의 밥을 해대느라 밥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려 공양도 제대로 못하면서도 자기소임은 끝까지 감당해내고, 암자의 스님이 키우던 벌떼가 날아갔다고 도와달라는 부탁에 얼굴을 온통 쏘이고 와서 끙끙 앓아누워서도 자기 일은 스스로 책임을 지곤 하였다.
계를 받고 먼저 강원에 가서 공부를 할 때는 배운 교재와 자료를 가져와 설명을 해주면서 뒤늦은 도반에게 자신의 공부를 나누곤 했고,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산중의 대중살이와 분위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방학을 맞아 본사에 오면 밤늦도록 이야기하다가 같이 잠이 들어도 도반의 몇 분간의 휴식을 위해 먼저 일어나서 도량목탁을 치거나 종송을 해주기도 하는 자상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수암스님은 오신채와 멸치국물도 못 먹는 철저한 산승체질로 수년간 도시에 살면서도 음식에 대해서 한점 불평과 불만이 없었는데, 혹 신도들이 공양대접 한다고 식당을 가도 그저 자신이 먹을 수 있는 음식 몇 가지만 가려 먹을 뿐 좋고 나쁜 표현이 일체 없다. 아직도 출가전에 인연맺었던 불교모임의 동기와 후배들과 소식을 끊지않고 이어나가고 있으며, 고향에 내려가면 속가도 자주 찾곤 한단다. 흔히 출가하면 속가 인연을 깨끗이 정리하여 속가의 가족이나 친지, 친구를 찾지도 만나지도 않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오히려 오래되고 묵은 옛 인연을 출가의 새로운 인연으로 엮어서 더 좋은 불연으로 승화시켜가는 것이다. 십 여년전 한 대학의 불교동아리와 맺은 지도법사의 인연도 그곳을 떠난 지금까지 이어져오는데, 방학이면 학생들이 절에 찾아와서 공부도 하고 기도도 하며 스님과의 만남을 계속하고 있다. 그중에는 출가해 수암스님의 상좌가 된 사람도 있고, 짝을 이룬 학생들이 여럿 주례를 부탁해 도반들 중에서 최다 주례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지금까지 수년째 살고 있는 홍성 용봉사에는 일요일이면 인근 부대의 장병을 태워와서 법회를 베풀고, 근처의 교도소 법회를 비롯해 힘이 닿는 한에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온 법회의 설법문안은 두꺼운 파일로 몇 개가 쌓여가고 있으며, 설사 짧은 법문이라도 꼼꼼하게 챙겨서 가벼이 넘기지 않는다. 때로 다니느라 피로가 심해 휴게소나 길가에 차를 세우고 잠시 눈을 붙이더라도 스님을 찾는 인연에게는 반드시 시간을 내어 찾아가 보는 열성이 식지 않는다. 이젠 윗머리까지 훤해져서 겉모습은 노스님이 다 된 수암스님이 언젠가 은사스님의 출타에 시봉한다고 나섰을 때, 은사스님께서 “내가 널 시봉해야겠다.”하시는 바람에 씁쓸하게 웃은 적이 있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산골 절의 담백함을 가득 담고 사는 수암스님은 은사스님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여도 행자시절의 신심을 품고 사는 ‘늘 젊은 스님’이다. ■서산 부석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