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징자
언론인
본지 논설위원
석가모니 부처님을 ‘리얼리스트’라고도 한다. 서양의 종교 철학자 사이에서 나오는 지적이다. 특히 부처님의 첫 가르침, 사성제와 팔정도. 생의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는 그 길과 방법을 설하신 부처님 가르침이 현실에 뿌리 두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고(苦)를 없애는 길, 그것은 치우친 양극단을 버린 중도(中道)로서의 팔정도(八正道)다. 인간 심리적 윤리 도덕성을 깊은 종교성 안에 포괄하고 있는 이 팔정도야말로 이번 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들을 검증해 보는 좋은 잣대가 될 것이다.
대통령 후보들은 지금 거짓말, 양설(兩舌), 험담, 거친 말이 아닌 올바른 말(正語)을 하고 있는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이례적으로 내놓은 ‘선거에 즈음하여’를 보면 이번 대선 분위기가 전에 없는 인신공격과 흑색선전 폭로 선동 등으로 얼룩지고, 편 가르기와 극단적 대립이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올바른 말’의 설자리가 없어 보인다.
16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결정과정에서 국민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모은 것은 노무현 정몽준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있었던 두 후보간 TV토론 이었을 것이다. 노 후보에게 승리를 안겨 준 이 토론에서 노 후보는 ‘부처님도 방편을 쓰셨다’는 말을 했다. 정몽준씨가 ‘DJ의 자산과 부채를 승계하겠다고 하다가 다시 밟고 넘어가겠다고 하는 등’의 일관성 없는 왔다 갔다 식 노 후보의 언행을 언급했을 때 나온 답변이다.
정치인 가운데는 문자 속 밝은이가 많아 성현들 말씀이 곧잘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말의 전쟁터’에서 상징성 풍부한 ‘문자 속’은 빠질 수 없는 첨단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억해 보면 ‘부처님의 방편 설법’도 실상 노후보가 처음 쓴 말이 아니다. 3김 가운데 한분이, 노후보가 이번에 받았던 비슷한 질문에 같은 답변을 제법 써 먹었다.
그런데 그 ‘부처님의 방편 설법’ 은 부처님이니까 할 수 있는 방편이지, 세속인의 것이 되고 보면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 적 ‘거짓말’이 될 확률이 아주 높다. 그의 군주론을 빌려 보면, “인간이란 단순한 동물이라 눈에 보이는 것에 끌려가기 쉽다. 그러므로 속이고자 하는 자는 속일 상대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고 3김 가운데 그 한 분, 그리고 노 후보를 유독 ‘거짓말 잘 하는 정치인’쪽으로 분류할 수 없는 것은 정치인들의 거짓말이 서로 간 ‘오십보 백보’ 여서 경중 가리기가 어렵고 국민들도 이를 어느 정도 묵과해 주는 관용심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현대의 민심은 서양 중세 마키아벨리의 시대 민심보다 크게 진화해 서 쉽게 속지도 않는다. 다만 그러려니, 속는 척 할 뿐이다.
노 후보는 3김 시대의 화법 하나를 무심히 배워 구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방편 설법’에 재미붙여왔던 그 한분과는 스타일이 매우 다르다. 거칠면서도 속이 곧잘 들여다보이는 언행을 구사하는 그를 유권자들은 ‘가볍기는 하나 오히려 솔직한 인물’로 평가한다. 정치인 가운데 비교적 거짓의 때가 덜하다는 평가일 것이다.
이회창 후보의 경우, 명쾌한 설명이 불가능한 아들들의 병역 문제 등 몇 가지 의혹이 그의 정어(正語)에 대한 믿음을 여지없이 의심케 하고 있다.
아마 16대 대선에서 가장 큰 거짓말은 ‘지역감정에서 자유롭다’든가 ‘지역 주의를 없애겠다’일 것이다.
지난 3일 있었던 이회창 노무현 권영길 세 후보 합동토론에서도 양강(兩强)으로 분류되고 있는 이, 노 후보는 상대방의 지역감정과 지역주의 부추김을 성토했다.
토론에 함께 참여했던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역시 정당과 지역간의 고리 끊기를 촉구했다. 선거에 임하는 정치인으로서야 눈에 보이는 지역감정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고 더구나 상대 후보가 지역주의를 이용할 때 이를 포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경남 출신인 노 후보, 그리고 영남을 스스로의 기반이라 믿고 있는 이 후보가 부산과 경남에서 격돌하며 쏟아내고 있는 말 하나하나를 분석해 보면 지역주의 아닌 것을 찾기 어렵다.
도청, 각종비리, 정치자금 등 어느 한편은 분명 거짓말 하고 있음이 분명한 의혹들이 이 시점에서 돌출하고 있는 현실도 어지럽다. 선거풍토가 어떻게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있겠는가.
만약 ‘정어 지수(正語 指數)’라는 것을 만든다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16대 대선의 정어지수는 바닥권이다.
지수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 가운데 바닥권은 역설적이게도 희망과 연결돼 있다. 주가지수나 경제가 ‘바닥을 쳤다’고 할 때 사람들은 이제는 오르는 일만 남았다는 희망을 갖는다.
한국 정치에도 그런 희망이 있을 것이다. 이번 대선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바로 지금부터라도 정어지수를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후보, 정어에 조금이라도 다가서려는 후보가 있다면 민심은 그 쪽으로 기울 것이라 믿는다. 아무리 ‘거짓말’이 ‘정치’라는 불가피한 영역 속에서의 필요악이라 해도 미래 정치는 정어지수로 계량되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의 올바른 길, 그 팔정도 가운데 어느 하나의 길만이 유독 그 경지가 높을 수는 없다. 수준, 즉 물의 높이는 함께 오르내리는 이치와 같아 올바른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진실된 성질을 올바로 볼 수 있고, 올바른 공력을 단련해 왔을 것이며 악의(惡意)나 관능에서 벗어난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무엇을 행해야 할지를 알며, 그리고 그 행위 역시 올바른 길을 택해 갈 것이다.
개인적 생의 괴로움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회적 국가적 세계적 괴로움을 올바로 파악하는 일, 그 괴로움을 없애는 일이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이라면 팔정도야말로 정치 지도자들이 택해 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후보 간 정견이 중요하지 않느냐 할 수도 있다. 물론 선거에서 가장 중요하고 당당한 대결은 정책대결일 것이다. 하지만 후보들의 정견이나 공약이 좌든 우든, 보수든 진보든 민심에 부합하고, 이를 약속대로 실천해 나갈 수 있는 힘이 팔정도에서 나온다면 후보의 됨됨이 검증이 우선돼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시점에서 한국정계에 정어지수 도입을 권장하고 싶은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세계는 선가(禪家)에만 있지 않다. 몇 천 년을 진화(進化)해 온 민심은 이제 후보들이 쏟아내는 말의 홍수 속에서 그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진실 된 세계를 볼 줄 알고 빠른 속도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를 전할 줄도 안다. 짐작컨대 지금 한국 정치인의 정견(正見)지수는 민심의 정견지수에 비해 낮을 것이다.
오죽하면 ‘한국 경제는 1류인데 정치는 3류 4류’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보다 진실 된 후보’를 올바르게 파악한 민심이라 해도 현실적으로 참여해 의사 표시를 않는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 국민 각자,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 민심을 투표로 보여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