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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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부처님 연기에 모든 답이
현대사회에 구현해야할 불교적 가치 …첫째도 둘째도 연기(緣起)
불교교단의 이름인 승가(僧伽)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범어 상가(Sa?gha)의 음을 한자로 옮긴 것이며, 승가는 줄여서 승(僧)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뜻으로 번역하여 중(衆)이라고도 하는데, 집단, 또는 대중의 의미를 가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비구나 비구니 한분을 일컬을 때에도 스님, 또는 중이라고 하는데, 본뜻과는 어긋나는 것이다. 그런데 승가, 또는 승이라고 할 때에는 단순히 여러 사람이 모인 집단이나 대중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는 최소한 4인(또는 3인) 이상의 비구가 모여 화합해서 함께 수행하는 단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승가는 단순히 집단이라는 의미 외에도 화합이라는 조건이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한자로 번역할 때에 중(衆)의 앞에 ‘화합’을 수식어로 붙여 ‘화합중(和合衆)’으로 칭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온전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승가의 의미를 이렇게 엄격하게 제한하여 정의하면 화합하지 못하고 분열하는 교단은 승가의 이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승가’라고 칭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범어 상가라는 명칭은 불교교단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었으며, 더욱이 부처님께서 새로 지으신 명칭도 아니었다. 부처님께서는 당시에 사용되고 있던 보통명사인 상가라는 말을 채용하여 자신의 교단 이름으로 삼았을 뿐이었다. 상가라는 말의 유래는 불교교단의 명칭으로 사용되기 이전부터 집단(集團), 집합체(集合體), 조합(組合)을 의미하는 용어로 이미 사용되어 온 것이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많은 신흥의 종교가들이 사문(沙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여러 지방을 유세(遊說)하고 제자들을 모아 교단을 조직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종교가들은 때로 ‘상가의 소유자’, 또는 ‘가나(gana)의 소유자’라고 불리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는 공화정체의 국가(共和國),그리고 상인들의 동업조합(同業組合)도 또한 상가, 또는 가나라는 명칭으로 불리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가, 또는 가나는 사문들의 집단이나 불교교단 등 종교적인 집단이라는 의미 외에도 정치체제와 경제조직의 명칭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종교적인 집단이나 불교교단,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조직을 막론하고 상가, 또는 가나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던 집단의 공통적인 성격으로서는 동일의 목적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로서 그 구성원은 상호 평등하며, 동일의 규율에 복종하고, 그 가입은 자유의지에 따르며, 집단의 의사결정은 구성원의 합의제에 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혀 성격이 다른 3개의 조직에서 각기 사용한 상가의 공통적인 의미는 구성원의 평등한 관계 속에서 민주적인 운영을 통하여 완전한 화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상가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화합을 이루는 생활원리는 무엇이었는가? 부처님께서 그러한 화합의 생활원리로서 제시한 것은 바로 연기설(緣起說)이었다. 연기설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의 핵심내용이며, 새로 발견한 존재의 이법이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설명 내용이나 방법이 어떠하든 간에 모두 연기설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따라서 연기설은 불교의 출발점이며, 모든 교설들의 사상적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양하게 전개된 불교의 모든 교설들은 연기의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응용 이론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緣起)라는 말은 범어 쁘라띠땨사무뜨빠다(prat?tya-sam-utp?da)를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prat?tya'', ''sam'', ‘utp?da’ 라는 3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prat?tya''는 ‘…때문에(故)’, ‘…에 의해서(緣)’, 또는 ‘…로 말미암아(由)’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m''은 ‘함께’라는 뜻이고, ‘utp?da’는 ‘태어남(生)’, ‘생김(起)’, 또는 ‘형성(形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연기는 ‘… 때문에 함께 태어남’, 또는 ‘…을 말미암아 생김’이라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풀이하면 모든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서 생성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연기의 원리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그것을 생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되고, 소멸되기도 하게 되며,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관계를 가짐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관계가 깨어질 때 존재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연기의 원리는 존재의 ‘관계성(關係性)’, 또는 ‘상의성(相依性)’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원리를 좀 더 풀어서 표현하면 이 세상의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났거나, 혼자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의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다.

서로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존재를 성립시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변하거나 없어질 때 존재 또한 변하거나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인 것일 뿐이고, 절대적인 것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서로 관계를 가짐으로써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도 있을 수 없고, 또한 영원한 것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존재의 실상을 불교에서는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연기의 원리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고유성이나 실재성은 인정될 수 없다. 결국 모든 존재는 무자성(無自性, asvabh?va)이고,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空, s?nyat?)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연기법은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다. 역시 부처님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나아가 신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가 있어서 만든 것도 아니다. 이것은 존재의 이법(理法)으로서 존재와 더불어 있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부처님 같은 어느 한 사람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사실과는 관계없이 존재한다. 부처님은 단지 이 법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뿐이며, 그 법의 발견에 의해서 한 인간에서 부처님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된 뒤에도 그가 발견한 법에 의지하고, 그 법에 따라 살았다. 또한 부처님은 이 법을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제자들에게도 가르쳤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은 이 연기법을 처음으로 발견해서 그것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고 중생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응용하고 실천했을 뿐이다.

그러면 부처님이 연기법을 응용해 해결하고 한 것은 어떤 문제였는가? 부처님이 그의 전 생애에 걸쳐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인생의 고(苦, duhkha)의 문제였다. 부처님은 연기의 원리에 의해 먼저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을 추구한 뒤, 그 고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의 소멸, 그것이 곧 해탈이자 열반이었다. 부처님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고로부터 해탈하는 길을 가르쳤다. 부처님 당시의 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그것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다는 것이었다.

특히 전문적인 출가 수행자는 교단에 들어오게 되면 그때부터 오로지 깨달음을 목표삼아 수행해야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에로의 길(道)’인 실천방법은 여러 가지 형태로 설하여졌으며, 또한 체계화되었다. 불교의 근본교설인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가 바로 그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연기의 원리에 의해 개인적인 차원에서 고를 해결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부처님은 또한 연기의 도리를 통하여 극단에 치우친 사람들에게 중도적인 진리를 보여 주었다. 연기의 도리는 모든 존재가 생존하고 유지되는 참모습을 밝힌 것으로서, 이러한 세계관에 의하면 이것과 저것, 너와 나의 관계에서 서로가 관련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

모든 것은 서로서로 상의상자(相依相資)하며, 서로의 존립과 소멸의 필연적 이유가 된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의거하여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볼 때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판단하거나 고정적 독단에 빠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자세를 지킬 수 있다.

또한 온갖 편견과 대립적인 극단에서 벗어나 조화와 화합, 협력과 공존이라는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이상을 자신과 제자들로 구성된 교단에서 구현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은 현실의 세속사회에서 이러한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업조합과 공화국에서 발견했으며, 그것을 모델로 하여 자신의 교단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출가 수행자로 구성된 출세간적 사회와 일반 세속사회를 구분하였다. 그리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민주적인 운영을 통하여 완전한 화합을 이룬다는 이상은 어디까지나 출세간적 사회인 자신의 교단을 통하여 구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세속사회를 향하여 자신의 교단에서와 같이 계급제도를 혁파하고 완전한 평등을 실현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또한 정치권력에 대하여 비판적이기는 하였지만 왕국체제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부처님은 종교적인 차원을 벗어나지는 않았으며, 정치혁명이나 사회개혁을 의도하지도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상가의 이상을 구현하고 해탈의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출가생활을 권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세속적인 생활도 이를 인정하고 존중하여 세간의 재가사회 생활을 종교적, 윤리적으로 정화하기 위한 가르침도 꾸준히 설하고 있었다.

사회는 나와 남과의 모임이고, 그 나와 남과의 올바른 관계가 사회윤리이다. 부처님은 ‘남’이라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통해 자비와 보시, 그리고 4섭법(攝法)의 윤리로 사회단체의 화합과 협동을 이루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나와 남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전체 속에서 나와 너를 각기 고립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전체 속의 한 구성인자로 파악하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세속사회를 정화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최병헌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
2011-04-04 오후 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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