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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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시오’가 아니라 ‘할 수 있다’고 믿어야
“얼마나 죄 지었길래…” 한탄 말고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재료 삼아야

청주에 계시는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를 하게 돼서 감명 깊습니다. 우리가 왜 자기 뿌리의 근거를 믿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것을 잠시 잠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기 청주에 오니까 더러더러 마음 공부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생무지인 분들도 많습니다. 아주 간편하게 나무로 비유를 하죠. 여러분 보실 때에 갖가지의 나무들이 모습은 다 다르지마는 그 뿌리는 다 같습니다. 그렇죠? 저 나무들 뿌리가 말입니다. 꽃나무든 또는 버드나무든 소나무든 간에 모두 그 뿌리를 의지해서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잎사귀 하나하나도 그 뿌리가 아니라면 살수가 없습니다. 그렇듯이 사람도 역시 자기를 끌고다니는 자기 생명의 근본, 뿌리가 있기 때문에 말을 하고 움죽거리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들 어떻게 믿느냐 하면, 형상을 믿습니다. ‘형상을 믿고’ 하는 건 이름과 상대를 두고서 기도하는 방식으로 나간다 이겁니다. 달마대사가 양무제더러 아무리 스님네들한테 옷과 음식을 공양 올리고, 절을 지어서 보시한다 해도 공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복이기 때문입니다.
왜 기복이라고 그러느냐? 내 나무 내 뿌리는, 내 뿌리에서 정맥 동맥이 상통하듯 그렇게 돌아갑니다. 나무가 위에서는 공기와 태양과 모든 에너지를 흡수해서 아래로 내려보내고, 아래서는 땅 지기와 철분과 또는 황분과 수분을 위로 올려보냅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정맥 동맥이 돌아가듯 한쪽만 있어 가지고는 돌아갈 수가 없어요. 여러분은 지금 한쪽만 가지고 사시는 겁니다, 물질세계의 한쪽만 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질세계 50%만 가지고 살기 때문에 정신세계 50%가 부족하다는 거죠. 즉 말하자면 동맥이 있는데 정맥이 없다거나 정맥은 있는데 동맥이 없다거나 한다면 아예 사람이 사람 구실을 못하죠.
그렇듯이 믿음이라는 것이 내가 내 뿌리를 믿어야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내 뿌리를 믿지 않고 딴 나무가 울창하다고 해서 그 나무를 보고 ‘저 나무가 저렇게 큰데 나에게 에너지를 좀 주었으면! 나를 잘되게 했으면!’ 하고 기도를 한다면 그것이 바로 기복입니다. 그 나무에서 내 나무로 뿌리로 에너지가 올 수 없거든요. 절대로 올 수가 없습니다. 또 딴 나무 뿌리가 이쪽 나무를 도와주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이웃에서 음식을 먹고 싶어하면 만들어서 조금 줄지언정, 복은 조금 있을지언정 공덕은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그 뜻을 자세히 들으시고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이 몸을 가지고 한철 나는 건데 그 한철 동안에 어떻게 해야 옳으냐는 것을 한번 판단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기복으로 하는 건 이익이 하나도 없고, 때로는 주변 동네에서 가난하면은 쌀이나 몇 됫박 얻어먹을 뿐이지 내가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해서 내 마음대로 먹을 수는 없는 겁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 나무는 내 뿌리를 믿고 내 주인공의 뿌리만이 나를 이끌어줄 수 있고, 우리 가정을 이끌어줄 수 있고, 우리 식구를 다 밝게 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스위치 하나만 올리면은 우리 가정 전체에 불이 켜져서 모든 식구가 다 밝게 살 수 있다 하는 거를 명심하십시오.
또 한 가지는 내면에, 여러분 내면에 지금 생명체들이 아주 가득 차있습니다. 가득 차있는데 그 가득 차있는 생명체들이 누구인 것입니까? 한 부분만 파워가 일어나도 그 집합소는 무너져요. 이게 집합소거든요, 나의 집합소! 그리고 내가 나를 다스려서 이끌어 가는 선장이기도 하죠. 그렇다면 몸 속에 있는 모든 의식들이 과거로부터 생긴 건데 그 업식들이 아니었으면 또 태어나지도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번뇌다, 의식들이 모두 마구니다, 이렇게만 생각할 게 못 되지요. 그 악업 선업 업식들이 없었더라면 내 영혼이 정자 난자를 빌어서 이 세상에 출현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나빠도 나쁘다고 할 수가 없고 좋아도 좋다고 할 수가 없는 진리죠. 알고 보면 그렇게 묘한 법입니다. 습관적으로 나쁜 거를 나쁘다고 하지 않는 것이 넓은 마음을 구성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대충 요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점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자에 점안식을 했는데 왜 점안식을 또 하느냐 이런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눈에도 속눈이 있고 겉눈이 있습니다. 귀도 안귀가 있고 겉귀가 있습니다. 과거에 살던 나의 자성 부(父)와 현재의 나가 있습니다. 현실에 사는 자(子)와 둘이 아니게 눈이 밝아져야 속눈이 떴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신세계 50%를 왕창 내가 간파하려면 딱따구리가 나무를 뚫듯이 그저 자문자답하면서 언제든지, 내가 한번 움죽거리는 거나 생각하는 거, 모두가 둘이 아니라는 걸 아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몸뚱이 속의 모든 생명체 의식들이 먹는 것도 혼자 먹지 않게 하고, 하는 것도 혼자 하지 않게 하고, 말하는 것도 혼자 말하는 게 아니고, 혼자 만나는 게 아니고, 혼자 일하는 게 아니고, 혼자 버는 게 아니고, 전체가 혼자 하는 게 없어요.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몸 속에 그렇게 많은 생명들이 있는데 혼자 먹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공생(共生)이면서 공심(共心)이에요. 그리고 공용(共用)·공체(共體)·공식화(共食化) 하고 돌아가고 있죠.
그런데 내가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잘못한 것이 없으며, 병고가 있다고 하더라도 개별적으로 병고가 없으며, 업이 있다고 해도 업이 없으며, 붙을 자리가 없다 이겁니다. 그렇게 많은 것이 공동분담으로 쉴 사이 없이 찰나찰나 돌아가기 때문에 없다고 하는 겁니다. 쉬었다가 가다가 쉬었다가 가다가 이래야 그게 붙을 자리가 있는데 쉴 사이 없이 돌아가거든요. 한찰나에 돌아간단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디 있겠느냐,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너그럽고 넓고 크게 좀더 지혜롭게 마음을 내야 하는데 마음은 항상 살아오던 습에 매달리고 착에 매달리고, 애정이나 사랑에 끄달리고, 욕심, 악의적인 모든 것을 다 한데 합쳐서 여러분은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으니 거기에 그만 막히는 거죠.
그리고 더군다나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똑같이 기복으로만 이끌어가니, 옛날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절은 많지만 그 절에 사람이 있어야 부처가 있느니라. 장님이 장님을 끌고 가다가는 넘어지고 구덩이에 빠지지만, 눈뜬 사람이 장님을 끌고 갈 때는 절대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느니라.”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침착하게 잘 생각하셔서 청주에서도 공부 열심히 하셔야 될 것입니다.
아까 얘기했듯이 얘기를 해야만이 납득이 될 것 같습니다. 부처님 점안식을,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체 부처님의 마음은 항상 여러분 마음으로 통해서 갑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렇게 통하는 걸 모르고 받아들일 수가 없고, 그릇도 없고 그래서 받아지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제불과 여기 계신 우리 스님네들의 마음과 첨부돼서 종합해서 한마음으로 눈 없는 눈, 귀 없는 귀, 발 없는 발, 손 없는 손,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가는 그 자체를 그대로 갖다가 전달해 놓은 겁니다. 그래서 마음을 전달해 놓으면은, 꽃에도 우리의 마음을 전달하면 아주 이쁘게 자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아휴! 저건 별로야! 보기 싫어.’ 하면은 빨리 시듭니다, 꽃도. 그렇듯이 우리의 마음이 눈이 밝고 귀가 뜨이고, 발 없는 발로 손 없는 손으로 가정을 이끌어갈 수 있는 마음의 발전을 위해서 또는 창조력을 위해서 이끌어주는 스님네들이 환희심을 가지고서 해나가는 그 마음이 저 부처님한테 다 실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다른 때와 달리 저 부처님과 주인공 뿌리, 그와 둘이 아니게 끌어 잡아 다녀서 내 주인공에다 놓고 삼배를 올리든지 일배를 올리든지, 급하면 일배를 올려도 삼배가 되는 것이고, 급하면은 일정례, 급하지 않으면 칠정례를 해도 됩니다.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서 하는 거지 못박아 놓은 게 아니다 이 소립니다. 이 세상 모두가 그래요. 모두 먹고사는 것도 고정되게 못박아 놓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 때에는 이거를 해먹기도 하고 저 때에는 저거를 해먹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국수도 먹고 어떤 때는 밥을 먹고 어떤 때는 잡곡도 먹고, 어떤 걸 고정되게 먹는 게 없지 않습니까? 그거와 같이 마음 씀씀이도 역시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점안식 얘기를 하다가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가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놓으시면 여러분의 마음이 아주 간편하고 부처님을 한마음으로 끌어 잡아당겨서 내 마음으로 통하게끔 하나로 놓고 절을 하고 ‘주인공,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친근히, 일배를 하더라도 그렇게 하신다면 아니 될 게 하나도 없어요. 여러분, 모두 자기가 생각하고 움죽거려서 행을 하시고 체험을 하시고 그 맛을 본다면 보이지 않는 데서 저렇게 묘하고 광대무변한 법이 어디 있을까! 하고 정말 한나절을 울어도 시원치 않을 만큼 그렇게 즐거움이 있으실 것입니다. 인제 여러분이 공부하시면서 다른 지원에서 공부하는 것도 구경을 하시고 또 본원에 오셔서 얘기도 듣고 토론도 하시고 이러면서 마음의 발전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상이지마는 하늘이나 땅이나 천지가 둘이 아니에요. 모습은 하늘이다 땅이다 하지만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니에요. 그래서 둘이 아닌 가운데 인간이 있더라, 그 인간이 없으면 천지는 해 뭘 합니까? 인간이 없는데 천지가 있으며 천지가 없는데 인간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둘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저 부처님이 아주 여러분을 그저 오기만 하면 불에 태워줄 겁니다, 애고를 말입니다. 하하하.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재사를 지내는데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마는 부처님께서 공양을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마음이 공양 한 그릇을 올리고, 공양을 올릴 때에 일체제불과 일체중생들이 다 한꺼번에 하나로 드십니다. 부처님이 한 그릇을 받아서 그 한 그릇을 토해서 다시 중생들에 내리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받고 또 내리고, 받고 또 내리고 하다 보니까 그것을 표현하기를, 바다를 삼키고 바다를 한 찰나에 삼켰다가 한 찰나에 토해서 여러 중생들한테 자비를 베푸신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거는 동맥이 있으면 정맥이 있고 정맥이 있으면 동맥이 올라가듯이 그렇게 공양 한 그릇을 가지고도, 공양을 올리는 그 한 그릇을 가지고도 이 세상 천지를 다 먹이고도 그 한 그릇은 되 남는 겁니다. 그렇게 광대무변한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재사를 지낼 때 내가 찹쌀로 떡 한 그릇을 해서 놓고 향을 사르고, 청수를 올리고, 꽃이라도 놓고서 그냥 지내라 이랬습니다. 그건 왜냐? 영령들이 들어오면은 벌써 혼백이 혼백을 봅니다. 마음을 본단 말입니다. 근데 스님들이 상에다가 함빡 차려놓고는 얼마를 차려놨는데, 얼마치를 물건을 샀다는 게 아주 머리에 배어 있습니다. 그렇게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한 상 차려놓고는, 이거는 얼마를 들여서 물건을 사 가지고 이렇게 상을 차렸다는 거를 생각하는 그것이, 영령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그 마음 속에 들어와서 고것만 알고 있다 이 소리입니다. 납득이 가십니까? 그래서 고것만 납득이 돼 가지고 고 한 상 차려 놓은 것만 드리는, 응감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게 무엇입니까? 귀신입니까? 음식만 먹으러 다니게 말입니다.
그러나 떡 한 그릇이라는 건 그냥 떡이 아닙니다. 전체를 먹이고도 되남을 마음의 공양입니다, 공양! 그래서 공심으로서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떡을 차려놓고서 재사를 지내면은 그 영령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스님의 마음에 착 들어와서 아래 위도 터졌고 사방도 터졌고, 전체가 내 것 아닌 게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혼백들이 들어와 보니까 천상세계가 물질세계, 정신세계가 둘이 아니게 그냥 확 터져 버렸거든요. 그러니 부처님자리에 한자리 할 수 밖에요. 그런데 차려놓은 상에다가 몇 알갱이 차려놓은 고것만 보고서 한다면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지금 어디에서 사느냐? 물주머니에서 한 발짝도 떼어놓지 못하고 살고 있어요, 지금. 어항 속의 붕어를 보면은 ‘어이, 너희들은 나가지 못해서 얼마나 그렇겠느냐?’ 하지마는 물 속에서 사는, 어항 속에서 사는 고기들은 그 나름대로 또 살아요, 그대로죠. 인간은 복잡하게 그거를 보지마는 붕어들은 그 나름대로 자기한테 주어지는 대로 살고 있는 거니까요. 우리가 환경에 따라서 주어지는 대로 살아야지 어떡합니까? 사람도 역시 그렇죠. 그런데 생각을 할 때 어항 속에 있는 붕어를 볼 때는 자기를 생각 못 합니다. 어항 속의 붕어만 보게 되는 거죠. 바로 자기가 지금 어항 속에 갇혀 있다는 걸 모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마음을 가지고도 자기 마음대로 못 사는 거죠. 원인이 그거예요. 자기 마음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분이 여러분 중에 있으십니까? 대답해 보세요.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자재하면서 살아야만 하겠기에, 그리고 우리가 어항 속에서 발을 뽑아야 하겠기에, 세세생생에 그 애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창살 없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사람으로 됐다가 짐승으로 됐다가, 독사로 됐다가 개로 됐다가, 돼지로 됐다가 이렇게 반복돼서 돌아가는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야 되겠기에 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얘기죠. 지금 이 시간에도 그렇습니다. 이 시간에도 모든 거는 과거의 네가 저지른 거니까 자동적으로 입력이 된 데다가, 입력이 돼서 현실로 팔자 운명 애고, 유전성·영계성·업보성·인과성이 나오는 거를 거기다가 되놓으면서 하는 소립니다. ‘거기서 저지른 거니까 거기서 알아서 해!’ 하고 거기다가 다 놨을 때에, ‘너만이 이끌어 갈 수 있어!’ 하고 다 놨을 때에 바로 되입력이 돼서 앞서 입력이 없어진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이 침착하게 잘 들으셔서 공부를 열심히 하셔야 될 겁니다.
그러니 제사라는 것도 그렇게 간편하게 말 한마디지마는 엄청난 차이가, 영혼들에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요, “스님! 제사상을 차리지 않고 그냥 지내주세요.” 그러기도 하죠. 차리지 않긴 뭘 차리지 않아! 본래 그냥 세상이 모두 차려져 있는 건데. 하하하. 아, 세상만사가 다 차려져 있고, 그 뭔가? 물건 파는데 있죠? 그런데 가면 물건이 가질 거 못 가질 거 할 것 없이 다 있고, 이 세상 천지 우주세계에 전체가 색색가지로 늘어져 있는데 차리지 않긴 뭘 차리지 않아요. 아주 너무나 대대적으로 차린 거죠. 대대적으로 차린 거를 잘 알아야 자기 영혼의 조상들을 대대적으로 천가를 시키는 거죠.
이런 얘기 하나 할까요. 어떤 사람이 머리가 돌아가지고 자기 어머니를 막 두들겨 패고, 뭐 영들이 셋씩 넷씩, 작은 어머니 큰어머니 할 것 없이 다 들었다고 그러면서 그냥 막 두들겨 패고 야단법석이 났어요. 근데 그때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이렇게 공부를 시키려고 해도 미꾸라지 새끼처럼 요리 빠지고 조리 빠지고 공부들을 안 해요. 그래서 마음 공부하는 사람은 한방씩 줬고 마음공부 안 하는 사람은 그냥 내번져 팽개쳤고 그랬어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까 이 맛을 모두 알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들은 공부를 잘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공부라는 것이 뭔지 그 사람네들이 모르고 덤빈 거거든요.
그랬는데 그 사람이 정성을 드리려고 물건을 해 가지고 왔어요. 그랬는데 그 물건을 거기 와 앉아있는 사람들한테 다 나누어줬죠. 다 나누어줬으니 길길이 펄펄 뛸 수밖에 없죠. 모르는 사람이니 그럴 수 밖에요. 대접 요만한, 프라스틱인가 뭐 그거에다 담아서 죄 나누어주고는, ‘야! 오늘 시식을 참 잘 지냈다!’ 아, 이러고 나는 웃고 있는데 아, 그 사람은 그냥 펄펄 뛰고 그냥 야단법석이 났어요, 지서에서 불러온다고 하면서 야단이 난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불러오거나 말거나, 나는 지금 시식을 잘 지내서 좋구만!” 그러니까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주소를 하나 얘기를 하길 하나, 뭐 염불을 하나 해주길 하나 아무것도 없이 아니 다 노놔서들 먹어 치워버리고선 어떻게 재사를 지냈느냐는 거죠.
그리고도 어머니를 복 패듯이 하고 그런다고 해서 물 한 그릇을 떠다 놓은 데다가 그 꽃을 꽂아 놨었어요. 그랬는데 그 물 한 그릇에다 꽃 한 송이 꽂아서 그 물을 쓱 내밀어 줬어요. 그랬더니 그걸 이렇게 보더니 ‘어머나! 여기가 천당이구나. 여기가 극락이구나. 이렇게 좋을 데가 있는 줄을 몰랐구나!’ 이러면서, ‘나는 여기 들어가서 살 거야!’ 하면서 그냥 비비고는 다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 아직까지도 잘 살고 있어요.
그러니 생각하면 어떤 때는요, 오히려 똑똑하다고 그러는 사람들이 미친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어떤 때는 아주 기가 막혀요. 아주 똑똑하다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 많더라구요. 그리고 미친 짓을 해놓고는 나한테 와서는, “그거 어떡합니까, 어떡합니까?” 이래요. 번연히 그 돈이 다 들어가서 사기를 당할 줄 알면서도 갖다 넣고는 다 사기를 당해 가지고는 집도 절도 없이 다 망하게 생겼다고 와서 그래요. 그러니 미치지 않았습니까, 그게. 성합니까, 그게?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신 게 아니거든요. 영리하고 똑똑하고… 우연히가 없다, 절대적이라는 것이죠.
이제는 제사를 지내는 그 뜻을 대충 아시겠죠? 한 상만 차려놓으면 한 상 거리밖에 안되지만 전체를 준다면 내 것 아닌 게 없고, 내 자리 아닌 게 없고, 그 조상들의 혼백이 어디 아니 가는 데가 없이 갈 수 있고, 어떤 자리든 내 자리 아님이 없고, 나 아님이 없는 그 자리에 정말이지 승천이지요. 그러니 여러분이 옹졸하게 여기 스님네가 제사를 지내는데, 이렇게 지내주느니 저렇게 지내주느니 차려주지 않느니 이런 소리는 아예 하지 마십시오. 차려준다면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 한 발짝도 떼어놓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나물 밥 찌게를 먹지, 승천해 있는 사람이 왜 찌게 밥을 먹습니까? 먹지 않아도 그냥 그대로 감지하고 바다를 마신 거와 같이 또 바다를 토함과 같이 해서 여러 사람들한테 마음과 마음을 통해서 전달하면서 그렇게 자비를 베푸시는데 말입니다.
또 내가 뭐를 말씀드리고자 했나? 뭘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하하. 뭐 질문하실 것 없습니까? 여기 청주에서 아주 요긴할 거, 요긴하게 우리가 생활하면서 해나갈 수 있는 것, 우리가 지금 시급한 거는 아는 게 시급한 게 아니라 실천을 하는 게 시급한 겁니다. 지금 무엇을 갖다가 쌓아놓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배고프면 먹어야 하니까, 당장 배고프면 당장 먹어야 하는 것이 시급한 겁니다. 그런데 먹는 것이 고정된 게 없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먹어야,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죠? 우리 생활 속에서는 어느 거 하나 고정된 게 없이 그저 용도에 따라서 자꾸자꾸 닥치니까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야 할 그런 용기와 믿음과 또는 지혜가 모두 첨부돼야 되겠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첫째는 믿음이 제일이죠. 자기 주인공의 뿌리를 진짜로 믿고 ‘너만이 나를 이끌어줄 수 있다, 너만이 우리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있다. 너만이 애고를 없앨 수 있어, 너만이 병고를 낫게 해서 튼튼하게 너 심부름을 잘하게 할 수 있어.’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해주시오.’가 아니라 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자기 몸뚱이와 자기 몸뚱이 속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스스로서 잘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도리를 세워서 해나가십시오.
그리고 한 마디 더 해야겠군요. 천주교나 불교의 스님네들이나 예전부터 묵언을 하고 많이 갑니다. 3년을 묵언을 하고 1년을 묵언을 하고 몇 달을 묵언 하기도 하고 한철 묵언 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위에 묵언이라는 게 있으면 묵언 아닌 게 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찰나찰나 시공을 초월해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데 우리 발자국이 돌아 발자국을, 발을 떼고 올 때에 짊어지지도 않고 또는 거기에 애착도 없고 그냥 그대로 걸어왔다는 얘기죠. 그런데 우리가 지금 말을 하는 것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말을 했어도 함이 없고 아니 했어도 아니한 게 없고, 해도 한 게 없는데 묵언을 한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또 거기에 걸리는 거죠. 이거는 모두가 묵언을 한대는 데서 걸리고 안 한대는 데서 걸리고, 이러는 그 가운데 내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가 있는데 그 자유가 고정되지 않고 찰나찰나에 그 모두가 나투면서 화해서 돌아가기 때문에 절대로 한 것이 없죠. 내가 지금 이렇게 말을 해도 내가 혼자 한 게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한 게 없죠. 하나도 한 게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묵언이란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죠.
그러니 모두가 그 도리를 알려면 그저 딱따구리가 나무통을 뚫듯이 그냥 무조건, 무조건이죠. ‘있느냐 없느냐! 아리송하다! 못 믿는다! 이걸 더 캐야겠다!’ 이런 게 하나도 없이 그냥 어린애가 넘어질까 두렵고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어쩔까 해서 못 뜁니까? 그냥 걸음마 뛰는 애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뛰기만 한단 말입니다. 벌써 뛰면은 애들이니까 뒤에 보호자가 있거든요. 보호자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고 그냥 자기는 어린애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뛰는 거처럼 해야 된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옛날에 내가 공부할 당시에 공부라고는 할 것 없지만, 생활이 공부이니까 말입니다. 어느 땐가 강을 사이에다 두고선 이쪽 군인하고 저쪽 군인하고 싸움이 붙었어요. 싸움이 붙었는데 그게, 싸움이 붙었는데 말입니다. 이쪽 사람이 이쪽을 죽이고, 6.25때 강을 끼고 그렇듯이, 그것이 6.25때 봐서 그런지 그걸로다가 비유해서 나오는데 말입니다, 스크린처럼 나오는데 말입니다. 그냥 부처님 한마음인데 어떻게 싸우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순간적 생각에 그냥 하나도 없이 없어져버리는 거예요. 둥그러니 나 하나만 서 있는데 내가 얼마나 조그맣던지 요만한 게 그래도 행전은 치고, 하하! 요만한 게 키 하나 긴 거를 질질질 끌고서 그냥 혼자 거길 걸어가고 있더라고요. ‘어-, 그렇구나! 싸운다, 싸우지 않는다가 바로 양면이 없는 자리구나.’ 하는 거를 생각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양면이 없는 자리, 즉 양면이 있으니깐 그 가운데가 있듯이 우리는 저 소켓트 끼는 거하고 받는 거하고 그것이 있으니깐 그냥 불이 들어올 뿐이죠? 그래서 그 작업이, 우리들 공부하는 작업이 그렇게 소켓트 끼는 작업이에요. 둘이 아니게 그 소켓트가 맞게끔 믿고, 그냥 무조건 믿고 그냥 낄 수 있는 그 마음이 문제거든요. 그러면 불은 저절로 들어오게 되죠. 그래서 모든 거를 내 마음 한마음 뿌리, 모든 것을 주인공에 맡겨놓으면은 그냥 타버린 거와 같아요. 타버리는 거와 같고 용광로에 넣어서 녹여버리는 거와 같죠, 모두가요.
그러니까 내가 업이 있네, 무슨 번뇌 망상이 일어나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거죠. 번뇌 망상이 공부할 수 있는 재료요, 또는 애고가 공부를 크게 할 수 있는 재료이니까요. 그래서 모두가 ‘어휴! 죄를 내가 얼마나 지었기에 이렇게 고생을 하나.’ 하고 한탄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이렇게 고가 닥치는 것이 내가 공부할 수 있는 재료구나!’ 생각하신다면 아주 널리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질문하실 거 없어요?
▲질문자1: 스님 감사합니다. 저는 청주지원 신행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불자입니다. 저희들을 이 자리에 있게 이끌어주셨고, 저희들을 위해 이곳 지원 개원을 위해서 이렇게 협소한 청주까지 왕림하시어 감로법을 베풀어주셔서 더욱 감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희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스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익혀서 공부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공부하던 중에 한 가지 감사했던 점과 궁금한 점을 질문 올리겠습니다.
저는 전에는 몸이 약해서 자주 아팠습니다만 마음 공부를 하는 동안 약을 다 버려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저는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 다시 왔습니다. 심한 오열과 열이 얼마나 심했던지 의식을 잃었었습니다. 그때 저는 오직 주인공만 믿고 있었는데 정말 아주 기쁜 일이 생겼습니다. 순간에 아픔은 사라지고 어떤 일이든지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일이 없었고, 산도 움직여보니 산이 움직였습니다. 정말 아프면서 그렇게 깊은 환희에 젖어본 적은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 공부를 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웃으면서 나도 모를 눈물이 나왔습니다. 정말로 감사 올립니다, 스님!
그리고 한가지 질문을 올리겠습니다. 저는 스님께서 법문하시는 중에, 함이 없이 하는 것과 여여하다는 말씀을 누누이 강조하시는 것을 들었으나 도저히 이해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 수 없이 여여하다는 것을 화두로 삼고 공부를 시작하던 중에 온 세상이 물보라 속에 물레방아가 돌고 큰 완력기 하나가 있어 그것을 힘껏 해 보려고 해도 안 되고, 힘을 안 들이고 하려고 해도 안 되고, 생각만 해도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냥 함이 없이 해보니 정말 너무나도 잘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여여하다는 것을 이해했고, 생활과 운동할 때 해보니 배 이상의 효과가 났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대로 공부하는 것인지 아니면 너무 끄달리는 것인지 궁금해서 한 말씀드립니다. 지도편달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정말 잘 하십니다. 정말 여여함을 아시고 열심히 하십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도 그렇게 함이 없이 하는 도리를 아셔야 할 겁니다. 함이 없이 여러분이 하신다면 원수 질 일도 없고 또 착을 가지고 애탄기탄 하면서 착을 둘 필요도 없고, 하루살이로 사랑을 하되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그런 원력을 세워서 우리가 한찰나에, 사랑도 세세생생의 사랑이 되도록 할 수 있는 사랑이라야만이 진정한 정일 겁니다. 그러니 그냥 말로 아무리 열 마디 백 마디를 해봐도 아니 될 때 함이 없이 하는 도리를 아셔야 될 거니까, 여기 토요일 일요일마다 들리셔서 스님들하고 토론도 하시면서 또 비디오도 보시면서 법회도 하시고 이렇게 자꾸 폭을 넓혀 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가정에 아주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지금 말씀하신 회장님도 뭐라고 할까, 넘버원이라고 그럴까? 허허허.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
▲질문자2: 저도 여기 지원에 다니고 있는 신도입니다. 그런데 저도 하느라고 공부는 하고 있는데, 전에는 좀 잘되고 안 되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요번에 갑자기 췌장암 수술을 했어요. 한 달이 못 됐는데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애고가 닥쳐도 공부의 재료로 삼으라고 하시니까 더욱 즐겁고 반갑습니다.
이렇게 한번 친견하기를 아주 원을 했었는데 이제야 친견하게 되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런데 항암제를 맞으라고 해서 한번 맞았는데 한 달에 한 번씩은 맞으라고 하네요, 굉장히 괴로워요. 그렇게 괴롭고 거진 10년 간을 항암제를 맞으라고 하니 너무너무 힘들 것 같고 해서 한번 스님한테 이렇게 여쭈어보는 겁니다.
▲스님: 항암제를 맞든 안 맞든 댁에서 상관할 일이 아니죠. 그 마음이 말입니다, 몸 속에 들은 그 생명체들이 전부 보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내가 이렇게 아프다고 하고, 내가 병이 걸렸다고 하면서 ‘내가, 내가’ 하다 보니까 당신 혼자만 고통을 받는데 혼자만 고통받지 않고 그 고통을 분담해서 ‘너만이 이 고통을 낫게 할 수 있잖아!’ 하고 모든 것을 통신을 보내면은 사대로 다 통신이 돼서 아프지 않고 걱정 없이, 그걸 맞으나 안 맞으나 괜찮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질문자2: 감사합니다!
▲스님: 그렇게 여러분이 자재할 수 있는 것을, 자재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수화풍의 바탕으로서 광력이나 전력·자력·통신력을 충만히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가지구 있는 것을 꺼내쓸 수 있게끔 하시라는 거죠.
▲질문자2: 입원하고 있는 중에도 수술하러 들어가면서도 주인공을 막 외치고 들어갔었는데, 그 고통은 좀 모르고 넘어갔어요.
▲스님: 허허허. 더 하셔야죠! 신호가 들어가도록 하세요.
▲질문자2: 아주 들어가면서도 그냥 주인공을 막 외치고 들어갔었어요. 그런데 고통이라는 것은 하나도 몰랐었어요. 하여간 감사합니다.
▲스님: 예! 그래서 건강하시도록 하세요. 한마음에서 심성의학이나 천체 물리학 또는 천문학, 철학 전체가 한마음에 달려 있는 거지, 한마음을 떠나서 있는 게 아니죠. 이 공부하시는 데는 거짓이라는 건 없어요. 자기 마음이 알고 있고 자기 마음이 거짓으로 하면 그대로 그냥 그것뿐이니까요.
( 다음 호에 계속 됩니다.)
200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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