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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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이 더불어 함께하는 선연한 부처의 삶 살아가야
모든 것이 한마음속에서 생기는 것 둘아닌 도리 알고 한곳에 보림해야


어떤 것이 부처의 삶인지…

항상 보이지 않게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중생의 삶에서 벗어나 본래 부처인 그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가 무엇인지를 모르겠어요. 어떤 것이 부처의 삶인지 일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전에 통선사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통스님이라고 하는데, 그 분은 5만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항상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호랑이한테 잡혀간다 하더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사는 길이 있느니라. 모든 일은 순조롭게 응하되 거스리지 말고 호랑이가 잡아먹으려 하더라도 순순히 먹혀라. 살고 죽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스님이 산을 지나가다가 천야만야한 산턱에서 대호(大虎)를 만났습니다. 기절을 할 지경인데 문득 그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라서 호랑이가 입을 딱 벌리는데도 순리적으로 거역하지 않고 그냥 잡아먹혔습니다. 그런데 이 호랑이가 씹지도 않고 삼켰는데 이 스님이 떡 고개를 들고 천장을 쳐다보니 아, 뭐가 달렸거든요? 주머니 하나가 달린 겁니다. 그래서 항상 지니고 있는 장도를 꺼내서 쓱 도려냈습니다. 뜨겁거나 춥거나 그래도 정신을 차리라고 했으니 마음을 독하게 먹고선 칼을 쓱 꺼내 가지고 간을 한 점 도려서 꿀떡 삼켰단 말입니다. 그랬으니 이거는 요새 말로 오토바이 타고 막 돌길을 가는 거와 같이 날뛸 거 아닙니까. 호랑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거든요. 그러자 또 한 점을 썩 베어서는 또 꿀떡 삼켰습니다. 아, 꿀떡 삼키니까 또 뛰거든요.
바깥에서는 호랑이가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면 호랑이의 증조할아버지가 “얘! 너 왜 그렇게 뛰니?” 하니까 그냥 물어 죽이고, 할머니가 “왜 그렇게 뛰니?” 하고 물으면 또 물어 죽이고, “아버지, 왜 그렇게 뜁니까?” 하면 물어 죽이고, 사방으로 하늘이 높다고 뛰면서 다 물어 죽여 버리고 있는 겁니다. 그걸 죽이려고 죽이는 게 아니죠, 아프니까 그런 겁니다. 그렇게 해서 모두 다 죽여 버리고 자기도 고만 죽게 됐는데, 거기에서 간을 뭉텅 떼어서는 소금도 바를 새 없이 아예 꿀떡꿀떡 삼켜버렸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그냥 꿀떡꿀떡 삼켰습니다. 그렇게 삼키고 나서 나중에 보니까 조용하거든요. 조용하니까 자기 장도로다가 꽁지를 둥그렇게 뚫고서는 쓱 나오니까 머리가 훌떡 다 벗겨졌더란 말입니다. “다 벗겨져서 참 싱그럽구나.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보고, 내가 살면서 스님이 하신 말씀도 건성 들었더니 참 싱그럽구나. 모두가 번뇌망상을 먹고 산다고 했더니 모두가 싱그러운 그 법력을 먹고 살았구나. 그러하니 망상이라고 떼어 버릴 것이 뭐 있으며, 망상이 아니라고 가질 게 뭐 있던가! 푸르고 높은 산 얕은 것을 산이라 하노라.” 하고선 내려간 겁니다.
산에서 내려가서 통선사와 제자 5만 명이 죽 늘어앉았는 데에 이 스님이 들어가서 은사 스님한테 떡 삼 배를 올리고 나서 하는 소리가, “독 안에 들어서는 독을 굴릴 수 없노라. 독 바깥에 나오니 굴리고 굴려도 굴리는 자체가 없더라. 한 손 한 발 딛고 한 손 들어 천지를 쥐고 한 손 들어 해와 달을 걷어쥐니 일체 푸른 산 푸른 초목들은 한데 걷어 모아서 상투를 틀고 내 석장을 빼서 동곳을 삼으니 이 천지 어찌 싱그럽지 않으랴. 여기에서 그 동곳 한 점이, 5만 명이 오천이 될 수 있고 오천이 한 점이 될 수 있고, 그 한 점이 바로 여기에 부처님 한 분이 계시노라. 모두 일어나서 같이 한 손 들고 한 발 딛고 절하라.” 하고선 버럭 악을 쓰면서 참 공손히 자기 은사스님한테 절을 하거든요, 합장을 곱게 하면서. 그러니 스님께서 “저 산이 항상 푸르다고만 했더니 붉게 익었구나. 붉게 익었으니 흰 구름도 검은 구름도 다 걷혔구나. 얼씨구절씨구 좋을 씨구, 우리 살림살이 이만하면 좋을 씨고.” 하더랍니다.
어떻습니까? 이 소리를 허투로 듣지 마세요. 우리가 세상을 산다고 하지만 남녀를 막론해 놓고 이 도리를 모른다면, 이렇게 된다 저렇게 된다는 말도 할 수 없으리만큼 치욕스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창살 없는 감옥에서 세세생생 헤맬테니 그 노릇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 수차 얘기를 하는 그 뜻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부엌에서 일할 때는 아무 옷이나 입고 일하다가도 외출을 할 일이 생기면 금방 탈바꿈을 해 가지고 바깥에 나갑니다. 구두를 신고 온통 바르고, 모습을 확 바꿔 가지고 말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렇게 바꿉니다. 어느 장소에는 이렇게 입고 가고 어느 장소에는 저렇게 입고 갑니다.
이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신령스러울 만큼 모습을 바꿔가면서 살고 있고, 속상한 일이 생기면 얼굴이 찌그러지고 눈을 부릅뜨게 되고, 속이 안 상하고 태평하고 즐거우면 해바라기처럼 즐겁게 웃고, 또 너무 화가 나서 부득부득 뭐가 일어나면 막 부수는 행동도 하게 됩니다. 화를 냈으면 화를 낸 대로 행이 나오고, 웃을 때는 웃는 대로 행이 나오고, 울 때는 우는 대로 행이 나옵니다. 그 행이 바로 탈바꿈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하나 모습 자체도 변해가면서, 물건이 전부 부서지고 변해가고 없어지고 이렇게 하는 것도 일체 만법이 다 똑같다는 얘깁니다.
항상 말했듯이 귀로 듣는 것도 고정되지 않고 눈으로 보는 것도 고정되지 않고 모든 것이 고정되지 않습니다. 내가 예전에 산에 다니면서 봤는데 토끼란 놈이 말입니다. 잿빛을 하고 있다가도 추운 겨울에는 잿빛 나는 털을 하얗게 탈바꿈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이렇게 묘한, 짐승들도 자기가 살 궁리들을 하면서 탈바꿈을 하는데, 사람이라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만 있는 게 아니라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럼 부처가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입니까? 부처는 이름입니다. 대의적인 이름일 뿐입니다. 여러분 각자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짓지는 않았을 겁니다. 낳고 나서 이름을 지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도 한 번 빙그르르 돌아서 나와야지 돌지 않으면 나오질 않아요. 그 원리가 어디에 있을까요? 세상 천지가 그렇게 돌고 있거든요. 마음도 그렇게 안으로 굴리면서 돌아야 바로 내가 생산을 하게 되는 거죠. 내 마음을 내가 생산해서, 내가 또 안으로 체험하고 안으로 굴려서 두 번 없는 두 번의 생산이 됐을 때, 비로소 너와 나와 둘이 아닌 죽음이요, 다시 한 번 너와 나가 나툴 때, 세 번 없는 세 번의 죽음이요, 우리가 지금 참나를 발견한다, 마음을 깨닫는다, 도인이다 하는 말이 있기 이전에 말입니다. 순박하게 못났든 잘났든 내가 생각하면서 나를 화두로 삼지 않는다면, 그러고 24시간 자나깨나 그것이 전체가 다 참선이요, 싱그러움이요, 법이요, 묘한 도리입니다.
내가 그렇게 수없이 거듭거듭 모습을 바꿔서 억겁을 거쳐서 이 세상에 거듭거듭 나오면서 이렇게 아픔과 쓰라림을 당했거늘 어찌 오늘날에 인간의 몸을 받아 가지고도 그것을 모릅니까. 지금 살면서도 모릅니까. 지금 복장을 치면서 아파서 울면서도 모릅니까. 우리 살림살이가, 불법과 우리 살림살이가 둘이라면 어불성설입니다, 이건 있을 수도 없어요. 살림살이 빼놓고 이것 빼고 저것 빼고 무엇을 일컬어서 도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도라는 것은 이 길, 저 길, 같은 길입니다. 이 길도 아니고 저 길도 아니고 동(同)길이라는 소립니다. 내가 나오기 이전을 미분전이라고 하는데 천만에요! 낳기 이전도 아니고 이후도 아닙니다. 오직 지금, 내가 여러분과 예전에 앉았던 그때와 지금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듣는 것과 말하는 것과 둘이 아닌 겁니다.
이 도리를 우리가 모른다면 상대가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천차만별로 벌어지는 그 이치를 한데 끌어 모아서 우리가 바꿔 가지고 돌아가는 찰나찰나를, 망상이라고 하지말고 끊으려고 하지말고 자기한테서 나온 거 자기한테 놔라 이겁니다. 맡겨 놔라 이겁니다. 그래서 창살이 없는 자기 마음 가운데의 창살 속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마음의 항아리를 굴릴 수가 없습니다. 자유스럽게 굴릴 수가 없어요. 그러고 내 한 점의 마음을 가지고 수천 가지로 화하고 수천 가지로 나투면서 찰나찰나 그 묘법의 진의를 알지 못할 겁니다. 그저 “부처님이 어떤 것입니까?” 하면 “너 나오기 이전이다.”고 하면서 그것만 염하게 하는데, 이렇게 해 가지고 첨단의 과학이 발달된 이 시점에서 깨우쳐질까요? 천 년을 해 보고 만 년을 해 본들, 자기 자신에게 모든 걸 물어보면 알 거예요.
그래서 자기 열매를 자기가 무르익혀서 사람들을 줬을 때 모든 사람들이 “아! 그 맛 좋더라.” 이러고 자기 그릇대로, 자기 차원대로 맛이 나는 거를 말할 때 비로소 만 가지 맛이 나는 겁니다. 나와 남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더불어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선연(鮮姸)한 부처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거구요.


감정에 솔직하고 싶어요.

저는 27세의 청년입니다. 깨달음의 길에 있어서 ‘성(性)’이란 무엇입니까. 전 예전에는 ‘성’이라 하면 왠지 죄악시 하곤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눈 가리고 아웅한다고 그것을 깨닫겠습니까. 저는 저의 감정에 솔직하고 자신을 보는 눈을 항상 잊지 않는다면 깨달음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인공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는지요.


그 나이에는 누구든지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일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자기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고 말들을 하는데 그게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몸, 육신이 자기가 아닙니다. 즉 말하자면 사람의 생명 근본은 불성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은 불성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불성과 흔히 말하는 영혼은 다른 뜻입니다. 말하자면 영혼은 자기 마음 씀씀이에 의해서 그대로 굴러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불성은 힘을 배출해 주는 근원처입니다. 수레가 굴러갈 때에 바퀴에 심봉이 있어서 이탈을 안 하고 굴러가듯 말입니다. 그런데 첫째,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몸 속에 의식이 잔뜩 들어 있습니다. 모습과 의식, 생명이 잔뜩 들어 있습니다. 세포 하나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느냐는 겁니다.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정수에 입력이 되는 겁니다. 관하면 벌써 대뇌를 통해서 사대로 통신이 되면서 바로 정수에 입력이 되는 겁니다. 사람의 구조도 너무나 질서정연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입력이 되는 것은 어떻게 마음을 먹고,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실천을 하는 데에 대해서 자기한테 입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입력이 된 대로라고 하는 거예요. 만약 자살의 경우라면 입력이 되는 대로 의식 속에 차례로 입력이 된 자체가 그 시기가 되면 그냥 자꾸 발사가 되는 거죠. ‘넌 죽어야 한다.’ 그러구 말입니다. 또 세균성·인과성·유전성·업보성·영계성 이 다섯 가지 중에 하나가 그런 경우가 있다면 바로 거기에서 의식이 자꾸 충동질을 합니다. 충동을 일으켜서, 핑계가 돼 가지고, 상대성의 핑계가 돼 가지고 그냥 순간에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폭발하는 거지요. 그래서 죽는 거예요.
그러니깐 첫째는 마음이에요. 마음이 육체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경우가 많다 하는 것은 그 만큼 시대가 빠르게 변천하는 대로 돌아가면서 그런 경우가 많이 생기는 거예요. 즉 말하자면 환경에 따라서 지배를 받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이 생기는 겁니다. 큰 일이 앞에 닥쳤을 때 자기가 딛고자 했던 것이 허탈하고 허망할 때, 일이 그렇게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걸 어떻게 대치하느냐 하는 거를 제시하고 또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살아나가는 데에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만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전부 고정되게 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하는 거예요. 이거 하면 저것 해야 하고, 이거 들으면 저거 들어야 하고, 이거 보면 저거 봐야 하고 순간순간 돌아가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어떤 거를 했다고 하고 어떤 걸 봤다고 하겠습니까. 속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더불어 같이 작용을 하기 때문에 본 건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닥치는 대로 그냥 찰나찰나 나툰다고 하는 건 건너뛰는 걸 말하는 겁니다. 건너뛰고 가는 거예요. 한 발짝 떼어놓으면 또 한 발짝 떼어놓고,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거는 단, 마음에 소속된, 즉 말하자면 심부름꾼일 수도 있고 또 집일 수도 있습니다. 안에 알맹이가 있으면 거죽에 보호된 장치가 있듯이 말입니다. 지구도 안에 있으면 바깥에 지구라는 장치가 돼 있듯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육신과 정신계와 둘이 아니게 그냥 끝없이 돌아가는 위치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차원이 높게 발족하는 대로 발명을 할 뿐이라는 얘기예요.
그래서 참나를 발견하는 문제는, 어떤 것이 올라오더라도 무조건 거기 맡겨놔야 됩니다. 왜냐하면 악도 놓고 선도 다 놓아야 되니깐요. 안 되는 것도 거기서 하는 거요, 되는 것도 거기서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 있으면 ‘거기서밖엔 해결하지 못하겠구나.’ 하거나 ‘나를 테스트하려고 그러는 거지.’ 하고선 그 또한 다시 놓고, 잘된 일이 있으면 감사하게 거기 놓으라고 하는 거죠. 이렇게 좋은 것은 좋다고 하고 나쁜 거는 나쁘다고 버리는 게 아니라 양면을 다 놓아야 됩니다.
내가 혼자 하는 거는 없습니다. 내가 한 것도 없으니 내가 했다는 생각조차 놓고, 또 안 된다는 생각조차도 놓고, 빨리 하겠다는 생각조차도 놔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체를 실험해 보십시오. 어떤 생각이 올라오든지 간에 남녀의 문제라 해도 그렇고, 죄가 된다는 생각도 그렇고 모든 걸 맡겨 놓고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 관하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렇게 꼭 하세요. 무조건이요. 이 공부는 이유가 붙어서는 안됩니다. 무조건 자기 돌아가는, 찰나에 돌아가는 자기 주인공한테 그냥 무조건 놓고 지켜보세요. 일체는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나오는 대로 거기다 맡겨놓고 매사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그렇게만 나간다면 어느 땐가 자성불이 발현이 될 때가 있을 테니까요. 그 때가 되면 생각으로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이든지 넘어서서 진정한 자유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하세요.


병고에서 벗어나려면…

마음도리를 삶의 목표로 삼고 열심히 정진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병석에 들고 보니 그렇듯 자신 있게 믿어왔던 제 안의 주인공이 있기는 한 것인지 자신이 없어집니다. 스님, 이렇게 나약한 질문을 올리게 되어 너무 송구스럽고 죄송합니다. 저에게 갑자기 닥친 이 병고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관해야 하는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파서 누워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눕게 한 놈이 누구냐는 겁니다. 아파서 눕게 한 놈이 누구냐? 그거를 알면 아파도 웃으면서 살 수 있는 거죠. 그러다 보면 “네가 그런 거니깐 일으키는 것도 네가 일으키는 거지. 네가 형성시켰으니깐 네가 일으켜라.” 이렇게 넓게 생각을 한다면, 설사 몸은 누워있다 하더라도 마음은 한잠 자고 일어나면 일어나듯 그렇게 가벼워질 테죠. 그런데 몸이 아프면 아프다고 집착을 하면서 의사한테 어떤 말을 들었으니까 들은 대로 그냥 집착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을 하고 끄달리니까 몸 속의 생명들도 꼭 그렇게 듣고선 행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잘못될 수밖에요. 그래서 묘하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힘들게 산다 하더라도 그렇고 잘 산다 하더라도 그렇고 아주 미묘한 겁니다. 어떤 사람은 한 발짝을 성큼 뛸려고 해도 뛸 수 없으니까 요만큼만 뛰어야지 알맞겠다고 생각하고 떼어놓고 사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욕심이 많아서 덮어놓고 그냥 막 떼어놓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니깐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는 한 발 한 발 겁내지 말고 떼어놓고 사시라 이겁니다. 그러나 이 공부를 하는 데는, 마음으로 뛰어넘을 때는 우리가 지혜를 넓혀야 되겠다 할 때는 가차없이 떼어 놔야 하는 거죠.
그래서 예전에 이런 예가 있었어요. 길을 걸어가는데 이건 길이 아니고 저 산꼭대기에 있는 저게 길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걸 믿겠습니까? 근데 그 뒤에 생각을 하니깐 믿게 되는 거죠. 저 언덕배기가 길이라고 그러는 걸 믿는 게 아니라 그 뒤에 뜻이 있으니깐 믿는 겁니다. 여기가 길이니까 저기가 길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지만 길이라고 하니까 한번 그 뒤에 문제를 좀 알아보자 하고선 올라가서, 까만 데 올라서서 보니까 허공만 보이거든요. 허공만 보이니깐 “어, 이게 허공길이구나! 허허허” 이런 거죠. 그러니까 내가 가보지 않으면 모르고 생각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겁니다.
지금 이렇게 발달이 된 세상에서, 옛날에는 몸으로 가서 봐야 알았지만 지금은 생각으로 다 할 수 있지 않은가 이겁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이게 길이 아니라 저 높다란 산꼭대기가 길이라고 한다면 생각으로도 거기에 올라갈 수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지혜가 모자라서, 거기가 길이라면 그냥 올라갔지만 말입니다. 나 어려서만 해도 그렇게 못 듣고 못 보고 했으니깐 어리석은 일이 많았죠. 그렇지만 지금은 육체의 고행이 아니라도, 정신의 노력이라면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진 땅이 이만큼 있어도 그 진 땅을 넘어서면 아무 기탄이 없는데, 그 진 땅을 넘어서지 않고 다리를 걷고 부들부들 떨면서 걸어가니까 그거 씻어야지, 뭐 이것저것 죄 해야지, 옷을 갈아 입는 이런 고통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훌쩍 뛰어넘어라 이랬습니다. 마음으로 뛰어넘으라는데 왜 못 뛰어넘느냐, 마음으로 뛰어넘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봐요. 억지로 할 수 없나 봐요, 그 마음이라는 게. 그래서 모두 제 마음을 가지고도 제 마음대로 못 쓰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문제가 크죠. 병고 때문에 고통이 큰 게 아니라 그 병고를 느끼는 마음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상처가 생겨도 그 아프다는 생각을 자꾸 일으키면 큰 고통이지만 설사 큰 병고라도 마음으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관한다면 그 또한 벗어나서 자유스럽게 넘어설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한 찰나에 마음으로 뛰어넘으면서 자유스럽게 살아가도록 하세요.


주인공자리가 어떠한지…

저는 평소 스님 법문을 현대불교 신문과 한마음 요전을 통해 보고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 불자입니다. 그런데 주인공 자리가 어떤 것인지는 분명히는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느낌은 옵니다. 욕심과 분노에 안절부절하는 내가 있고, 그 이면에서 ‘이러면 안되는데…’ 하는 내가 있고, 그리고 마음이 편안할 때의 나도 있습니다. 부처님 법을 알려고 애를 쓸 때의 나도 있고, 지하철 역 앞의 거지에게 100원짜리 잔돈을 주는 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 항상 그 마음이 그때뿐입니다. 참나를 찾아서, 보리심을 내었는데 돌아서면 잠시 예전과 똑같이 또 욕심부리고, 화내고,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안절부절 못하는 일상의 나로 되돌아오고 맙니다. 법당에서 108배를 하거나, 불보살님의 명호를 욀 때는 마음이 평온합니다. 그러나 법당 문을 돌아서서 나오면 예전과 똑같아집니다. 그래서 마음공부에 진척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마음이 번잡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제 자신이 조울증이나 심리적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스님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본인이 얘기하는 것처럼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마음이 찰나찰나 변해서 돌아가는데 무엇을 내가 했다고 하며, 무엇을 내가 가졌다고 하며, 무엇을 내가 줬다고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도 내 것 아님이 없고 남의 것 아님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모두가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돌아가는데, 길을 걸어가는데 발자취를 짊어지고 다닙니까? 아니죠? 한 발 떼어놓았으면 금방 앞서 발자국은 없어지고 과거로 돌아간 발자국도 없는 겁니다. 그리고 발자국 딛고 걸어온 사람 자체도 공해서 없습니다. 그렇게 찰나찰나 바뀌어서 돌아가는데 언제 왔다고 하고 언제 갔다고 하며, 어떤 거를 했을 때 내가 했다고 하고, 어떤 걸 먹었을 때 내가 먹었다고 하며, 누구를 만났을 때 내가 만났다고 하며, 어디를 내가 갔다고 하며 어디에 내가 왔다고 하겠습니까? 모두가 공했으니 그냥 길을 걸을 뿐이요, 먹을 뿐이요, 만났을 뿐이요, 말할 뿐입니다. 그냥 묵묵히 말입니다. 그렇게 찰나찰나 말을 하고, 찰나찰나 듣고, 찰나찰나 책을 보고, 그렇게 찰나찰나 말을 하고 만날 뿐이죠.
내가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상대가 있는 거지 내가 없는데 어떻게 상대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물이 어떻게 존재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로부터 없는 문을 발견하라고 하는 겁니다. 나로부터 내 불성이 그대로 여여한 것을 알고 중용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를 믿지 못하고,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향하면서 무엇을 찾으려고 하니 그게 발전이 있겠습니까? 늘 얘기하는 거지만, 아무리 108배를 하고 만 배를 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냥 몸으로 한 것이라면 아무런 공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 배를 올리더라도 삼 배를 올리더라도 일체를 하나로 둥굴려서 공심으로 하는 절이라면 그건 우주 천하를 울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대로 불성이 있다는 걸 알고, 불성이 있는 고로 여여한 줄 알고, 또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법을 들이고 내는 데 손색이 없고 걸림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고, 자유자재권을 그대로 모두 소유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서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핏물이든 빗물이든 똥물이든 모든 물이 바다로 한데 합쳐서 모입니다. 깨끗한 물이든 구정물이든 어떤 거든지 말입니다. 옛날에 선지식들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젖는 것이라고 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마는 모든 물이 바다로 모이면 그게 수증기로 올라가서 다시금 내려줍니다. 이게 생수입니다. 그래서 저 풀 한 포기도 그 생수를 마시고 삽니다.
근데 그게 참 묘한 것이,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먹고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대로 먹더라 이런 얘깁니다. 그러니까 작은 거는 아주 작은데도 그냥 먹더라 이거예요. 그러니 부처님이 평등한 공법으로 아무리 우리를 건져주셔도 그릇이 작아서 먹지를 못하고 받지를 못하는 걸 어떡합니까, 그릇대로 받는 거지. 그러니까 평등하게 부처님께서 모든 만물에게 비를 내려주셔도 자기 그릇이 요만하다면 고만큼밖에 못 먹는 거죠. 크면 큰 대로 먹고 작으면 작은 대로 먹구요. 그러니 누구 원망을 하겠습니까. 누구 탓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난 탓이요, 자기 그릇이 작은 탓이요, 또 넘치는 건 그릇이 큰 탓이니까 넘치지도 말고 적지도 말고 항상 중심을 가지고 중도로써 중용을 행하라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내 한마음 속에서 다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 찾고 저것 찾고 그렇게 바깥으로 뱅뱅뱅 돌다보면 세월 다 가고, 그러다 보면 벌써 옷을 벗게 되는 거죠. 모습이 없으면 부딪힘이 없어서 공부를 못합니다. 체가 없어서 공부를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생에 이 몸이 스러지기 전에 기필코 우리는 그 소식을 알아야 되고, 공부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냥 말로 ‘마음공부’ 한다고 말하지만 일거수일투족 생활 속에서 실천을 해야하는 거고, 또 자기가 있으니까 생활이 있는 거지 뭐가 있습니까? 그래서 더불어 같이 하는 둘 아닌 도리에 대해서 아시고 모든 걸 한 군데다 보림을 해야 하는 거죠. 용광로에 모든 쇠를 집어넣어서 새로운 쇠로 만들듯이 그렇게 몽땅 놓아서 새로이 입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도 얘기했듯이, 바닷물이 수증기가 돼서 올라가서 다시 내려올 때 걸러져서 정말 생수가 돼서 생명을 살리고, 우리는 다 그 물로 하여금 살고 있는 것이니 일체가 공식(共食)을 한다는 겁니다. 공식이다 해서 먹는 것만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거든지 집어삼키라는 뜻입니다. 앞에 닥치는 거 마다하지 않고 집어삼키고, 가는 거 잡지 마라 이 소리예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요, 그것이 바로 공부할 수 있는 재료임을 알고 화가 나든지 편안하든지 어떤 경우이든 그 자리에 놓고 맡기는 공부를 하도록 하세요.
2002-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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