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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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가는 절집기행] 금산사(하)
말세중생 구제하는 침묵의 설법이 들리는가?

“어느 쪽이 먼저야?”안개가 걷히고 찬란한 해살이 모악산 능선 너머에서 쏟아져 내리는 금산사 경내. 이른 시간이라 관광객도 한 명 없는 텅 빈 마당에서 나팔수씨가 대적광전과 미륵전(국보 제62호) 중에 어느 곳을 먼저 참배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지혜장은 이미 미륵전으로 향하면서 말했다.

“그래도 금산사의 상징이고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상징인 미륵전이 먼저지.”

나팔수씨는 햇살이 발에 밟힌다는 느낌을 받으며 아내의 뒤를 따랐다. 아내 지혜장은 절에 도착하면 이유 없이 안내문을 읽는다. 절의 안내문을 읽어서 그 절의 역사를 파악하는 것이 절집기행의 첫 순서인 셈이다.

그리고 안내문 옆의 약도를 보면서 동선(動線)을 구상한다. 경내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고 겹치지 않게 돌아봄으로써 시간을 아끼자는 것이다. 동선을 구상할 때는 중심법당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 좋겠지만 절의 신앙적 배경이나 전각의 위치 등을 고려해 결정한다.

“어, 층마다 현판이 다르네?”

금산사 미륵전은 3층으로 지어진 목탑형식의 팔작지붕 건물인데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응, 그게 다 미륵부처님을 모셨다는 뜻이래.”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중건 한 것은 766년으로 전하는데 당시에는 미륵장육존상만 조성했다. 지금의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없어진 자리에 1635년(인조 13) 수문대사가 재건하여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표율사가 지을 때부터 3층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금산사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국보 제55호, 1626년 중건)과 함께 우리나라 목조 건축의 획기적인 업적이라는 점이다. 신라 때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은 솜씨가 세월의 강물을 넘어 17세기에도 찬란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미륵전의 각 층마다 걸린 편액은 다른 글을 담고 있지만 뜻은 미륵불을 모신 건물임을 보여준다.


대자보전이란, 미륵의 범어인 마이뜨레아(Maitreya)를 한자로 자씨(慈氏)라 번역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용화지회는 미륵불이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서 3회의 설법을 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경전의 내용에서 유래된 것이다. 미륵하생신앙의 반영인 셈이다. 미륵전은 글자 그대로 미륵불을 모신 집이란 의미다.

미륵전 안은 썰렁했다. 마루에 방석이 있었지만 3배를 하는 동안 온 몸에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통층으로 구성된 미륵전 안에는 높이가 11.82m에 이른다는 본존불과 높이 8.79m의 좌우 협시보살이 모셔져 있다.

중앙의 미륵부처님과 오른쪽의 대묘상(大妙相) 보살님은 그대로 서 계시는데 왼쪽의 법화림(法化林) 보살님은 휘장으로 가려 놓았다. 보수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미륵불상은 조소불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등을 켜지 않아 실내는 좀 어두운 편이었다. 부부는 3배를 하고 발이 시려 오는 것을 참으며 법당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지혜장은 밖에서 보는 미륵전의 첫인상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면 안에서 느끼는 미륵전의 느낌은 일체의 잡념을 허락하지 않는 묵직한 침묵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 침묵이야 말로 말세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는 법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팔수씨가 얼른 나가자는 눈짓을 했고 지혜장도 허리를 굽혀 반배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 어떤 중년의 신사 두 분이 들어와 절을 하고 있는데 절하는 방법이 불자들과는 달랐다.

미륵전의 외부는 빛바랜 벽화가 주는 무상감과 굵은 기둥이 주는 근엄함으로 다가왔다. 역시 미륵전의 외부도 한 바퀴 빙 돌아보고 방등계단(方等戒壇)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근래에 지은 적멸보궁에서 계단 위의 석종형 부도를 향해 3배를 했다. 불상이 모셔져 있지 않은 보궁. 그 옆의 마당에서는 미륵전의 지붕과 층간의 벽화들 그리고 마당이 한 눈에 들어왔다. 까치 서너 마리의 합창 소리가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맑은 음성공양이었다.

“여기가 계단이면 수계의식을 하는 장소란 의미겠지?”
“그렇지. 이러한 계단이 남아 있는 곳은 금산사와 통도사뿐이야. 석축을 쌓은 것이나 부처님 사리를 모신 부도를 올려놓은 2단의 기단을 장엄한 조각솜씨가 엄청난 정성을 기울인 것 같다.”

부부는 계단의 정면 5층 석탑(보물 제25호) 앞에서 합장을 한 채 3배를 했다. 그리고 계단을 장식한 조각들을 살펴보고 경내의 너른 마당과 모악산 능선을 감상했다. 지혜장이 가방을 내려놓고 수첩을 꺼냈다.

“여보님. 조선 초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을 아시나요? 그 유명한 김시습이 여기 방등계단에서 쓴 시가 있어서 적어 왔지요. 한번 들어 보시길...”

구름 기운 아물아물, 골 안은 널찍한데
엉킨 수풀이 깔린 돌에는 여울소리 들려오네.
중천에 별들은 금찰(金刹)을 밝히는데
밤중에 바람과 우레가 석단(石壇)을 감싸 도는구나.
낡은 짐대(幢)엔 이끼 끼어 글자가 희미한데
마른 나무에 바람 스치니 저녁추위 생기누나.
객실에서 하룻밤 자고 가니
연기 속 먼 종소리에 여운이 한가롭지 않다.

“비운의 천재 김시습의 시라서 그런가? 이런 성역에서조차 비감을 감추지 못하고 슬픔이 묻어나는 시를 지었군.”
“여보님도 그렇게 느꼈어? 나도 참 구절구절 아픈 시라는 생각을 했거든.”

일체가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인식하는데서 불교적 사유가 시작된다. 무상을 모르면 집착과 번뇌가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김시습은 한 시대의 불행을 온 몸으로 지탱하던 지식인의 초상이다. 그의 무상한 삶의 여정이 금산사에도 닿아 이렇게 가슴 아린 시 한편을 남겼돈 것이다.

진표 율사 이전의 금산사와 그의 시대가 열어 둔 위대한 신앙이 세월을 따라 흐르고 흐르면서 변화를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공간은 세월이 흐른 자국을 새겨두고 있지만 그 조차도 무상의 한 단면이 아니겠는가?

부부는 대적광전의 웅장한 일곱 부처님 앞에 삼배를 올렸다. 지혜장은 무상 속을 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금산사 대적광전은 우리나라의 법당들에서 볼 수 없는 5여래 6보살상을 모신 독특한 법당이다.

1986년 12월 6일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되어 1994년에 복원한 내력이 가슴 아프다. 불단에 모신 5여래는 왼쪽부터 아미타-석가-비로자나-노사나-약사여래이며 그 사이에 모셔진 6보살은 왼쪽부터 대세지-관음-문수-보현-일광-월광보살이다. 1635년 수문 대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그 전에 있던 대웅전 대광명전 극락전 약사전 나한전 등의 다섯 전각을 하나로 통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은 넓었지만 따뜻한 편이어서 좀 오래 앉아 있으면 몸이 녹을 것 같은데 사시예불과 제사가 이어지는 극락전에서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부부는 대적광전을 나와 뒤쪽에 있는 나한전과 조사전을 차례로 참배했다. 나한전은 앞쪽에 16나한을 모시고 뒤에 500나한을 모셨는데 중앙에 모신 석가모니 부처님과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의 근엄한 표정과 나한님들의 자연스럽고 천진한 인상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명부전 옆의 대장전(보물 제827호)은 지붕의 한 가운데에 복발과 보주가 있어 독특하다. 대장전 안에서는 나이가 어려 보이는 사미승이 목이 터져라 염불을 하고 있었다. 부부는 문 밖에서 합장 3배를 했다. 그리고 대장전 앞에 있는 석등(보물 제828호)과 명부전 앞의 노주, 대적광전 앞쪽의 석련대(보물 제23호)와 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등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앞에 놓인 안내문을 읽으며 석조물들을 감상하는 동안 예불을 마친 스님들이 조용히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지혜장은 높은 곳에서 보면 이 또한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야, 금산사는 그 자체가 박물관이군.”
“그런가요? 오늘 둘러보신 금산사라는 박물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한 가지가 있다면?”
“나야 당연히 미륵전 안의 큰 미륵님이지. 마눌님은?”
“글쎄올시다. 나는 금산사의 역사 속에 나도 언젠가 한 번쯤은 포함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네.”
“와~ 이 사람, 욕심도 많아. 과거에 이 절의 스님이었을 것이란 망상? 얼른 떨쳐내고 밥이나 먹으로 갑시다. 허허허.”
“아니 뒤쪽으로 돌아가서 부도밭도 들러야지....”
금산사 너른 마당을 걸어 나오는 부부의 모습에서 달콤한 봄 냄새가 나는듯했다.
글=임연태(시인 본지논설위원) 사진=이승현(시인 사진작가) | mian1@hanmail.net
2011-04-12 오전 1: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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