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1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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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과 만난 사람들] 원불교 박청수 교무
내 삶, 내 목숨이 불완전 연소되지 않게

바람도 없이 차가운 겨울날. 용인 헌산중학교 안에 있는 ‘삶의 이야기가 있는 집’으로 온 누리를 보듬어 아우르는 우리 시대 어머니 원불교 박청수 교무(75)를 찾았다.

“1989년 제 첫 책 박청수 세계기행 <기다렸던 사람들>을 법정 스님께 보내드렸는데, 스님께서 앉아서 세계 구경을 하게 해줘서 고맙다며 엽서를 보내 주셨어요.”
그렇게 몇 차례 서신이 오간 뒤 박청수 교무는 불일암에 가고 싶다고 청했다.

“…매화가지에 꽃망울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댓잎이 부서지는 봄 햇살이 향기롭습니다. 꽃가지에 향기가 번질 때쯤 다녀가십시오.”하는 화답에 박청수 교무는 꽃가지에 향기가 번지는 시절인연을 꼭 맞춘 1991년 3월 20일. 불일암을 찾았다.

“그때 법정 스님은 앞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이 내 얼굴이고 내 모습이니 바라보라고 하면서 그저 묵묵히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면 소리를 듣게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첫날 저녁 먼저 와 있던 젊은이들과 함께 했는데 스님은 ‘여럿이 먹으니까 참 맛있다. 혼자서 하는 식사는 주유소에서 기름 넣은 거나 다름없어요.’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씀을 들으면서 홀로 앉아 드시는 식탁을 떠올렸어요.”
20년이나 된 이야기를 마치 엊그제 일 마냥 생생히 털어놓은 박청수 교무는 소녀처럼 눈빛이 반짝인다.

사물이 제대로 대접 받기 바라는
그 자체가 개체에서 전체로 나아감


“화장실을 정랑淨廊이라고 하나요? 정랑엘 들어가 보니까 낙엽통이 있고 부삽과 비가 있었어요. 신발을 벗으라고 쓰여 있어서 신을 벗고 거기 있는 다른 신발로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여느 집 대청마루보다 더 깨끗해요. 정랑 안에 앉으니 앞에 듬성듬성 창살이 박힌 창이 나있는데 창밖에 대밭이 훤히 보이고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가 운치를 더했어요. 벽에는 ‘볼일을 마치면 배설물을 낙엽으로 덮읍시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제야 왜 낙엽이 있고 비가 있는 까닭을 알아차렸지요. 정랑을 나오다 보니 ‘나올 때 문걸기’라고 쓰여 있었어요. 고분고분 소리 없는 지시에 따랐어요. 스님은 그곳이 기도처라면서 볼일을 보는 동안은 모든 사람이 마음에 아무 잡념이 없다고 그러시더군요.”

그뿐 아니라 우물 또한 마치 막 싹싹 쓸고 닦은 듯한 바위에 물이 고여 있는데 ‘식수에 물 튀기지 않도록’이라 쓰여 있다. 물 한 모금을 마시기도 조심스럽다. 세수간엘 들어가도 물통, 대야, 빨래판, 비누 그리고 신고 들어가는 슬리퍼도 모두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식당채 뒤뜰로 돌아가면 자그마한 항아리들이 나란히 묻혀 있다. 호기심이 발동한 박청수 교무가 살며시 뚜껑을 열어보니 빨간 글씨로 “열어보지 마시오.”라고 쓰고 그 아래 검정 글씨로 “91년 여름에 먹을 짠무지”라고 쓴 비닐봉지로 봉해져 있었다. 얼른 뚜껑을 닫았지만 다른 항아리 속 내용이 궁금해져서 열어보고 말았다. 거기 역시 ‘열어 보지 마시오. 91년 여름에 먹을 배추김치.’라고 쓰여 있었다.

나그네 버릇들이 서로 비슷하기에 써놓았으리라. 친절이다. 모든 사물이나 사람이 제자리에 있어야 아름답듯이, 스님은 모든 사물이 제대로 대접 받기를 바라셨다. 그 자체가 개체에서 전체로 나아간 스님 삶이자 수행이었으리라.

“법정 스님께 가장 많은 편지를 보냈어요. 일을 하려면 너무 어려우니까. 편지를 보냈지요.”
인도 히말라야 설산 라다크를 돕기 시작할 때, 인도를 다녀와서 인도기행을 쓰신 스님은 형편을 잘 헤아리시라 믿었다. 그래서 편지를 마치 통신원리포트처럼 써서 보냈다.

“자녀들을 가르칠 학교가 없어서 1만리가 떨어진 남인도 뱅글러로 대여섯 살 때 보내서 집에 한번 오려면 24시간을 기차를 타고 이틀을 버스를 타고 와서도 또 걸어서 와야 하니까, 애를 학교를 보내고 나면 십년 만에 부모자식이 만나야 해요. 아무래도 학교를 세워야 할까 봐요.”
어느 날 스님이 오셔서 나도 거들어야겠다며 100만원을 놓고 가셨다.

“스님은 늘 ‘내가 등 너머로 지켜보고 있으니까 열심히 해요.’ 하셨어요. 제가 라다크에 학교를 짓고 나서 힘을 다 빠져가지고, ‘스님 힘이 하나도 없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큰일 했어요. 큰일!’ 그러셔요. 제가 그러면 뭘 해요? 힘이 하나도 없는데요. 제 내면이 바닷가 갯벌 같아졌어요. 그랬더니 법정 스님은 ‘아휴, 그래야 돼요. 큰일을 하고 나서도 힘이 남아서 쩡쩡하면 겸손해지기 어려워요. 그리고 그 일도 공이 되지 않지요. 힘든 일을 하고 나면 기진맥진해야 정상이에요.’라면서 격려해 주곤 했어요.”하며 마치 방금 스님 말씀을 듣고 힘을 차린 듯이 “법정 스님이 보내주신 엽서를 보면 ‘구름도 좀 보세요. 별도 좀 보세요. 장거리 선수는 그렇게 달리지 않는대요.’ 뭐 그렇게 쓰셨어. 그런데 지금은 내가 달하고 숨바꼭질하고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나는 날마다 달을 처음 보면 ‘어머! 달님.’ 그런다고. 나한테는 달님이 아주 친한 동무에요.”

보름달로 나타나는가 하면 채워지기 전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그러다가 요렇게 조금 남는 때가 있고 낮달도 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달님을 보면 어머니 소식을 달님이 다 아는 것 같다면서 깔깔대며 해말게 웃는 박교무, 타고난 소녀다.


세상소리에 귀 기울이는
千手와 天眼 관세음보살


교무가 되고 50여 년을 쉼 없이 달려온 박청수 교무. 국경이나 인종, 종교를 뛰어넘어 무지와 빈곤, 질병을 없애는데 한평생을 바친 ‘사랑’ 그 자체로, 지구를 아우르고 보듬은 손이 큰 어머니다. 55개 나라를 도우며 세운 학교만도 나라 안팎에 모두 아홉 개. 그 밖에 인도 라다크에 카루나 자비병원설립을 후원하고, 그리고 바탐방 무료구제병원을 열어 운영하고 있다.

“캄보디아에 지뢰를 캐기도 하고, 우즈베키스탄 아랄 해 호수물이 마르고 강물이 흐르지 않아 더는 농사지으며 살 수 없는 누크스지역 고려인들을 남부 러시아 볼가강가 볼고그라드로 옮겨 살게 하는 일도 큰일이었어요. 중국 훈춘 조선족 장애자를 위한 특수교육학교를 세우게 한 일이나 특히 100년 만에 닥친 큰물피해를 입은 북한동포를 도울 때는 후회 없이 있는 힘을 다 쏟았어요. 아프리카 12개 나라에 의약품을 보내 산목숨 구하는 일에 힘쓰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지진 피해, 화산폭발, 태풍 피해 같은 자연 재해가 생길 때도 어서 빨리 보내야 하는 제 일감이었고, 21세기 불행한 전쟁터 이라크에도 의약품을 보냈어요.”

南無千手千眼
觀世音보살!
교무님은 세상 소리에 귀 기울이며
千手와 天眼으로 돕고 거드는 관세음보살이세요.
‘숙제’를 읽으면서 善哉 善哉! 라고 찬탄해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저기 꽃소식이 들립니다. 향기로운 봄 맞으십시오. 法頂 합장 96. 3. 30

“천수천안관세음보살? 아니에요. 그저 부지런히 열심히 내 삶이, 내 목숨이 불완전 연소되지 않게 그렇게 살았을 뿐이에요.”

출가는 어떻게 하게 되었을까?
“어머니가 ‘너는 시집가지 말고 너른 세상에 나가 많은 사람을 위해 일해라. 네가 교무만 된다면 대학까지 가르칠 테다’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어릴 적 별명이 대학생이었어요. 초등학교 때 대학 갈 사람 손들어보라고 했을 때 나 혼자만 손을 번쩍 들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죠.”

“그동안 어려운데다 쓴 돈만 105억 원이에요. 그게 지로용지도 없고 후원회도 없이 그저 제 말만 듣고 그냥 내놓으신 거예요. ‘모든 분들은 박청수 교무에게 돈을 주면 사무실에 쓰지도 않고 월급 나가는 사람도 없으니 한 푼도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제자리 찾아간다.’고 여겼어요.”

그런 믿음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나를 비롯한 우리 부교무들은 다 10만원씩만 쓰고 살았어요. 어린 교무들은 그 돈에서도 2만원을 도로 내놨어요. 2만원이면 크메르에서 학생 하나가 먹고 자고 등록금을 댈 수 있거든요. 그랬는데 핸드폰이 나오고 나서 도저히 8만원 가지고는 못살겠다고 해서 15만원 줬죠. 요즘도 저는 총부에서 23만원 받아요. 차가 없으니까 주로 버스를 타고 다녀요. 혼자 끓여먹는데 23만원도 다 들지 않아요. 내가 화장을 하나 미장원엘 가나, 뭐 이런 옷도 다 30년 40년씩 입던 거예요. 여름치마 스물여섯에 입었는데 그때는 속이 좀 비쳐서 잘 입지 않다가 나이 드니까 더 좋은 거야. 가벼워서.”
법정 스님 말씀처럼 맑은 가난이다.


화합을 위해서 다른 종교 가르침이나
교의에도 기꺼이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라


박청수 교무 사랑실천은 자그마한 나눔에서 비롯되었다. 한국보육원 고아 128명에게 털모자와 타이즈를 사주는 일을 비롯해 미혼모와 아이 돌보기를 했고, 시각장애인들과 인연을 맺어 소리잡지를 만들며 점자책을 만들도록 도왔다.

“이 세상 이치가 작은 게 쌓이고 쌓여 커지고, 커지면 드러나죠. 뭐든지 작게 단순 소박하지만 뜻있는 일을 시도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1975년부터 31년 동안 다른 종교인 천주교 시설인 성 라자로 마을 나환자 돕기를 해왔다. 더구나 다른 이들이 마련해 주는 돈만 기다리지 않고, 15년 동안 엿을 떼어다 팔아 그 이익금을 보탰다. 이 말씀을 들으며 펌프 마중물을 떠올렸다. 물을 붓지 않으면 물을 끌어올릴 수 없는 이치. 그동안 이 어른이 꾸준히 해온 일은 마중물 노릇이었구나 싶었다.

그뿐인가. 맑고 향기롭게 운동에도 동참하고, 파리 길상사 건립과 성북동 길상사 창건 때와 길상사 지장전을 세우는 불사에도 많은 힘을 보탰다. 기원전 2세기 불교 중흥에 앞장섰던 걸출한 영웅 인도 아소카 Asoka 대왕 포고문이 떠오르는 나눔이다.

“누구도 자신이 믿는 종교만 받들고 다른 종교를 비난하거나 저주해서는 안 된다. 다른 종교도 존중해야 한다. 다른 종교에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 화합을 위해서 다른 종교 가르침이나 교의에도 기꺼이 마음을 열고 귀 기울여라.”

“언젠가 성지고등학교 가서 강연을 할 때 학교에서 처음에 많이 걱정을 했대요. 애들이 다 제 멋대로 나가버리곤 한다고. 제 소개를 할 때 ‘우리는 유명한 사람을 싫어하는데 오늘은 유명한 사람이 왔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난 딱한 소녀였어.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시고 오빠도 없고 언니도 없었단다.’ 육이오 때 중학교 1학년이었으니까 그때 학교 다니기 어려웠던 일, 배고팠던 시절 뭐 이런 얘기를 막하고,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우등상 한번 못타봤다. 그런데 출가를 하고 스물두 살 때 교도들이 요즘은 교당에 와도 교무님 설교 내용이 들을 것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교무가 되려면 반드시 실력을 쌓아야겠구나 싶었어. 목적이 생기고 자각이 드니까 대학 가서는 계속 수석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철이 나고 하기 나름이더라. 나는 지금은 신문에 칼럼도 많이 쓰고 그런 사람이 되었다. 너희들도 그럴 수 있지?’ 그랬더니 열심히 듣더라고요.”
21세기 화두가 소통인데 공감을 끌어내는 커뮤니케이션 대가다.

“55년 동안 너무너무 치열하게 살고 나서 지금 이렇게 얻어진 고요함이 얼마나 행복한지. 나만큼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내 몸이 대적광전이지. 내 마음에는 먼지가 없을 거야. 나 같은 사람은 빈 마음으로 사니까 삼라만상이 다 보이잖아요. 누가 불편한가? 제가 못 견뎌요. 남이 불편해하는 모습을.”

부처님이 이루신 육신통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번뇌를 여의어 고요하고, 세상 신음소리를 듣는 귀가 열리고, 세상 아픔이 다 보이고, 불편이 있는 곳이면 세상 어디라도 달려가고, 뭇사람들 마음을 읽고, 지금 겪는 어려움을 서로서로 손을 맞잡아 앞날을 열어 운명을 바꾸는 보살도를 이루는 이 어른은 그냥 그대로 ‘친절’이다.


원불교도들에게 늘 당부하는 말씀은 뭘까?
“사람들이 가진 것 가운데 무엇보다도 시간이 소중해요. 저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한 번도 보지 않았어요. 일평생 시간을 잘못 쓴 일이 없어요.”
큰 어른들은 어쩌면 이리 한결같을까. 법정 스님도 ‘시간은 목숨이다.’고 하셨다. 같은 수도 길을 가는 후학들한테는 어떤 얘기를 할까?
“성공이 거저 오지 않아요. 잘 가꾼 벼를 거둬들이는 농부는 부지런히 피땀을 흘렸기 때문에 알곡을 거둬들이죠. 원불교 대종사님께서는 사람 가운데 하늘 사람과 땅 사람이 있는데, 땅 사람은 늘 욕심이 성하고 생각이 비열하고 탁한 기운이 아래로 처지는 사람이고, 하늘 사람은 욕심이 없이 맑고 생각이 고상하고 맑은 기운을 지녔다고 하셨어요. 하늘 사람이 되어야죠.”

밤낮없이 너른 세상을 막 이렇게 달리다가, 정년퇴임을 하니까 경기를 마치고 테이프가 가슴에 탁 닫는 것 같아. 참 행복해 하는 사람. 그러나 여전히 청수나눔실천회를 비롯해 농어촌청소년육성재단을 이끄는 영원한 현역 박청수 교무.

나무청수보살마하살南無淸秀菩薩摩訶薩!
글=법정스님 자취를 더듬는 변택주,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 einew@hanmail.net
2011-04-24 오전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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