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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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으로만 생각하면 무의미 계를 받는 뜻 마음으로 새겨야
마음 속 자리잡은 창살없는 감옥 박차고 나설 수 있어야 자유인


수계의 공덕에 대하여

부모님이 모두 불법에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선원에 다니면서 무척 마음을 내고 공부해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랬습니다. 그러다가 초파일을 계기로 선원에 나오시게 되었고,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법회도 참석하시면서 마음도리를 어렴풋이나마 느끼셨는지 이번에 수계를 받으시겠다고 하셔서 기쁜 마음으로 가족 모두가 수계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저희 부모님께서 불법에 귀의하신 이 마음이 영원토록 이어질 수 있도록 수계를 받고 나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생활을 해야 참다운 불제자가 될 수 있는지, 또 수계를 받게 되면 어떤 공덕이 있는지를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매년 수계법회 때마다 많은 분들이 계를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방편으로만 계를 받는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이 둘이 아닌 까닭에 부처님의 뜻이 한 찰나에 온 누리에 서리는 것이고, 악한 일에 휘달리지 않을 것이고, 또는 모두 한마음으로 돌아가면서 공부에도 게으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여우 꼬랑지래도 봐 둬야 문리가 터지고 충전이 되지, 그래서 우리가 그대로 전력이나 자력 통신력 광력이 같이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계를 받는 그 뜻을 마음으로 새겨야지, 그냥 한번 받았다 두 번 받았다 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계를 설하는 사람도 책임이 있고 받는 사람도 책임이 있고 부처님의 뜻도 책임이 있으니 잘 생각해서 계를 지키며 또 그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극락에 간다고 하죠? 그러나 계를 받은 사람들에 한해서는, 만약에 승천해서 극락으로 가는 길을 지금 청와대로 비유를 한다면, 청와대에는 근거가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계를 받은 그 뜻의 확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생전에 거추장스럽게 방편으로 그냥 떨어뜨리는 게 아닙니다. 물론 나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거짓으로 했다면 내 책임이 아주 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계를 설하는 사이 없이 설하고 주는 것이니 여러분도 받는 사이 없이 받아서 오직 뜻으로 간직하면서 허탈히 생각하지 마시라 이겁니다.
오늘이라는 이 자체도 찰나찰나 공해서 변해 돌아가고 부서지고, 우리도 태어나서 자라면서 젊어지고 늙어지고, 늙어지면 병들어 없어지고 찰나찰나 또 생하고 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어서 한마음으로, 한마음에서 나오는 걸 한마음에다 되입력 할 수 있는 그런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니 여러분은 그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애를 써서 피땀을 흘리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벌어서 옳게, 단 10원을 쓴다 하더라도 옳게 써야지 허무하게 써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에 따라서 지속되기도 하고 길을 가다가 끊어질 수도 있고 현실에 한 발짝도 내밀지 못한 채 끊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계를 주는 내 책임도 있느니 만큼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그렇게 계를 받는 것이, 계첩을 받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거짓이라면 여러분이 한번 지켜보고 부처님의 뜻이, 삼라만상 우주 세계가 말없이 말로 전달되고, 손 없는 손이 온 누리에 꽉 차 있고, 걸어다님이 없이 평발을, 부처님의 발은 한발로 디뎠기에 평발입니다. 이렇게 광대무변한 도리를 여러분은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정말 모두 멋쟁이로 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당당하고 떳떳하게 참다운 인간으로서 진실하다면 무엇이 두려울 게 있겠습니까? 자기 양심이 진실하다면 무엇이 두려울 게 있습니까? 죽인대도 두려울 게 없고, 살린대도 뭐 좋을 것이 없고 항상 중심을 가지고 평등한 마음으로 두루 굴리면서 자기라는 생각은 쑤욱 빼버린다면 일체가 한마음으로 세세생생 자유인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운명론과 자유의지에 대하여

부처님 말씀에 ‘자신의 현재를 보면 자신의 과거를 알 수 있고 자신의 미래를 보려면 자신의 현재를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게 지금 닥치는 순간순간의 일들은 저의 의지입니까? 아니면 저의 과거의 업에 의한 것입니까? 과거에 의해 현재가 결정된다면 그 현재에 의해 또 미래가 결정되는 건 아닌지요? 업이란 것과 자신의 의지라는 것은 어떻게 돌아가는 것입니까? 제가 보기엔 참 상반되고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운명론과 자유 의지론의 차이라고 할까요? 정말 궁금합니다.


팔자와 운명은 누가 준 것이 아니죠. 만약에 회사를 운영하다가 자기네들이 어제 잘못해 가지고 오늘 회사가 망했다면 그게 남이 망하게 한 건가요? 자기가 망하게 만든 거죠. 그렇게 과거와 현실을 딱 대 보면 그냥 알아지는 거죠,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남의 보증을 서고선 그냥 집을 날리고 온통 야단이 나잖아요. 그런 것도 바로 엊그저께 그렇게 해 가지고 오늘 집을 뺏기고 그 야단들을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그 고통을 누가 준건가요? 자기가 만들어서 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마음을 잘 써라, 마음의 길을 잘 정해라, 결정을 잘 해라, 자기 마음이라고 그냥 마음대로 쓰지 말고 생각을 잘해서 마음을 써라 이런 거죠. 그래서 한생각을 잘해서 말 한마디를 잘하고, 생각을 잘해서 이끌어가는 바로 다스림의 마음의 선장이 얼마큼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이것은 좋다, 이것은 언짢다 하고 자주 이렇게 개념적으로나 관념적으로 나가다보면 착이 붙게 돼요. 왜 착이 붙게 되느냐 하면, 자기도 모르게 벌써, 오관은 컴퓨터와 같아요. 들이고 내고 하는 거를 책정이 다 된다고요. 그러니까 이걸 털어버리기 위해서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다 교차로의 주인공을 잡고선 모든 걸 몰락 놓으라고 하는 도리가 바로 법망에 걸리지 마라! 이거거든요. 법망에 걸렸다 하면은 이건 체크가 자꾸 되니까, 그러니까 한 생각을 잘해서 만약에 몰락 놔 버린 채로 내가 묵묵히 걸어갈 수 있다면 전체에 녹아 버리는 거예요. 과거 억 겁서부터 수미산 같은 것이 다 녹아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한생각을 잘못하면 수미산을 오히려 씌워요. 모든 것을 씌우기 때문에 자기는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이 지구 안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항아리 속에서 항상 벗어날 수 없어서 돌고돌고 또 모습을 바꿔서 다시 돌고 다시 돌고 이러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일체를 상대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자기 탓으로 알고 나의 근본에 모든 것을 놓아 나가야 합니다. 모든 것은 자기 탓이고, 잘못됨도 잘됨도 모든 게 다 자기 탓이지 누구한테 하나도 돌릴 게 없어요. 그런데 자기 탓이라고 돌릴 때, 나는 “아, 참 못나기도 했지! 모든 게 내가 해놓고 내가 누구를 원망하랴!” 했을 때에 비로소 누구를 원망하랴! 하는 것도 내버리게 되는 거죠, 몰락! 그럴 때 아주 편안함을 느끼면서 그대로 여여하게 갈 수가 있어요. 하나도 거리낌 없이 그냥 홀로, 홀로가 아니면서도 홀로이 그냥 여여하게 갈 수 있어요.
그래서 팔자나 운명이나 윤회가 있어서 우리의 삶이 그런 것이다라고 이런 얘기를 할 필요조차도 없어요. 왜냐? 내가 지금 죽었다면, 우리가 지금 죽었다면 그런 이유가 붙는 것이 하나도 없었을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죽질 않았기 때문에 모두 이유가 붙는 거예요. 죽어 봐요! 죽어보면 윤회에 끄달릴 것도 없고, 말에 끄달릴 것도 없고 행에 끄달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요. 그래서 그전에는 미련스럽게 “죽어야 되나 보다!” 했는데, 그래서 그 얘기를 했잖아요? 죽지 않고 죽는 방법을 알라고요.
그런데 그것을 자꾸 반복하다가, 주인공 하나를 세워놓고, 그것도 이름해서 세워놓는 겁니다, 여기 나올 때도 빈자리고 사라질 때도 빈자리이니까 공(空)이거든요. 안 그래요? 공인데 그 공은 아주 그릇이 비면서도 여여하게 있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이거 하나를 거머쥐고서 여기에다가 그냥, 그 공에서 자기도 공으로 들어가서 다 놔 버리는 거예요. 심봉이 즉, 바퀴를 돌리는 거지, 바퀴가 심봉을 돌리는 게 아니라 힘을 거기 한군데다가 가해라 이겁니다. 모든 걸 심봉한테다 일임해라 하는 거예요. 그러고 바퀴는 그냥 돌아가는 거다 이거죠. 그렇게 한다면 언젠가는 그것이 그냥 여여하게 다 스스로 놔져 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행복한 것도 아니고 또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면서 빙긋이 웃음이 나올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허무하다는 생각이 없게 돼요, 영원하기 때문에. 이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내가 만약에 거짓말을 한다면 이 말 한 마디에 여러분으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요만한 거 하나 에누리 없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역대의 부처님들과 선지식들께서 말씀하신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너무나 절감이 되면 운명이나 팔자에 끄달려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한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삶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하는지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하는지 스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 막 풋내기 의사로 앞으로 전문분야를 선택해야 합니다. 짧은 지식이지만 최근의 의학은 점점 밖으로 나아가 뿌리에서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말이지요. 이런 생각에 요즘에는 정신과를 하려고 합니다만 서양의 정신과라는 것도 세포나 물질을 분석하듯이 정신을 분석하는, 근본을 본다는 것에는 매우 생소한 듯 합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주인공의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니 주인공에 놓고 믿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만 정말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나와서 자기가 있는 줄 알았고 모든 펼쳐진 물질세계를 보고 배우고 그렇게 나가고 있죠. 그런데 나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은, 사람이 인간으로서 의학자의 노릇을 하려면은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인간으로선 도저히 할 수 없는 문제가 나옵니다. 그러니깐 그거를 뒤바꿔서 애당초에 그놈을 만든, 즉 말하자면 형성시킨 그 자리에서 자유스럽게 해결하라고 맡기라는 겁니다. 아는 건 아는 것대로 바깥에서 방편으로 쓰고 안에서는 그렇게 해라 이겁니다.
안에서 그렇게 안 하면은, ‘그렇게 안 하면’이 아니라 그렇게 믿지 않고 그렇게 안 하면은 그 어떤 것도 소생을 시킬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즉 말하자면은 에너지가 나올 수 있는 그 수반 역할이 되질 않으니까요. 그런 경우에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만 되는가, 그걸 할 수가 없어요. 손을 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딱 뒤집어서 형성시킨 그 자체에다 맡겨라 이런 말이죠.
그러니깐 어떠한 용도래도 다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붙여지지 않는 건 붙여지고 또 붙여진 걸 떼어야 될 때는 떼고 이렇게 자유권을 가지고 갈 수 있어야만이 되지 않겠느냐 이겁니다. 이게 말을 하려니까 뒤집어라 하는 거는 우리가 물질로서 모든 거는 하고 나가되 진짜 결정지어서 하는 거는 뒤집어서 주인공이 하게 해라, 주인공이 하게 하면은 보이지 않는 데를 모두 겸해서 통신이 다 되니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끔 다 모아서 결론을 짓고 하는 거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깐 의사 노릇을 해 나가는 데는 그런 결정이 필요하다 이거죠. 만약에 어떤 병자가 들어왔을 때 겉으로는 의사 노릇을 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거기서 진짜 하게 해야 된다는 거죠. 진짜 자기가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 겉으로 이렇게 사는 거는 즉 말하자면 바람결에 날아다니는 것과 같이 살고 있는 거다 이거예요.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하는 것은 여러분이 학식으로나 지식으로나 모두 논란이 일어나는 걸 보고 배워서 하라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돌아가는 대로, 어느 길로 가야 되는지를 모를 때는 거기다 그냥 맡기고, 알 때는 진짜 자기만이 할 수 있다 하고 맡기고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병자가 들어와도 자기가 의식 중에 자기가 그냥 하고 있는지, 자기가 하고 있는데 그거를 정신계로 볼 때는 정신계에다 맡기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거든요, 그냥. 그렇게 하다 보면은 맡기고, 맡기고 거기서 하게끔 딱 세워놓고선 모든 일을 한다면 그게 제대로 가는 거죠. 약이나 이런 거는 방편이 되고, 거꾸로 뒤집힌, 나오기 이전에 거기서 다 하는 거예요. 치울 건 치우고 넣을 건 넣고 이렇게 해서 다 하는 거죠.
그래서 거기에 모든 게 들어간다 이거예요. 수명에 관한 건도 들어가고 전체가 들어가죠. 전체가 들어가니깐 전체를 가지고 있는, 쥐고 있는 그 자가 해야지 전체를 쥐고 있지 않는 껍데기가 해선 안 된다 이겁니다. 뭘 하나 하려면 모두 허가를 맡아서 해야 된다 이러죠. 그래서 여기 가서 하고 저기 가서 맡아야 하고 전부 맡아야 일 하나를 맡을 테니 그거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그러고도 될지 말지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거를 몽땅 우주와 더불어 삼세를 다 쥐고있는 그 자리에 다 맡겨라 이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수술할 때 ‘이거 하나 줘.’ 이러면 주고 또 ‘저거 하나 줘.’ 그러면 주고 그러는 것과 같이 불러서 다 하는 거죠. 이래서 보이는 데서는 그 의사가 영웅이 되고 안 보이는 자기한테서는 영웅이 내가 아니라 바로 주인공이니까 나는 한 게 하나도 없노라 하는 거죠. 부처님께서도 한 일이 하나도 없다고 하신 것도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깐 마음으로 점프를 해라 이거예요. 한 가닥 한 가닥 현실에 해주는 건 열심히 해주되 그렇게 해줘서 낫는 게 아니다 이거예요. 바로 뒤집어서 거기다 맡겨라, 거기서 다 보살도 되고 간호원도 되고 부처는 회장이 될 게 아니냐 이겁니다. 이렇게 해서 거기서 그냥 고치게끔, 손 안대고도 그렇게 고칠 수 있는 건 그 자리밖에 없다 이겁니다. 그리고 둘로 보지 말고 진짜로 믿으라고 하는데, 그래야 보이지 않는 그쪽에서 결정을 받아서 세포가 모두 작용을 하고, 죽을 건 죽되 다시 살아나게끔 되는 수도 있고, 또 죽일 건 죽이고 살릴 건 살리고 하면서 다시금 바꿔지면서 재생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말로만 의학자다 과학자다 할 게 아니라 자기 살아나가는 생명과 더불어 모든 일체를 다 자기 주인공에 맡기는 공부입니다. 우리는 지금 허공에 떠서 바람처럼 날아다니면서 삶이 없이 사는 형국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공중에 그냥 떠서 주머니 안에서 그 주머니가 어디로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주머니 안에서 무슨 생각들을 하고 살아나가느냐 이겁니다. 이 마당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태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의학자다 하고 계시지만 그 자연의 길을 갖다가 제대로 파악 못하는 분들은 길을 찾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나가면서 일생 동안에 어떠한 일을 해서 훨훨 벗고 일어설 수 있나, 훨훨 벗고 일어서는 동시에 어떠한 것을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게 할 수 있나 하는 이런 문제들이 겹쳐서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도리를 모르고는 뭐를 연구를 해 낼 수가 없어요. 천차만별의 갖은 각색이 내 육신 안에 들어있는 것만큼 천차만별의 일들이 색색 가지가 있거든요. 그런데 이 길을 찾아서 가는 사람 저 길을 찾아서 가는 사람 천차만별이죠, 그것도. 그러나 길은 여러 길인데 나가는 고장은 한 고장이에요. 가지 수는 여러 가진데 한 고장에서 나가죠. 물을 한 우물에서 푸는데 여러 용도로 쓰이듯 한 우물에서 여러 가지로 쓰이는 거죠. 그와 같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말을 안 해도 생명의 삶의 모든 거를 거기에다가, 공부하는 사람도 다 그렇습니다. 거기에다 다 한데 모아야 된다, 한데 믿고 한데 모아야 된다 이런 말입니다. 모으지 않는다면 바다를 이룰 수가 없고 바다를 이룰 수가 없다면 그걸 수증기로 올려서 정화를 시켜서 모든 만물을 먹일 수가 없습니다. 살릴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의학자로서 연구하는데도 일심으로 이거를 동하지 않는다면은 여기에서, 즉 말하자면 주장자에 불이 켜지질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장자는 있지만 주장자에 불이 켜지지 않는다면 그건 소용이 없는 거죠. 전력은 많지만 불을 켤 수 없다면 그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와 같은 겁니다.
그것과 같이 우리는 자기 주인공 자체에 자기 생명까지도 전부, 그러게 생명의 근본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다 거기에 매여있단 얘깁니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만나는 것도 하려고 하는 것 전부가 다 그 자리에 매여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연구라고 하기보다도 누구나가 다 자기가 인생으로 태어났으면 인생으로 태어난 그 값어치를 그대로 하고 가야 하는 겁니다.


참답게 내려놓으려면…

내려놓을 때 맥없이 내려놓는다는 의미와 참 내려놓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내려놓을 때 더 좋게 되려고 하는 미세한 마음의 기대라도 있어선 안 되는지요?


옛날에 어느 누가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가는데 주막에서 쉬다가 너무 더워서 바깥으로 나와서 바람을 쐬느라고 앉았는데, 그 아내가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해 줘서 모은 푼돈을 주머니에 넣어주던 생각을 하니까 이번에 과거를 못 보면 참 큰일이거든요. 어린 자식들과 노부모를 생각해도 그렇고, 아내는 남의 집에 다니면서 자기를 공부시키느라고 일을 하니까 살기가 무척 고통스러웠던 모양이죠. 그래서 이번에 과거를 못 보면 얼굴을 들고 들어갈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아주 죽을 각오를 하고선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앉아있으니까, 어느 초췌하게 입은 노인네 한 분이 척척 걸어오더니만 “어이구, 다리 아퍼.”그러고 쉬더랍니다.
“자네는 어디를 가는 행각인가?” 하길래 “지금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갑니다.” 하니까 “자네 과거를 보러 가려면 이거를 보게.” 그러고선 주머니에서 책을 한 권 꺼내주거든요. 책을 한 권 주는데 펴보니깐 백지예요, 백지. 이 책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과거를 볼 수 있겠느냐 하면서 그 백지 한 권을 주고 가더랍니다.
그런데 그 백지를 보고서는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답니다. ‘아하, 과거 보는 글자 뒷면에는 꼭 이 백자가 필요하구나’ 백 백자는 고개를 들었고 백을 그냥 둥글리면 둥글려졌고, 하나도 없을 수도 있고 전체가 꽉 찰 수도 있고, 꽉 차서 중심을 들어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곤 과거를 보러 갔는데 아, 그 대목이 나온 거예요. 그래서 과거에 붙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어렵게 생각을 하란 얘기가 아닙니다. 딱 기억해 둘 거는 ‘선장이라는 뿌리, 주인공을 의지해서 잎새 하나하나가 다 살고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잎새라는 건 내 몸 속의 생명들을 말합니다. 잎새 하나하나도 뿌리에 의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큰 덩어리, 뿌리에 달린 덩어리는 바로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을 살게 하는 주머니예요, 우리가 지금 주머니예요. 주머니인데 바로 그네들의 시자도 되죠. 그러니까 우리 전체가 시자라는 겁니다. 속에 들어있는 거, 거죽에 지금 싸고 있는 이 몸뚱이 자체가 전부 그 중심을 다스리는 시자도 돼요. 그 중심이 꿰어져 있어서 수레와 같이 돌아가니 ‘법륜 바퀴’ 라고 해도 되구요.
그러니까 절대로 잊지 마라 하는 건, 단 하나 내 뿌리에서 들이고 내는 것도 그놈 속에서 나오는 거고, 울게 하는 것도 아프게 하는 것도 일거수 일투족이 다 거기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을 해야만 됩니다. 그러고 무조건 믿고 무조건 거기에 놓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냥 “너 알아서 해.” 이러지 마세요.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니까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 “너 알아서 해.” 이러면 그냥 평등하게 돼버리죠. 그러니까 아픈 거라든가 가난한 거라든가 어떠한 일이 벌어졌다든가 그러면 자기의 용도에 따라서 잘되는 거는 감사하게 거기 놓고 안 되는 거는 “너만이 할 수 있지 않아?” 또 어떤 사람은 “당신만이 할 수 있잖어.” 또 어떤 사람은 “뿌리만이 할 수 있잖어.” “주인공만이 할 수 있잖아.” 별 이름을 다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이거는 꼭 그 하나에서 나고 듭니다.
어떤 살림을 하고 살더라도 공부하는 거는 평등합니다. 돈이 있고 없고도 없고, 잘나고 못나고도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용도에 따라서 병이 나면 병이 나는 대로 자신이 대치를 하고, 가난해도 자신이 대치를 하고,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다 자기가 대치할 줄 알아야 몸 속에 있는 자생 중생들의 조복을 받게 됩니다. 조복이라는 거 아시죠?
몸 속에 있는 생명의 의식들이 내가 한 생각을 하게 되면 같이 따라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마음이 되는 것을 조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거 한마음으로 통신이 되지 않는다면 제각기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된 대로 그냥 쏟아져 나오게 돼 있어요. 입력된 거를 없애는 도리를 만날 일러드렸죠? “거기다 놓게 되면 앞서의 입력이 없어진다.” 이렇게요.
그러니까 우린 열심히 공부해서, 차원 낮은 인간으로 짐승으로 뒹굴면서 세세생생 벗어나지 못하고 살지 말고, 우리가 마음으로 지금이라도 자꾸자꾸 벗어나게 되면 위 조상들도 그렇고 아래 자녀들도 그렇고 내 몸 속의 자생중생들도 자꾸 조복을 받게 되고 벗어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서어서 활발하게 공부해서 편안하게 살 수 있게끔 더 노력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죽음에 대하여…

제가 제일로 가슴 답답해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문제입니다.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그리고 스님께서는 내가 본래 공했으니 모든 것을 근본에 놓으라고 가르치시는데 그렇게 모든 것을 놓아나가다 보면 죽어서도 이리 저리 헤매지 않고 당당하게 내가 가야할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으니깐 일거리가 있고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것이니 한마음에다 놓고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밖에 없다 하는 믿음을 갖고 사신다면 바로 일상생활이 참선이요, 또 어저께가 없고 내일이 없는, 오늘의 앞뒤가 다 걸림 없이 뚫린 대나무 퉁소와 같이 일상생활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망상이라고 끄달리고 모두 끊으려고 앨 쓰지 않고 그 망상이 바로 부처를 이루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대로 놓고 들어가는 것이 참선이요, 열반의 길로 그냥 들어가는 길입니다.
우리 마음은 체가 없어서 은산철벽도 없는 것이고 사방이 막힘도 없고 지붕도 없이 어디든 사방이 툭 터졌으니 내 갈 길이 걸림이 있으며 또는 내 가는 길에 막힘이 있으랴 하는 겁니다. 내가 마음먹는 대로 거침없이 지구 바깥을 벗어나고 어느 혹성이래도 벗어나고 펄펄 끓는 물 속이라도 거침없이 뛰어들 수 있는 것인데, 여러분은 의식으로 물이 깊어서 나는 못 간다는 생각 때문에 옴짝달싹을 못하는 것이지요.
지금 여러분이 몸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 의식이 죽어도 공부를 안 하면 그냥 남아 있어 가지고 ‘물에 빠져 죽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있어서 못 건너가는 겁니다. 강을 건너는 데도 마음이 체가 없어서 한순간에 빛보다 더 빨리 건너 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살아생전에 참된 마음을 몰라서 그냥 그 의식으로 빠져서 죽을까 봐 건너가질 못하는 겁니다. 의식으로 사니까 말입니다.
그러고 또 불의 소용돌이가 있으면 건너가질 못해요. 그 속에 들어가질 못하는 거죠. 왜냐하면 그 불 소용돌이가 있으니까 뜨거워서 거기 타 죽을까 봐 못 들어가거든요. 그러니 부처님 세계를 맛볼 수가 없는 거죠. 우리가 살아생전에 그곳을 건너가지 못한다면 죽어선들 건너가리까?
또 그나 그뿐입니까? 은산철벽이 막혀 있으면 높아서 뚫질 못해서 못 간다는 겁니다. 살아생전에 그렇게 넘어가지 못하니 죽어서도 못 넘어 가는 거죠. 귀신들이 윽시글득시글 하고 독사가 윽시글득시글 한데 잡혀 먹힐까 봐 또 못 갑니다. 그러니 그것만 보더라도 의식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어느 누가 죽었는데 영이 자기가 죽은 줄 몰라요. 자기가 죽은 줄 모르고 그냥 가다가, 아주 좋은 집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 집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니까, 자기의 친구가 스님인데 그 스님이 탁 막더라는 거죠. 좋은 집으로 들어가는데 왜 막느냐고 하니깐 “너는 지금 모습이 없어진 줄도 모르지?” 이러면서 “지금 새둥우리로 들어가는 건데 좋은 집으로 들어가는 거냐? 새둥우리로 가면 새밖엔 더 되겠니? 그러면 사람들한테 새 대접밖에는 더 받어?” 하더랍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서 깨어난 게 바로 눈을 뜨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단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깐 자기가 살아 있는 줄 알고, 물에 들어가면 빠져 죽을까봐 겁나고, 불에 들어가면 타 죽을까봐 겁나고, 또는 지금 자기 오장 육부의 모든 거를 제껴 보면은 조그마한 생물들이 전부 크게 됐다면 그거는 거기를 한 발 딛을 수도 없죠.
그러니까 아직까지 우리가 살아서 이 도리를 알아서 여여하게 걸림 없이,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그냥 동일하게 잘 살 수 있는 그런 길을 찾는다면, 자기 주인공을 진짜로 믿는다면, 그런 요소가 다 걸림 없이 주어지겠죠. 그러고 자기 갈 길을 다 알게 되고요. 남도 이끌어 줄 수 있고요.
그러니 여러분이 지금 내 마음에 체가 없는데 뭐 때문에 강을 못 건너가느냐, 불을 못 지나가느냐, 독사가 있다한들 왜 못 가느냐, 은산철벽을 왜 못 넘어가느냐 하는 이걸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난 여러분한테 연습시키는 거예요. 죽어도 거기에 걸리지 않게끔요.
이렇게 하나하나 진실하게 걸어가는 사람의 참뜻을 여러분은 아셔야 하고, 자유인의 길이라는 것이 그렇게 소중하다는 거를 아셔야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넉넉하고 지혜 있고 문리가 터져서, 마음으로 창살 없는 감옥을 만들어 놓고 헤매다가 그 감옥을 그냥 툭 처 버리고 한 찰나에 나서는 그런 당당한 자유인이 되세요.
200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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