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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환 스님 뵈러 왔습니다.”
“저 뒤쪽에 계십니다.”
도대체 어디라는 것인지. 스님이 거처할 만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종무소 보살님께 다시 여쭸다. “저기 맞나요?”
설마 저기일까? 상상 속 스님의 처소는 꽤 번듯했다. 그런데 인환 스님이 거처하는 곳은 입구도 공간도 좁고 천정도 낮았다. 발걸음을 옮겨보니 ‘환희당(歡喜堂)’이라는 현판이 눈에 띈다.
몇 번을 불러도 인기척이 없어 돌아서려는 찰라 크게 한 번 더 불러보았다. “스님~!”
“네~ 들어오십시오.”
쩌렁 쩌렁한 스님의 목소리는 젊었다. 좁은 입구를 통과하기 위해 몸을 옆으로 돌렸다. 방안은 책으로 가득했다. 아담한 스님이 객을 맞이한다.
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 말사인 경국사(주지 정산)는 서울 성북동 삼각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외국에서 17년 생활을 하다가 1982년 갑자기 동국대 교수를 하게 돼 한국에 오게 됐어요. 어디 마땅히 갈 때도 없었죠. 마침 이곳 주지였던 前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함께 있자고 했지요. 이곳은 원래 헛간이었어요. 와보니 마땅히 기거할 곳이 없더라고요. 당시 그린벨트 법이 엄격해서 헛간 크기는 유지하고, 개보수했죠. 벌써 28년이 됐네요. 재주가 없어 다른데 갈 줄도 모르고 이곳에 있습니다.”
경국사 북쪽에는 지관 스님이 기거하는 무우당(無憂堂)이 있다. <화엄경>에 나오는 남방의 환희세계, 북방의 무우(無憂)세계에서 착안해 인환 스님이 지어준 이름이다. 어느 날 지관 스님은 경국사 남쪽에 기거하는 인환 스님의 거처에 환희당이라고 현판을 세워줬다.
호탕한 웃음이 말을 이었다. 헛간을 개보수한 환희당은 정말 좁았다.
“어떡하나. 복이 그것밖에 없는데. 좁으면 좁은 대로 살고 넓으면 넓은 대로 사는 거죠. 수행하는 사람이 화려하거나 넓기를 바랄 것 없어~. 좁으니까 청소 자주 안 해도 되고….”
또 한 차례 스님의 웃음소리가 환희당을 메운다.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저리도 호탕하게 웃는 이를 최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요즘 어떻게 사냐?” “죽지 못해 살아.” 라며 시답잖은 말이나, 하소연이고 푸념이 대부분이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부족, 불만에는 한정이 없습니다. 자꾸 불평하고 불만하니, 괴로워 못살겠다고 하고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봐요. 좁은 방에서 이름 없이 이렇게 살고, 문명의 이기에도 전혀 인연이 없이 삽니다. 세속의 잣대로는 참 볼일이 없는 사람 같지만 나는 너무 행복하고 매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밖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채우려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내면이 고요하고 세상을 보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바로 볼 수가 있게 되니 늘 즐겁고 기쁩니다. 그것은 돈과 지위로도 살 수 없고 보상되지 않는 것입니다. 물 흘러가듯 순리대로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인환 스님의 올해 세납 81세다. 스님과 잠시 대화를 나누면서 문득‘스무 살 청년보다 일흔 살 노인에게 청춘이 있다 ’는 말이 스쳐지나갔다. 동국대와 관련된 질문을 던지자 인재 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인환 스님은 지금도 전국 사찰 큰 법회에서 법문 초청을 받으면 어디든지 간다. 1996년 동국대 교수 정년 퇴임 이후에도 동국대 불교대학원 교수, 사회교육원 교수, 일본 도쿄대 외국인 객원 교수, 조계종 법계위원 법계위원 등의 소임을 소화했다. 지금은 부산 화엄불교대 대전 백제불교대ㆍ서울 조계사불교대에서 불교학 강의를 하고 있다.
3월 24일에는 불교학술원장 겸 동국역경원장에 임명됐다. 바쁘지 않으세요?
“나이에 맞게 적당하게 바쁘게 삽니다. 무리하게 살지 않고. 또 늙은 몸 애껴 뭐하겠나하고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는 늘 갑니다.”
적. 당. 히. 사는 법은 화두 참선과 식생활 조절에서 비롯됐다.
“웰빙과 웰다잉은 평소 자기에 맞게 생활리듬을 만들어서 살아가면 병들지 않습니다. 요즘은 변화가 빠르고 온갖 정보가 범람합니다. 그럴 때 일수록 마음이 잡아야죠. 밖에서 아무리 회오리치더라도 마음이 회오리를 따라 흔들리지 않으면 됩니다. 다 지나가는 바람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바람에 끄달려 제 정신을 못 차리고 마음이 흔들리고, 사리판단력이 약해졌습니다. 마음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합니다. 또 육식위주의 식생활은 채식에 익숙한 한국인의 몸에 적응이 되지 않아 병이 납니다. 밥을 먹을 때는 오래오래 씹어서 치매를 예방하면 좋지요.”
이미 많이 들어본 듯한 이야기도 스님의 말씀으로 들으면 새롭게 들린다. 몸으로 체득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야기 중간 중간 “뽀너스”를 일러줬다. 명심 하면 득을 보게 된다는 당부와 함께.
“치매에 안 걸리고 살다가 고생안하고 슬쩍 가고 싶다고 푸념을 합니다. 세상에 바라기만 해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근간은 어떤 일이라도 우연히 생긴 일 없다는 것입니다. 우연도 없고 기적도 없습니다. 인과를 믿는 것이 불교를 믿는 것입니다. 일반 불교도들도 부처님 믿는다고 하면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부처님은 일생 법문 가운데 부처 자신을 믿으라는 말씀은 한 말씀도 없었습니다.
불교에서 사람을 가장 해롭게 하는 것으로 탐진치(貪瞋癡)를 꼽습니다. 사람들은 삼독 중에서 ‘치’ 어리석음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남다른 학식, 지식이 있고, 총명하고 명예, 권력이 있다고 해도 하는 일에 있어 인과를 모른다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스님의 말씀에 힘이 들어간다.
“눈에 보이거나 안 보이거나 관계 속에서 성립됩니다. 이 세상에 절대 내가 잘나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웃을 배려하고 남을 도와주고 사회에 이로움을 주도록 살라는 것입니다. 행복을 바라고 잘 살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 불행하고 잘 못사는데 나만 잘 사는 법은 없습니다. 일본 참사가 마음이 아픕니다. 진정하게 잘 살고자 한다면 이웃, 사회가 편안하고 안락할 때 내 자신도 진정으로 행복하고 올바르게 됩니다. 그것을 모르고 사람들은 마음가짐의 표지가 ‘오직 나만’이죠.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스님의 방에는 고요할 정(靜)과 인내할 인(忍)이 적혀있다. “항상 시간이 있을 땐 고요히 앉아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고 한가하게 남의 이야기 험담을 하지 말아라”
“일생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면서도 시간 있을 때는 늘 조용히 참선을 합니다. 모든 것은 내 마음이 근본이고 중심입니다. 창조도 마음이 하는 것입니다. 물이 본래 맑고 깨끗한 것입니다. 바람이 불거나 흔들리면 아무것도 비치지 않습니다. 물을 잠시 조용히 놔두면 오래도 걸리지 않아 물결이 고요해지면서 삼라만상이 물에 비칩니다. 우리마음은 청정한 마음입니다. 그것이 불성이라고 합니다. 보고 듣고 하는 것이 불성의 작용입니다. 한마음이 곧 불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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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와 스님
동국대는 스님에게 친정이다. 인환 스님은 1982년 2월 서울 동국대 불교대학 부교수로서, 동국대 정각원 원장을 6년간 맡아왔다. 서울 승가대 강사로도 14년간 활동하고 1986년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로 15년을 지냈다. 동국대 석림회 지도교수, 불교대학 학장, 불교문화연구원 원장, 불교대학원 교무위원 및 강사 등을 지냈다. 인환 스님은 3월 불교학술원장 겸 동국역경원장에 임명됐다. “처음에 포부를 크게 이야기 한 사람들 대부분 용두사미 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오랫동안 학교를 떠나 있다가 일을 맡게 됐고, 정식 발령도 받지 않은 상황이라 많이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나가서 실무를 봐야 알겠습니다”며 구체적인 답을 피했지만 스님은 의욕적이었다.
“동국대 불교학술원은 2년 전에 생겼습니다. 불교문화연구원, 불전연구원, 역경원, 종학연구소가 별개로 활동하던 것이 유기적인 연구활동을 위해 만들어 졌죠. 동국대 내를 아는 동국대 출신인 사람인 제가 유기적 효율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겠죠.”
학술원에 소속된 교수는 물론 연구 분야도 늘었다. 스님은 양적 증가만큼 질적인 성장을 위해 힘쓸 계획이다. 학술원에서 나온 논문집을 학진 등재지로 만들고 신진학자의 논문발표도 늘리는 등 연구의 깊이를 더해 갈 뜻을 밝혔다. 또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티베트 등 동남아 계통 불교 연구도 추진하는 등 연구범위를 세계적으로 확대한다.
역경원 사업에도 스님은 가이드라인을 세우고 있었다. 한글 대장경에 오자 및 오역 등을 수정하는 것과 전산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한다.
“동국대 역경원에서는 전산화 사업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동안 역경원은 경전 편찬과 출판, 후원 등을 통해 운영돼 왔는데, 학교에서 예산을 집행 운영하면서 새롭게 시작될 것 같습니다. 안정적인 예산 지원과 운영으로 보다 활발하게 한글 경전의 전산화도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학술원장과 역경원장을 겸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인환 스님은 불교계의 발전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재양성이라고 말한다.
“한국불교에서 인재양성의 요람은 동대입니다. 불교문화연구사업들이 순조롭게 잘 되면 관심을 가지는 학생도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재양성은 단 시간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 비전을 가지고 차근차근 해 나갈 때 필요한 인재를 배출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학승으로도 유명하지만 학생들에게 참선 실수를 가르치기 위해 부단 애를 써왔다. 불교대 졸업 필수 과목인 ‘참선 실수’를 만들고 직접 지도를 했다. 교양수업이기 때문에 타대학 학생들도 참여가 가능한 수업이었다.
“한 강좌에 100여 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들었죠.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는 학생도 있었지만 개인의 일생을 살아가는데 큰 양식이되고 좋은 것이라고 하면서 아주 쉽게 참선 기초법을 강의 했습니다. 그것이 대단히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참선 실수 강좌는 처음에는 인기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듣는 학생이 늘었다.
“화두선을 하는 한국불교가 세계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랜 전통과 전문 선원이 전국적으로 있지만 한국불교를 하는데 있어 처음 초발심을 낸 사람들 초보자를 위한 매뉴얼이 잘 안 돼 있습니다. 초보자를 이끌어가는 매뉴얼을 만들어 습관처럼 참선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방법에 의지하면서도 일반인들이나 학생들이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인환 스님은 정년퇴직하고 나서도 야간 불교대는 물론 동국대 사회교육원에서도 ‘참선 실수를 교육했다. 내무부ㆍ금융연수원 등 공무원은 물론 각국 대사관, 정신문화 연구원에서도 강의를 했다.
스님의 이력을 듣는데도 시간이 상당히 지났다. 스님은 자신의 이력을 이야기하는 하면서도 재미나고 꼼꼼하게 설명했다. 스님의 이야기는 점심시간을 훌쩍 넘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한 끼쯤 굶었다고 나가자빠질 만큼은 아닙니다. 기력이 됩니다.”
그러고도 스님의 법문은 이어졌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충격 받지 마세요. 충격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팍팍 곰삭게 만들고 건강을 나쁘게 하는 주범입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즐겁게 사세요. 같은 인생 왜 그렇게 찌그리고 삽니까. 자~ happy end.”
스님과 경국사를 나왔다. 스님은 아직까지 휴대전화도 자동차도 없다. 씩씩하게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중간 중간 만나는 불자들에게 ‘어서오세요~’ ‘조심히 가세요~’라며 정다운 인사도 아끼지 않는다. 따뜻한 청춘 인환 스님의 인사에 사람들의 마음에도 봄이 아지랑이 피어올랐다.
인환스님은
1931년 원산 출생, 1952년 부산 선암사 소림선원에서 출가 득도, 석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자운 스님을 보살계 수지, 1955년 해인사 불교전문강원 수학, 1956년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1959년 해인사 ㆍ통도사 불교전문강원을 졸업했다.
1964년 동국대 불교대학 졸업, 1966년 동국대 대학원 졸업, 1970년 일본 고마자와대 대학원 선학전공 박사, 1975년 일본 도쿄대학 인도철학전공, 문학박사 학위 수여, 1982년 동국대 교수, 1996년 동국대 정년퇴임했다. 동국대 교수직 정년퇴임 하면서 봉직하시면서 받으신 전 월급, 퇴직금을 장학금으로 쾌척하며 청빈의 삶을 살아왔다. 현재 서울 삼각산 경국사 한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