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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연구공동체(대표 김종락)는 3월 21일부터 서울 서교동 서교빌딩에서 이찬수 교수의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는 자리’를 진행하고 있다. 4월 4일 3번째 강좌는 불교의 열반과 기독교의 하느님나라에 대한 비교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이찬수 교수는 “열반과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아는 세간적 질서가 아닌 초세간적 질서, 종말적 질서라는 측면에서 일치한다. 열반과 하느님 나라는 죽고 난 후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here and now)'' 의 질적 전환을 통해 이뤄지는 영적 세계이며 영생 세계”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강의는 △보살과 예수 △불성과 하느님의 모상 △보신불과 그리스도의 몸 △<대승기신론>과 <요한복음>등을 중심으로 진행될 예정이며 수업 방식은 강의와 토론으로 진행한다. 강의는 매주 월요일 오후 7시 30분에 열린다.
#열반 vs 하느님나라
하느님나라가 기독교의 존재 이유이듯, 열반은 불교의 존재이유입니다. 무지와 탐욕, 경쟁과 다툼, 권력과 억압의 역사가 완전히 사라지고 초세간적 자비와 평화의 상태입니다. 열반과 하느님 나라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열반은 번뇌와 망상이 사라진 상태, 욕망의 불이 완전히 꺼진 상태입니다. nirvana를 음역한 것입니다. nir는 ‘여의었다’ vana는 ‘속성’입니다. 불이 꺼진 상태, 모든 속성이 여읜 고요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반은 유여의(有餘依)와 무여의(無餘依)열반으로 나뉩니다.
유여의열반은 현세에 몸을 가진 채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증득하는 것입니다. ‘여의(餘依)’는 과거 업의 결과로 남아 있는 몸을 뜻하는 것으로 몸을 갖고 체험하는 현생에서의 해탈입니다. 무여의열반은 현생 열반과 달리 과거 업의 결과인 몸이 소멸한 후에 주어지는 열반입니다.
하느님나라에서 ‘나라’는 바실레이아(basileiva) 즉 다스림, 주권이라는 뜻으로 공간이 아닌 상태를 말합니다. 하느님나라의 개념은 예수의 핵심사상으로, 신이 다스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하느님나라 대신 ‘하늘나라’라고 했는데 글자 그대로 이해한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구름 너머의 특정 공간이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후의 어떤 세상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내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상태’입니다. 인간의 차별적 질서가 아니라 불평등, 불의, 억압, 소외, 차별, 갈증을 넘어선 초세간적 세상과 가깝습니다. 기독교적 언어를 쓰자면 종말적 질서와 가깝습니다. ‘나라’는 시간과 공간이 모두 포함된 개념입니다. 깨달은 자에게는 이미 온 것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종말이라는 말은 긴장이 있는 말입니다. 이상세계를 지향하면서도 그 세계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이미 하느님 나라는 현재 와 있는 것과 같다는 긴장관계가 포함된 말입니다. 종말은 시간적 종말보다는 역사의 악순환에서 완전히 극복됐다는 의미입니다. 창조가 있으면 어디론가 나가간다고 생각했습니다. ‘END’의 뜻이 끝이라는 뜻 외에 목적의 뜻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바라는 세계, 이상적 세상입니다.
이상 세계는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깨달은 자의 눈으로 보면 이미 실현된 세계와 같다고 할수 있습니다. 예수는 현재의 질서가 이상적 질서로 나아가기 직전, 임박해 있는 시점에 살고 있는 것처럼 상상했던 것입니다. “신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하죠. 예수가 최초로 외친 메시지입니다. 미래의 일은 현재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만약에 그 일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그 약속은 이미 실현된 것입니다. 이미 이뤄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고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나라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면 이미 와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느님나라는 신뢰에 기반 했기 때문에 현재 이미 와 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은 현실 긍정적이며, 이미 와 있다는 면에서는 현실 초월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하느님나라가 있어 “이 때가 올 것이니까 함부로 살면 안 돼”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은총(Grace)의 뜻 속에서는 하느님나라에 대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신의 자기 내어 줌 즉,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입니다. 신의 자기 전달, 무조건적인 자기 내어줌입니다. 의사소통이라고 하기보다 communication의 단어 속에 ‘uni’ 즉 일치된 세계입니다.
신이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은 인간은 신에 의해 전적으로 신과 하나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내어준 신의 기반해서 세상을 보는 이는 이미 하느님나라에 온 것과 다름없고 모든 것이 성화된 세계입니다. 하지만 사회구조는 늘 꼬여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은총론은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는 말과 같이 신의 은총에 의해 신화돼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열반과 하느님 나라는 죽고 난 후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here and now)'' 의 질적 전환을 통해 이뤄지는 영적 세계이며 영생 세계입니다. 또한 세간적 질서가 아닌 초세간적 질서, 종말적 질서라는 측면에서 일치합니다.
열반은 경험을 떠나 말할 수 있는 실재가 아니며, 경험과 실재가 둘이 아닌 세계입니다. 열반은 경험하는 자에게는 ‘객관적’ 실재이지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객관적 실재가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도 마찬가지 압니다. 누구나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잇는 객관적 실재가 아닙니다. <누가복음서>에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초월적 실재, 감춰져 있는 실재로서, 영적 눈이 있는 자만이 발견하고 경험하는 세계입니다. 그렇다고 열반이나 하느님나라가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주관적ㆍ심리적 실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닌 자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도 더 확실하고 영원한 실재입니다.
#공동체성ㆍ사회적ㆍ정치적 함의
예수가 제시한 비전과 부처가 추구한 열반이 지닌 공동체성ㆍ사회적ㆍ정치적 함의는 좀 다릅니다. 하느님 나라는 열반에 비해 공동체성과 사회성이 더 강하고, 열반은 하느님나라에 비해 초월성이 더 강합니다.
그렇다고 열반에 사회적ㆍ정치적 함의가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는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고 대안적 행동을 함으로써 차별화를 정당화하는 사회를 폭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함의가 있는 것이지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가 죽게 된 것은 권력이나 모순된 구조가 그를 죽인 것인데, 부활을 선포하는 행위 등은 모순된, 차별적인 사회구조에 대한 도전과 같습니다. 예수나 초기제자들이 정치참여를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불의한 정치구조에 희생당한 것에 대한 저항은 깔려 있습니다.
열반도 현실세계 현상세계라고 한다면 여기서도 얼마든지 사회 정치적 모순과 함께하려는 보살정신이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같은 것이 중생과 더불어 살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자세라고 봤을 때, 넓은 의미의 사회정치적 모순으로 인해서 고통 받는 이와 함께한다는 뜻이 있으므로 사회정치적 내용이 함축돼 있습니다. 하지만 적극성보다는 온전한 일치 속에서 긴장 없는 도전과 같습니다. 오랜 종교전통의 역사에서 보면 사회 참여적 발언과 행동은 기독교가 더 강했습니다.
열반은 세상의 질서를 완전히 초월한 영적 실재인데 반해, 하느님나라는 초역사적(종말적)질서이면서 동시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위에서도 이뤄지는 세계로서 사회적ㆍ정치적 의의를 더 직접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몇몇 기독교인은 하느님나라를 마음속으로만 실현되는 주관적 세계로, 사회정의나 세상의 정치질서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거나, 아예 사후 세계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사랑과 정의에 입각한 하느님나라라는 공동체적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열반이 하느님 나라에 비해 훨씬 더 초월적이고 초세간적인 실재입니다. 반면 하느님 나라는 열반에 비해 더 사회성과 정치성을 띤 실재인 것입니다.
열반과 하느님나라는 초월적, 초세간적 세계입니다. 하느님나라도 결국 볼 수 있는 눈을 지닌 자만이 경험하는 초월적 세계이며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열반과 마찬가지로 영적 실재입니다.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경험된 자에게만 보이는 세계입니다. 하느님나라의 사랑, 정의 평화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결코 사회개혁이나 정치를 통해 실현되는 세계는 아닙니다. 신의 기반에 의해서 이뤄지는 신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나라에 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마음과 삶의 자세를 완전히 바꾸는 회개의 영적 전환 없이는 경험할 수 없고 실현될 수 없는 것이 하느님나라입니다. 회개도 신적인 행위이지 인간이 스스로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열반이나 하느님나라 둘 다 초월적ㆍ초세간적 세계로서 영적 존재가 경험하는 세계입니다.
#사후 열반과 하느님나라
불교의 현생 열반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나라보다 초월적이며, 둘은 사회적ㆍ정치적 함의에서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후 열반과 사후 하느님나라 사이에도 유사한 차이가 있습니다.
해탈과 사후열반이 있는 것처럼 하느님나라도 살아서 경험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이상적 세계도 있습니다. 하느님나라에도 내세성은 있습니다. 기독교는 희망의 영역으로 강하게 강조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전통적으로 세계와 역사의 최종적 완성을 믿습니다. 최악의 갈등과 죽음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세계, 이 역사가 완전히 변화돼 새로운 세계로 완성될 날이 온다고 기다리는 종말적 신앙입니다. 부활(resurrection)과 영생(eternal life)의 세계가 전개 된다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이 타락한 창조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는 더 아름답고 찬란한 ‘새로운 창조’ 로 변화시키리라는 믿음입니다. 문제는 이 새로운 창조의 세계와 지금 이 세상 사이에 얼마나 유사성, 연속성이 있으며 얼마나 단절과 질적 차이가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사후 열반은 기독교 종말의 비전보다 더 초월적입니다. 기독교는 더 구체적이고 현세와의 연계성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후 열반은 현재의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세계인 반면, 사후 하느님나라에서의 영생의 세계는 지상에서의 ‘나’의 정체성이 어떤 형태로든 보존되는 세계라고 기독교는 이해합니다. 일반적 구분입니다.
부처는 사후 열반을 무언(無言)의 신비로 남겨 두었습니다. 무기(無記)에 속하는 문제였습니다. 사후 열반의 세계를 여래가 있다, 없다고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의 지성과 언어로 노할 수 없기에 침묵을 지켰다고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현재의 나, 내세의 나가 연결해주는 것을 영혼이라고 쉽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혼이 몸에서 쑥 빠져간다고 말이죠.
기독교 일부에서는 사후 세계로서의 하느님나라를 신비, 하느님나라의 영생에 대해 부처님의 이러한 신중한 태도를 취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유치하게 사후 세계를 금은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세계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불교적 관전에서 보면 기독교의 영생도 해탈에 비해서는 훨씬 ‘현세적’ 으로 보입니다. 영생을 사후 천당으로 너무 십게 말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겠습니다.
하느님나라는 갓난아이처럼 순수한 영혼으로 하느님을 대하며 하느님과 하나되는 자들의 세게일 것입니다. 빛과 빛이 어울리듯이 나와 너의 구별이 사라지고 지상에서의 모든 기억이 사라져 그곳에서의 행복과 불행의 경험이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세계, 그야말로 무심(無心), 무념(無念), 무아(無我)의 세계일 것입니다.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 돼 ‘나’라는 것이 사라지고 지상의 행복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전혀 다른 초월적 행복, 순수한 행복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와 하느님이 완전히 하나 된 세계에 현실과의 연장을 굳이 가져가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열반과 하느님나라가 지향하는 것과 구조는 따지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화는 인간화입니다. 기독교의 한계는 신화는 예수에 전적으로 일어난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근접하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예수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은 하느님 사랑의 극치는 죽음이라 합니다. 사랑은 관계로 시작하지만 그 완성은 나는 없어지고 사랑의 주님만 남는 세계입니다. 사랑의 하느님 품에 안겨 ‘나’라는 인식이 사라져야 완전한 구원, 진정한 내세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에는 ‘하느님이 모든 것 안의 모든 것이 되는’이라고 하듯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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