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성불은 자기 근기 따라
날씨가 몹시 춥다고 그래서 ‘장소도 변변치 않은데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춥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이렇게 한 찰나에 떨어졌다가 찰나에 한자리를 하게 되는 것을 감사히 생각하면서, 오늘 마음과 마음을 전달하는 도리를 알기 위해서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어린애들은 발걸음을 떼어놓기 위해서 천방지축 걸어가는데, 그럴 때 그 어린애가 ‘내가 가다가 넘어지면 어쩌나!’ 하고 뛰어가지는 않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발걸음을 떼어놓는다는 기쁨으로만 그냥 뗄 뿐이죠. 그렇지만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구덩이에 빠지면은 어쩌나, 잘못되면 식구가 다 죽을 텐데….’ 하는 생각에 의해서 한 발짝도 떼어놓지 못하는 경향이 많다고 봅니다.
그런데 마음이 우선적입니다. 내 마음으로 하여금 바깥으로 바로 경계가 나옵니다. 바깥으로 작용이 나오고 작용이 나오면은 어떠한 경계가 완전히 나타나죠. 망하든지 흥하든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왜 이런 말이 있죠. 더하고 덜함도 없는 그 가운데서 자유스럽게 쓰는 마음씨가 있기 때문에 행동이 나오고, 행동이 나오기 때문에 현실에 적합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구요. 그래서 크고 작고 둘이 아니다, 그 가운데에 내 마음이 스스로서 자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만이 할 수 있다라는 얘기입니다.
어린애 얘기를 왜 했느냐 하면은, 여러분은 관습에 젖어서 고정관념에 젖어서 영 뛰지를 못해요. 이론으로만 세상을 사는 게 아닙니다. 아는 것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닙니다. 결국은 행을 하는 겁니다. 묵묵히 한생각을 했으면 그대로 묵묵히 걸어갈 뿐이고 작용을 할 뿐이죠. 그러기 때문에 조그만 거든지 큰 거든지 진실로서 한 발짝 떼어놓고 행을 하는 것이 문제지 아무리 말로 이론으로 지식으로 안다 하더라도 그건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과 중생이 둘이 아니다, 일체 모든 부처님, 즉 말하자면 부처님 이름도 허다하게 많죠? 그 많은 이름의 부처님이 앞에 있어도 집어삼켜라, 역대 조사들이 있다 하더라도 집어삼켜라, 중생이 있다 하더라도 집어삼켜라, 일체를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라는 뜻은 무엇이냐? 내 마음에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어떠할는지 모르겠지만 첫째, 마음을 먹는 것이 우선입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요. 체가 없기 때문에 수만 명의 선지식들, 부처님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아요. 한찰나에 이 세상을 다 집어넣는다 하더라도 두드러지지 않아요. 들고 나는 문은 한 문이요 한 구녘이에요. 그게 문 없는 문이에요. 한 세상을 다 집어넣고, 가정을 다 집어넣고, 역대 조사 역대 부처님을 다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 소립니다. 다 집어넣었으니까 다 내 놓아야죠? ‘그래서 다 버리고 나니깐 다 얻더라! 얻고 나니까 버릴 것도 없더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모든 걸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다 집어넣었으면 다 내놓을 줄 알아야 그게 보살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얘기하지만 변화해서 화(化)하고 돌아가는 이 세상이 ‘변화’ 이렇게 두 자만 했어도 그 속에 엄청난 돌아감이 서리고 있습니다. 보세요, 그 변화가 어떻게 돼 돌아가나? 천차만별의 만물만생이 변하여 화(化)하고, 또는 고정됨이 없이 나투면서 찰나찰나 돌아간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공생·공심·공용·공체·공식화하고 돌아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이 다 공동분담으로서 돌아가니까, 나를 세울 게 없으니까 공덕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이치를 다 알기 위해서는, 지식으로나 이론으로나 학식으로 아는 거를 놔버려야죠. 버리라는 게 아니라, 그것을 놔야 모든 것을 다 얻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한 구멍에다 놓는다면 놓은 그 자리에서 다시금 생겨나니까 한 구녘으로 들이고 내는 작용이 그대로 법이죠. 내가 혼자만 안다고 세워 봤자야, 여러분이 잠시 잠깐 생각을 하셔도 몸 속에 수많은 중생들과 더불어 자기 마음의 부처와 둘이 아닌데 어떻게 나 혼자 살고 있다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이론으로 잘 알고 마음 공부를 잘하고 간다고 하더라도 둘이 아닌 까닭에 내세울 게 없다는 얘기죠. 내세울 게 없는 자기 몸을 관리인 시자로서 나갈 수 있다면 그대로 하나하나 어떠한 부분의 소임을 맡아 가지고 하든지, 그 맡아 가지고 있는 거기에서만이 다 하는 거지 딴 데서 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이 입력됐던 것이 지금 나오는 거니까, 아주 간단하죠. 거기다가 되입력을 한다면 앞서 입력이 없어지니 그릇이 항상 빈다는 겁니다.
모두 하루살이로 살라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두 사랑을 한다고 말들을 하죠. “나는 당신을 사랑해, 나는 아들을 사랑해.” 뭐 누구나가 그저 만나서 좋으면은 사랑이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 사랑도 찰나 사랑이지 착을 두고 사랑을 한다면 그릇이 항상 비지를 못해서 진짜 사랑을 못해요. 마음도 찰나에 전하고 끝없이 연결되는 원인이, 찰나찰나 만나고 연결되고, 마음과 마음이 연결돼서 세상만사가 돌아가니까 그렇게 끊임없이 쉴 사이 없이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갈 수 있는 겁니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건 무심(無心)의 도리이고, 말과 말이 연결돼서 돌아가는 건 유심(有心)의 말이에요. 무심과 유심이 어떻게 둘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거하고 말하는 거하고 어떻게 둘입니까? 그런데 마음 속으로는 속일 수가 없지만은, 속이지 않아도 될 수 있지만 말로는 속이는 게 많다는 얘기죠. 하지 못할 말이 많고 말입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나를 끌고 다니는 나의 주인한테 진짜로 한 일과 하고 돌아가는 일과 말한 거를 전부 잘 알기 때문에 그 주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그 속마음이 바로 우주 천지하고도 직결이 돼 있다는 얘깁니다. 만물과도 서로 직결이 돼 있고 일체제불하고도 직결이 돼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데 아무리 마음으로 속이려고 해봤던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도리를 모르고 짓는 죄는 모르게끔 받고 알고 짓는 죄는 알고 받게 마련이다 이 소립니다.
찰나의 사랑, 찰나의 행,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도리를 배우는 겁니다, 지금.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묘한지 여러분이 깨닫고 깨닫지 않고 이전에 실질적으로 행할 수 있다면, 그대로 진실하게 행한다면, 그대로 진실하게 행한 도리의 그 그만큼은 나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내 모습의 고깃덩어리를 믿지 말라, 너의 마음 속에, 얼른 쉽게 말해서 안테나를 세운다면 그 주장자로 인해서 내 주장자와 네 주장자가 둘이 아니니라. 그래야만이 내 주장자를 찰나에 너를 줄 수도 있고 찰나에 네 주장자가 나한테 올 수도 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찰나에 통신이 된다 이 소리죠. 이 세상만사가 다 어지러운 것 같지만 아주 간편합니다. 뭐 내일 걱정 어저께 걱정, 어저께 후회, 앞으로 살아나갈 걱정을 하면서 모두 야단들인데요. 그릇을 항상 비우면서 찰나 생활로 살라고 하는 건, 정말이지 영원한 삶음을 갖다주는 겁니다. 부부지간에도 부모자식지간에도 찰나 사랑이라는 것은, 부드럽게 말해주고 부드럽게 행해주고 서로가 서로를 만날 때 둘이 아니게 진정한 자비로서의 만남이, 그냥 그 마음이 그대로 떨어져야죠? 거기다 착을 두면은 진짜 사랑을 영원히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모든 거는 주인공 뿌리에, 나무가 푸르르게 살려면 모든 것을 뿌리에 맡겨라, 뿌리는 모든 에너지를 흡수해서 올려보내고, 나무는 모든 에너지를 또 흡수해서 내려보내고 서로가 서로를 상응하면서 푸르르게 살 수 있다. 그러나 나무가 딴 뿌리의 이름을 찾거나 딴 나무의 형상을 믿거나 한다면 그건 기복이지 공덕이 될 수가 없어요. 그냥 에너지가 이쪽 뿌리에서 저쪽 뿌리로 갈 수가 없는 거예요. 물론 내 나무에서 내 뿌리를 믿는다면 그 뿌리로 하여금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모든 에너지를 흡수해서 올라갈 수 있지만, 이름과 형상을 찾아 헤맨다면 공덕은 하나도 없다고 달마대사도 말했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소나무가 향나무를 찾으면서, “향나무, 내가 지금 고통스러우니 나에게 에너지를 좀 줘.” 하고 아무리 기도를 해봤던들 향나무에서 에너지가 소나무로 갈 수가 없어요. 반드시 제 나무의 뿌리만이 자기 나무를 위해서 올려보낼 수 있죠. 그 나무는 잎새 하나도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전부 그 뿌리에 매달려 살면서도 자기 뿌리를 무시한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다 알쏭달쏭하게 생각하고 뿌리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못 믿어서 그렇죠. 못 믿어서요.
먼저 배웠고 나중 배우고 이걸 떠나서 진짜 물리가 터져서 잘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진실한 마음이라면, 진짜로 믿고 그렇게 하면은 둘이 아닌 도리에서 체험을 하고 가는 것이 바로 참선이며 지름길입니다. 내가 여러분한테 항상 하는 말 되하고 하는 말 되 하는 것 같지만, 여러분이 한마디를 듣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손 한 번 튕기는 걸 가지고 깨달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되풀이하게 되는 거죠. 왜 절에서 종을 울리는 줄 아십니까? ‘영혼들을 불러서 종소리를 들려줌으로써 그 영혼의 귀가 트이고 눈이 열려서 이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섭류를 알라, 네가 이거를 알아야 영원한 삶음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 하는 소립니다. 그러니 이 마음의 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세 사람이 왔는데 한 사람은 ‘아이구! 그거 정말 그럴까? 그럴 수가 있어?’ 이렇게 생각했고, 한 사람은 아예 믿질 않았습니다. 한 사람은 진짜로 자기 뿌리를 믿었습니다. ‘잘났든 못났든 내가, 그 못난 뿌리만이 못난 나무를 위해서 모든 거를 다 해주겠지, 우리 부모가 잘났든 못났든 부모이듯이.’ 그러면서 지극하게 믿고, 부모의 제삿날인데도 그저 보리죽 한 그릇을 쑤어서…, 할 게 없으니까, 부뚜막에 물 한 그릇 떠놓고 향 한 개비 켜놓고 제사를 지내면서도, ‘아버지 뿌리, 어머니 뿌리, 내 뿌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 한자리를 하소서! 시장했던 것이 한 떡으로서 화(化)해서 바로 양식이 되리다.’ 하고 그 부모한테 했답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가난하던 사람이 말입니다, 어떤 친구가 별안간에 찾아와서 마름을 주더랍니다, 일 좀 해달라고. 어디로 이사를 가는데 다 맡기고 가더랍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는 아주 잘살게 됐더랍니다. 그 나중 얘기는 생략하고요. 그랬는데 못 믿은 사람은 부처님의 말씀을 못 믿는 것만큼 그렇게 살더랍니다. 나무로 친다면 잎새가 단풍이 들면 떨어지듯이, 뿌리는 영원하지만 그 잎새는 떨어지고 없어지더랍니다. 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은 사람은 가장구가 돼서 추운 겨울에 발발 떨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고생이 많더랍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그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기도 허다합니다. 중병이 들었는데도 어떠한 생각을 했던지 완치가 되고, 어떤 사람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완치가 못 돼요. 그게 누구의 탓입니까? 제삼자가 밥을 먹어서 배가 부르게 해줄 수는 없는 것 같이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같이 거들어주는 건 모르지만 벗어나는 거는 자기가 자기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진짜로 자기 뿌리를 믿는다면…, 아니 그건 뗄래야 뗄 수도 없지 않습니까?
항상 얘기해 드리죠. 또 할까요? 허허허.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이 자기 영혼에 부착이 되고, 그림자처럼 부착이 돼서 따라다니거든요. 그런데 영혼의 근본이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 인해서 자기가 차원대로 자기 그릇대로 끼리끼리 만나야 하니까, 자동적이거든요, 그게. 즉 말하자면 무쇠는 무쇠 굴에 들어가고 금이면 금 굴에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어머니의 몸을 빌어서 탄생이 된다 이겁니다.
탄생이 되면 악업 선업이 영혼에 부착이 돼서 따라 다니던 게 지금 몸 속에 다 있는 거죠. 이게 현실입니다. 몸 속에 다 있어 가지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대로 자기도 어쩔 수가 없는 거죠.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하게끔 돼 있는 거니까요. 그건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 가지고 자동적으로 지금 현실에 나오는 거니까 팔자운명이라든가, 항상 그런 얘기를 하지만 참 무서운 겁니다. 팔자운명이라든가 영계성이라든가 유전성·업보성·세균성·인과성이 한꺼번에 거기 들어있으면서 그저 순서대로 나오는 거죠. 그런데 이거는 당하는 사람은 영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입력된 그 자리에다가, 그 뿌리에서 나오는 거니까 뿌리에다 자꾸 누적되지 않게 닥치는 대로 넣고, 부처님이 닥쳐도 둘이 아니다 하고 넣고, 어떤 것이 닥쳐오더라도 둘이 아닌 까닭에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그냥 놓는단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새로이 입력이 돼서 들어가니까 앞서의 입력은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오간 지옥도 무너진다는 소리죠. 그러니 자꾸 새 그릇에 담기면서 그릇이 비고 하니까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새로이 넣는 것이 현실에 나오고 현실로 나오면 즐거움이고,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화나게 하는 놈도 그놈이니까 안 나게 하는 놈도 그놈이죠. 매사를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진짜 사랑할 수 있고, 진짜 다복할 수 있고, 진짜 잘 살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는 거죠.
예전에 그런 말도 있죠. 지장보살은 중생들을 다 이끌어서 건져놓고 자기는 맨 나중에 간다고 문고리를 붙들고 백날 천날 끝간 데 없이 있어도 영 문고리를 떼어놓을 수가 없더랍니다. 연방 새로 오고 새로 오고 그러니까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죠. 나고 죽는 게 끝이 나는 게 있습니까, 어디? 그런 거와 같이 우리가 진짜로 알려면은 아는 것 전체를 놓고, 오신통도 벗어나야 오신통의 이치를 굴릴 수가 있는 겁니다. 오신통이 이 통에 들었다면 이 통을 벗어나야 마음대로 굴리고 마음대로 쓰지 통 안에 들어가서는 그 통을 굴릴 수가 없죠. 그런 거와 같습니다.
관하는 법만 온전히 체득을 한다면, 아예 이 시간부터라도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법이 나옵니다. 못 믿지 마세요! 나무는 천차만별로 이름이 있고 모습이 다르지만 뿌리라는 그 한 마디의 이름은 다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 나무 제 뿌리에서, 제 뿌리가 자기를 돕고 열매를 맺게 하고 꽃이 피게 하고 바로 만 가지 맛을 나게 하는 거지, 아니 제 나무에서 익지 않은 과실을 무슨 맛으로 찾습니까? 제 나무에서 무르익어야 맛이 나죠. 제 나무에서 설은 거 따서 아무리 먹으라고 돌려봤자 그거는 먹지 않습니다. 먹을 수가 없죠, 또. 그와 같이 지금 가르치는 관법은 생활선(生活禪)이면서 여래선(如來禪)입니다.
여래라는 뜻은 일체 상하 사방이, 사무사유(四無四有)가 한데 합쳐서 돌아가는 그 자체를 포착한 것이 바로 여래입니다. 그걸 또 간단히 말하자면, 몸과 몸 속에 있는 중생들과 나와 둘이 아니다, 이게 여래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몸 속에 세포 하나하나에도 생명이 들어있고, 생명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 생명들을 다 같이 하나로 가지고 있다, 이것이 여래입니다. 그래서 아주 적게 생각을 하면 여러분이 다 부처고 여래입니다. 그것을 포착을 못하고 알지 못하니까 내가 여래인지도 모르고, 전체가 여래인지도 모르고, 여래가 뭔지도 모르고 여래가 어떠한 개별적인 인간 이름인 줄 알고 나가거든요. 둘이 아닌 까닭에 여래라는 이름이 나왔고 여래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에 들이고 내고, 즉 말하자면 여래는 여래고 중생은 중생이고 이렇게도 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 관법을 여러분이 아주 진실하게 믿고, 무조건입니다. 아까 어린애 얘기 했지요. ‘무조건 내 뿌리를 믿어라! 형상을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이름을 믿으라는 것도 아니다. 그 가운데 너부터 먼저 알아야, 형상이든 이름이든 다 포착할 수 있어서 모든 걸 지혜롭게 작용할 수 있다.’ 이런 거니까 잘되고 못되고는 생각하는 데에 따르고, 깨닫고 못 깨닫는 거는 여러분의 생각에 의해서 깨닫고 못 깨닫는 거예요.
▲질문자1: 송년법회에 질문 올리게 됨을 감사드리며, 올해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한마음으로 늘 보살펴주시고 이끌어주심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특히 대전에 살기 때문에 대전에 지원이 생겼으면 하고 늘 발원을 했었는데, 스님의 큰 원력으로 대전의 모든 이에게 법을 전할 수 있게 개원되어 큰 축복으로 환희하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대중 박수)
지구상의 인간은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지구와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우주와의 관계를 중생들이 알기 쉽게 내면적인 면과 외적인 면에서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여기는 3차원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겠지만,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3차원이 되기도 하고 4차원이 되기도 하고 6차원이 되기도 하고 2차원도 되고 1차원도 못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3차원이라고 못을 박을 수가 없죠. 이건 사람들의 기준에 의해서 되는 거니까요.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그렇구요. 그러나 예전에도 얘기했습니다마는, 대의적으로는 우주와 인간의 근본 마음과 더불어 같이 직결이 돼있다는 얘깁니다. 그러고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근본은 바로 인간의 마음에 가설이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천상에서 보면 색경 속에 다 잘못하고 잘하는 게 나타나니까, ‘요놈은 좀 가르치기 위해서 벌을 줘야겠다. 착하게 했으니 상을 줘야겠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모든 게 자기 할 탓에 의해서 나타나는 거지, 그것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로 돌아간다면 말도 안 되죠. 우리 몸이 우주덩어리라면 이 우주 속에 전부 생명들이 들어있고 의식들이 들어있고 모습들이 천차만별로 들어있는데 한 덩어리가 그냥 돌아가지 두 덩어리로 갈라져서 돌아갑니까? 코 가는 데 눈이 가고, 눈이 가는 데 귀가 가고 이렇게 돌아가죠? 그러니깐 모두가 직결이 돼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은 두뇌, 즉 말하자면 대뇌로 거쳐서 사대(四大)로 통신이 되고 오르고 내리듯이, 똑같이 우주와 사생(四生)의 천차만별의 생명들도 전부 가설이 되고 직결이 돼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죠.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는 거짓이 통하지만 진짜로는 마음과 마음이 직결돼서 돌아가기 때문에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죠.
▲질문자1: 우리 불자들은 스님이 되는 것을 큰 복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간을 극한 상황에 몰고 들어가야 승려가 되거나 불문에 드는 것입니까?
▲스님: 그것도 두 가지 여건이 있죠. 하나는 전자에 배우던 습이 있어서 다시 그 길을 밟는 수도 있고 또 그런 업적으로 인해서 그 뿌리의 자리에서 엄숙하게 자꾸 몸을 리드하니까 생각에 ‘아, 나는 이 길을 가야겠다.’ 하고 나오게 되는 거죠. 또 그렇지 않으면 현실에 근기가 튼튼하고 뿌리가 튼튼해서, 착한 일을 많이 한 덕이 있기 때문에, 이런 도리가 좋아서 하게 되고 끼리끼리 만나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불문에 들게 되고 서로가 공부하는 거죠.
우리가 지금 마음공부를 하는 거는 세세생생에 자기가 벗어나기 위해서, 내면으로는 악업 선업에서 벗어나고 또는 전체로서는 공기주머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죠. 그러니깐 자유자재권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인연 따라서 만남도 있고 인연 따라서 헤어짐도 있고, 마음과 마음이 끝없이 이어져 돌아가니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질문자1: 감사합니다. 지금 질문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미 말씀하신 걸로 알겠습니다마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여러 생을 살면서 불법(佛法)에 마음을 두었던 습기 아닌 습기 때문에 최상승의 마음 법을 공부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단번에 뛰어들어 공부하게 된 것인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그거는 근기에 따라서, 과거의 지어놓은 게 많기 때문에 오는 율이 더 많죠. 그러고 단번에 오는 인연은, 또 그 인연도 전자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같이 이어지는 거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상점에 가면 끼리끼리들 놓여 있죠. 끼리끼리들 연결이 돼 있기 때문에, 좋은 배든 언짢은 배든 배가 됐으니까 배끼리 모이고 사과도 사과끼리, 그건 자동적인 인연 인과죠.
▲질문자1: 어떤 종교를 믿든지 간에 안으로만 믿고 맡기고 관(觀)하면 지금 우리와 같은 마음 법에 버금가는 공부가 되는 것입니까?
▲스님: 어떤 종교를 막론해놓고 그건 이름일 뿐이니까, 그전에도 얘기했죠. 불교는 어떤 이름을 상징한 것보다도 일체 생명은 불(佛)이요, 일체 통하고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교(敎)라구요. 그러니까 불교라는 것은 어떤 종교의 이름이든 간에 불교 안에 있는 거지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불교라는 건 어떤 개별적인 이름이 아니라 전체적인 진리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는 다 그 안에 들어서 마찬가지의 이름이지만, 이 마음공부를 하다가 보면 둘 아닌 도리가 나올 때에, 연결이 될 때, 연결이 되면서 어린아이가 탄생을 해서 갓 나왔을 때에 문제가 되는 거죠. 어떻게 가르치느냐의 문제가 있는 거죠. 그래서 뭐가 어려우냐 하면은, 석존께서 6년 고행할 때에 악마도 나왔고, 미녀도 나왔고 신장도 나왔고, 부처도 나왔고 뭐 별 게 다 나왔다고 그랬죠? 그러니깐 자세히 얘기하자면, 내 몸 안에 악업 선업이 있는데 그게 어떻게 하나 보기 위해서, 그냥 몽땅 다 나오는 겁니다. 이것도 나오고 저것도 환상으로 나오는데, 그럴 때에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다 하고 맡겨 놔야만이 다시 돌아서 새 물로 대치가 될 텐데, 그렇지 않고 나오는 대로 끄달린다면, 악마가 나오면 버리려고 애를 쓰고 부처가 나오면 가지려고 애를 쓴다면 이거는 안되죠. 예를 들어서 병이 들고 잘못되는 율이 99%나 되죠. 그러기 때문에 이끌어가는 사람이 자기가 100%까지 다 갈 줄 알고 할 줄 알고 이끌어갈 수 있어야만이 가르칠 수 있다는 겁니다.
▲질문자1: 예. 감사합니다. 인도 종교에서 말하는 ‘우주와의 합일’이 곧 불교의‘견성(見性) 체험’과 같은 것인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그건 태국이든 한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하여간에, 자기의 근기에 따라서 견성이고 성불이고 있는 거지, 기복으로 막 좇아가고 형상만 보고 좇아가고 이론만 가지고 따르는데 무슨 견성이 있겠소? 그러니깐 견성을 못 하는 것도 똑같고 견성을 하는 것도 똑같고, 다른 데가 하나도 없어요. 사람들 마음 근기에 따라서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 그것뿐이죠.
▲질문자1: 일반적으로 타 종교에서는 기적 현상을 가끔 얘기합니다. 물론 저 자신은 기적 현상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만, 불교에서의 영험과의 차이점을 누가 물었길래 한번 여쭈어 봅니다.
▲스님: 지금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그랬죠? 허허,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할 필요도 없고 믿는다고 할 필요도 없어요. 그대로 우리의 근기에 따라서 나오는 거니까. 기적도 아니고 영험도 아니에요. 단 하나, 우리들은 다 갖추어 가지고 있어요. 갖추어 가지고 있으니까 갖추어 가지고 있는 것을 바로 우리가 꺼내 쓸 수 있는 그런 능력만 있다면 그대로 기적이고 영험이니까요.
▲질문자1: 그래서 믿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스님: 하하하.
▲질문자1: 본래 그러하고 그러한 것이 진리라면 굳이 불교라고 이름 붙일 것이 없는데, 생각나기 이전 자리를 알기가 힘들어서 불상이니 불경이니 불교의식들이 필요치 않으면서도 필요한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스님: 왜 마음들이 그냥 살면 될 거를 왜 몸뚱이를 갖다가 형성을 시켜놓고 이렇게 고생을 시킵니까? 아니 몸뚱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또 낙이 없으면 재미도 없고, 고생이 없으면 낙을 모르고, 그러니깐 이게 첨부돼서, 정맥과 동맥이 서로서로 오르고 내리듯이, 우리가 지금 상대성으로서 오르고 내리는 거 아닙니까?
또 한 가지를 비유하자면, 만물상점을 내는데 만물상점이라고 간판을 써 붙여야지 만물상점이 되는 거고 만물을 다 팔고 들이고 사고 하는 거지 아, 만물상이라고 간판을 붙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삽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방편이자 진실이고 진실이자 방편이에요. 그러니까는 아니다 기다도 없어요. 그냥 그대로예요. 우리 사는 게 그대로예요, 그냥.
▲질문자1: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 사이 독특한 한 점을 역력히 아는 것이 지름길인지 궁금합니다.
▲스님: 아, 그거야 당연하죠! 예를 들어서 내가 집을 지을까 말까? 집을 짓는 것도 안 짓는 것도 법이다 이랬죠. 그런데 그거는 양면의 흐름이고, 집을 짓든지 안 짓든지 내가 결정을 지어야만 되는 거죠. 그게 법이에요. 그러니까 짓는다고만 고집할 수도 없고 안 짓는다고 고집할 수도 없으니 너희가 지어서 좋을 일이라면 짓고 짓지 않아서 좋을 일이라면 짓지 마라 이거죠. 그러니 네 마음 가운데 있지 않느냐, 이런 겁니다. 네 마음 가운데서 짓든 안 짓든 결정지어서 하는 것이 그대로 법이니라! 이런 거죠.
▲질문자1: 긴 질문에 세세한 가르침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새해에도 큰 법륜 굴려 주십사 권청드리옵구요, 다시 한 번 동체대비 큰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대중 박수)
▲스님: 허허허. 이렇게 마쳤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항상 찰나찰나 우리는 같이 이어져서 연결되어 돌아가고 있고, 아주 광대무변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스님을 못 봤으니깐 이렇다, 이렇게도 생각하지 마세요. 미국도 멀지요? 강을 건너가야 하고 그런데도 “스님, 이렇고 이렇습니다.” 할 때 그 한찰나에 오고 감이 없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 문 내려서는 거리와 미국 가는 거리가 똑같습니다. 한생각이기 때문에! 또 달나라를 생각하든지, 뭐 태양을 생각하든지 우주 전체를 생각하든지, 그것도 바로 요기 서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훌륭한 건 뭐냐? 한 벽만 보는 게 아니라 전체를 본다는 얘기죠. 그렇게 묘하고 광대무변한 법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건너뛰어서 껑충 뛸려고만 하지말고, 한찰나에 한 계단을 올라설 수 있는, 한 계단을 올라설 수 있다면 두 계단도 세 계단도 다 올라설 수 있을 때, 그때는 확 사방이 터져서 상하도 터지고 사방도 다 터져서, 한찰나에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고, 듣는 것 없이 들을 수 있고, 보는 것 없이 볼 수 있고, 하는 것 없이 할 수 있고, 이렇게 되자 다섯 가지 오신통 속에서 확 벗어나면서 바로 평등공법의 상투자리를 쥐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열심히 해서 세세생생 삶의 보람과 내가 얻었으면 일체 중생들에게 줄 수 있는 그런 여건을, 자유인의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분들이 되시기를 정말이지 간곡히 빕니다. (대중 박수)
수만 명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체가 없기 때문에 전부 한데 모아도 없으면서도 진실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떨어지고 헤어지고 이런 것도, 이건 자유자재권이라고 생각해야죠. 여러분이 생각하는 대로에 한찰나에 불이 들어온다고 그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