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수행자로서, 위의를 갖추고 있는가’라는 화두가 마곡사 ‘자성과 쇄신’ 결사대회에서 나왔다. 이 화두는 ‘불제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었는가’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한국불교를 생각해 본다.
불교는 카스트제도라는 전통을 거부함으로써 한때나마 인도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는 종교로서의 위치를 누리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교단의 한계로 작용해 결국 인도에서 쇠락의 길을 걸어가게 됐다.
하지만 차별을 거부한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불교가 차별을 용인할 수는 없다.
불교교단이 유지되는 근본은 사부대중이다. 수행을 하는 출가자와 생활을 하는 재가자는 다른 겉모습으로 구별은 되지만 교단 안에서는 모두 하나의 바다, 즉 부처님의 제자인 것이다. 출가자는 수행의 모습으로 재가자에게 깨달음의 길을 보여주고 있으며 재가자는 보시하는 모습으로 출가자에게 깨달음으로 가는 실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바라문은 서민의 보시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계급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받는 것을 부정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들이 이미 부유했기 때문이다. 바라문은 왕족, 귀족, 자산가들과 결탁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서민에게 보시를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우리 한국불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
이 문제다.
물론 오늘날 우리 불교교단은 서민들의 보시를 외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교단이 서민들의 보시를 재가자가 출가자에게 보여주는 깨달음으로 가는 실천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
교단의 일부 출가자들은 서민들의 보시를 수행의 거울로 삼는 것이 아니라 기도나 천도제의 댓가로 당연히 바쳐야 할 공희(供犧)로만 여기고 있다. 따라서 재가자들은 평등한 도반이 아니라 출가자와 다른 계급의 사람으로서 교단 안에 새로운 카스트제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혹시 우리 교단의 일부가 저 바라문처럼 이미 부유하기 때문은 아닌가?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막강한 권력과 제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교단 안의 평등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불교가 아니라면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것을 거부해야 한다. 불교교단이 평등을 주장해 인도에서 소멸됐다고 해도, 아니 한국사회에서도 소멸될 수 있다고 해도, 평등을 외면하는 불교교단은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다시 보고 스스로에게 묻고 답할 필요가 나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