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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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염세적인가?
욕망에 사로잡혀 고통·비관 자초
苦의 원인 해결위한 노력해야

대학시절 가을맞이 시낭송회를 기획한 적이 있다. 해서 유명한 여류시인인 H씨를 초대하기 위해 방문했다. 그분이 재직하고 있던 대학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시낭송회에 오셔서 신작시를 낭송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분은 흔쾌히 허락을 하며, 동국대학은 문학적 전통이 오랜 대학이라 오히려 영광이라고 자상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당혹스러웠던 것은 필자가 불교를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말을 듣고는 자신도 예전에는 불교를 믿었지만 교리를 공부할수록 염세적인 것이 싫어서 개종했다는 말이었다. 개인의 사생활을 간섭할 수도 없는 일이고, 본인이 판단하여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데 그것을 가지고 호오를 논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불교를 염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분의 불교관에 대해 자못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부탁하러 간 처지에 교리에 대한 논쟁을 일으킬 수도 없는 일인지라 웃으면서 헤어졌지만 한동안 나의 뇌리는 그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 불교는 정말 염세주의적인 종교인가? 물론 불교는 염세주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여류 시인은 불교를 왜 염세적인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시하는 4성제 중에서 첫 번째가 고성제이며, 고성제의 구체적인 내용이 8고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분은 이 고성제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고성제를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인가? 4성제 중에서 고성제와 집성제는 일반적인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결코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괴로울 고(苦)자를 붙여 성스러운 진리라 말한 것은 아니다.
고(苦)는 범어인 두카(duhkha)를 번역한 말이다. 두(du)와 카(kha)의 합성어인데 두는 혐오한다는 의미이며, 카는 공허하다는 의미이다. 혐오와 공허함이 겹쳐서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따라서 한문으로 번역할 때 고(苦)라 번역한 것이다. 고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현대의 학자들은 불만과 불안으로 정의한다. 이 세상은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우리들을 불만과 불안으로 내몰고 있으며, 나아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求不得苦)), 미운 사람을 만나는 것(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愛別離苦), 육신이 왕성한 것(五陰盛苦) 등이 우리들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등은 모두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것들이다. 결국 실존에 대한 불안과 불만 때문에 이것들을 고라 본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 미운 사람과 만남 등은 모두 욕망과 직결되는 것으로서 심리적 정신적 결핍증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불만이다. 또한 육신이 왕성하여 발생하는 불안과 불만 등이 있다.
인간이란 숨쉬고 있는 한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불안과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살아가면서 소유와 자아를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벽에 막혀 불가능하게 되거나 본인이 원하는 것만큼 실현되지 않으면 번민하고 괴로워하게 된다. 이런 것은 또한 우리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문제는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맹목적이지도 않으며, 맹목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아함경>에서는 불안과 불만에 대한 구체적인 발생과정을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여섯 기관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섯 기관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사귀지 못하고, 모이지 못하며, 짝이 되지 못하면 불안과 불만이 쌓이게 된다고 말한다. 인식의 대상이나 접촉, 감수 작용, 지각 작용, 의지와 충동, 애욕의 경우 등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오감과 마음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 자체가 우리들을 번민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들의 오감을 스스로 통제 내지 절제하고, 그것들이 결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임을 인식한다면 불안과 불만을 잠재울 수 있다고 본다.
기실 사람은 누구나 대통령, 법관, 장관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자격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그 직업이나 직책이 가져오는 권위나 명예, 권력 등 때문이라면 설사 그러한 자리에 나아갈 수 있다하더라도 결코 행복해 질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부귀영화를 자랑한다 하더라도 각자의 불안과 불만을 소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사는 변화가 무쌍하며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대부분 현실과 사회현상을 직시하지 못한다.
여기서 개인적인 불안과 불만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불안과 불만까지 고조되게 된다. 결국 괴로움으로 표현되는 불안과 불만은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욕망이자 야수성이다. 그것이 순화되지 않는 한 인간세계는 불안과 불만 속을 헤메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
2002-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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