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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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죄인을 버리지 않는다…자비의 기본은 포용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는 자리③ 강남대 이찬수 교수
이찬수 교수의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는 자리’ 4번째 강좌가 4월 11일 진행됐다. 공사상과 보살사상과 예수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찬수 교수는 “보살은 집착으로부터 자유, 예수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모두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살아가는 열린 존재”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보살은 공의 진리를 깨달아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예수는 하느님의 절대무상의 은총을 깨달아 자신에 대한 염려와 아집으로부터 해방돼 이웃을 향해 자신을 활짝 여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강의는 △불성과 하느님의 모상 △보신불과 그리스도의 몸 △<대승기신론>과 <요한복음>등을 중심으로 진행될 예정이며 수업 방식은 강의와 토론으로 진행한다. 강의는 서울 서교동 서교빌딩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매주 월요일 오후 7시 30분에 열린다.


#보살예수
보살은 ‘보리살타(菩提薩陀, bodhisattva)’의 약칭으로서, 깨달음(보리, bodhi)을 구하는 존재(살타, 유정, sattva)라는 뜻입니다. 보살은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적 인간형입니다.

보살은 자신만의 해탈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이로움과 타인의 이로움을 동시에 구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행하는 자입니다.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이 단 하나라도 있는 한, 중생 구제의 서원(誓願)에 따라 열반의 길을 가지 않고 중생의 길을 선택합니다.

보살에게는 보리심에 근거해 닦은 혜와 자비의 힘이 있습니다. 지혜는 보살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나 열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서 깨달음을 구하는 보리심에 자비의 마음을 더해줍니다.

보살의 지혜는 불이지(不二智)입니다. 자와 타, 여자와 남자, 보살과 중생, 번뇌와 깨달음, 생사와 열반, 차안과 피안, 진과 속, 성과 속이 둘이 아님을 아는 지혜입니다. 보살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만물을 평등하게 대하는 평등지입니다. 만물은 공이라는 근원을 통찰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분별과 집착을 떠난 무분별지입니다.

곧 공의 진리를 깨닫는 반야지(般若智)를 필요로 합니다. 보살은 중생을 구제해 올바른 지혜를 깨닫도록 이끄는 수행을 합니다. 전형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존재, 깨달음에 기반해 깨달음을 유보하는 자입니다. 모든 차별을 부정하고 초월한 평등지 위에서 다시 일상적 차별의 세계를 긍정하는 차별지를 발휘함으로써 중생 구제에 임합니다. 보살은 이러한 지혜로 무장하고서 보살 노릇을 할 수 있으며, 진정한 자비를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생은 부처가 열반에 들어 현실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자 위로 받을 곳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의 기능을 대신할 존재로 부처의 지혜, 깨달음이 보살에게 적용되면서 인간의 이상적인 존재로 보살이 등장하게 됩니다.

#보살과 예수의 자유
보살과 예수의 공통점은 자유입니다. 보살은 집착으로부터 자유, 예수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입니다.

보살은 생사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생사의 세계에 살아도 생사의 세계에 있거나 종속되지 않는 초월적 자유의 존재입니다. 보살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의 고통을 제거해줍니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보살은 공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나를 관통하는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소유하지 않고 무집착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보살의 자유를 예수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도 유대교의 율법주의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당시 사회를 지배하는 질서 ‘법’은 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신적인 것을 어기는 자는 죄인이 되고 신성의 상징인 성전에 발을 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당시의 지배체제를 거부합니다.

예수에 의하면 절대무상인 은총의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우리의 모든 현실적 계획은 필요도 없고 부질없는 짓이며,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모든 정신적 노력도 헛된 일입니다. 하느님의 절대적 긍정 앞에서 인간은 세상의 근심과 염려에 얽매여 살 존재가 아님을 그는 가르쳤습니다. 사랑과 은총의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근심 없이 살아야 할 행복하고 자유로운 존재임을 보여줬습니다. 보살과 같이 현실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였습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전의 질서를 뒷받침해온 명제입니다. 신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본래 통합적인 가치입니다. 하지만 인간에 적용되는 방식은 거룩(聖)과 속됨(俗)으로 분리됩니다. 속된 것과 분리하는 행위를 ‘거룩’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이와 죄인, 부자와 빈자 등 이분법적 도식의 한편을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 시켜온 것이 예수 당시의 삶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거룩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거룩하다는 말 대신 자비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아버지가 자비(rachamim: 자궁)로우시니, 너희도 자비로워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신의 속성을 자비에서 찾습니다. 자비나 관용을 뜻하는 히브리어 라하밈(rachamim)이 자궁을 뜻하는 레헴(rechem)에서 왔습니다. 즉 자비의 기본정신은 포용입니다. 신이 자비롭다는 것은 불평등한 구조의 사회에서 죄인을 버리지 않고 포용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일반적인 질서가 아닌 반대 가치를 추구합니다. 반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는 기존 사회질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들과 함께하면서 신의 은총의 보편성을 보여줍니다.

예수가 최초로 외친 메시지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신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의 신입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근원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합니다. 신은 평등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존 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 종교적 질서에 대한 도전이 됩니다. 신의 다스림의 정신에 투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러한 행위는 하느님의 은총ㆍ나라ㆍ다스림에 대한 깨달음에 기반한 것입니다.

예수는 신의 보편적 은총과 사랑은 누구나 누려야할 근원적 가치를 공유하는 것으로 봅니다. 예수는 그래서 성과 속, 경건과 불경, 의인과 죄인, 정과 부정의 대립적 구도로 사람을 판단하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차별과 편견을 과감히 타파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앞에서 인간의 모든 독선과 편견이 무너지는 것을 보였고, 하느님 자녀의 자유를 선포하고 실천했습니다. 예수의 자유는 보살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종교로부터 해방이고 자유였습니다.


보살의 자유가 일제의 상과 분별을 용납하지 않는 공의 지혜에 근거한다면, 예수의 자유는 인간의 모든 부질없는 노력과 집착, 편견과 독선이 발붙일 곳 없는 하느님 아버지의 절대부상의 은총에 근거합니다. 공과 사랑의 보살과 하느님에게 인간을 억압하는 일체의 관념이나 관습, 전통이나 권위, 제도나 이념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한한 자유의 원천입니다.

또한 보살과 예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무아적 존재입니다. 보살이 아공과 법공을 깨닫는 지혜로 인해 아집으로부터 해방된 존재라면, 예수는 절대무상의 은총의 하느님, 무조건적 사랑의 하느님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놓아버린 무아적 존재입니다.

#공과 하느님 ‘절대유와 절대무’

공은 하느님에 대한 깊은 이해에도 큰 도움을 줍니다. 공사상에 의하면 유한한 사물과 연기적 존재의 중심에는 무(無) 혹은 공(空)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무나 공 너머에 모든 존재자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궁극적 실재, 어떤 절대유(絶代有)가 있다고 믿습니다. 절대유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절대무와 같습니다. 절대(絶代)는 ‘마주보는 것을 끊었다’는 뜻입니다. 절대무는 마주보는 것을 끊는데서 오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입니다. 자유는 무집착과 같은 말입니다. 무를 강조하고 유를 강조하는 것 같아도 둘은 대립적이지 않습니다. 공과 절대유의 세계는 자유와 무집착이라는 부분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절대유로서 하느님은 무 아닌 무, 유 아닌 유로 나타납니다. 우연적 존재자의 존재를 떠받쳐주는 필연적 유(必然有)가 있다는 것이지요. 유 아닌 유, 무한한 유, 절대유, 혹은 유 자체라고 해야 하는 유입니다. 무 아닌 무이므로 모든 유한한 것의 유를 가능하게 하고, 유 아닌 유이므로 어떤 유한한 사물에 국한되거나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코 허무나 비존재의 위협에 처하지 않는 유, 그야말로 존재 자체입니다. 이러한 절대적 유를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종교가 나뉩니다.

절대무로서의 공과 절대유로서의 하느님은 결국 동일한 실재의 두 얼굴과 같습니다. www.paideia21.org 02-777-0616
이상언 기자 | un82@buddhapia.com
2011-04-24 오전 12: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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