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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때는 삶에 철저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
“법정 어른 스님이 오늘 오후 1시 51분 열반에 드셨습니다.”고 입적 소식을 전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 달 말이면 입적 1주기를 맞는다. 입적 1주기를 앞두고 안산 우리정신과 원장 피상순 박사(57)를 만났다. 피상순 박사는 의과대학 본과 1학년 때, 법정 스님이 쓰신 <무소유>, <영혼의 모음>을 읽고 받은 감동을 어쩌지 못해 무작정 송광사를 찾았다. 눈이 많이 내려 차가 엉금엉금 기는 바람에 늦저녁에 도착했다. 산문에서 늦었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해 옥신각신하는데 바깥나들이에서 돌아오던 스님 한 분이 딱한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데리고 들어갔다. 그 덕분에 늦게나마 따순 저녁밥도 얻어먹고 후원에서 잠을 자고 난 피상순. 이튿날 아침 송광사 원주소임을 보던 청학 스님에게 법정 스님을 거처를 물었다. “처음엔 스님이 옻이 올라서 손님을 못 만난다고 그러더니 ‘ㅂ’자를 따라 올라가라고 일러주더군요. 그 말씀 따라 올라가니 마침 스님이 회색 털모자를 쓰고 물을 뜨러 나오셨어요. 처음 뵌 스님 눈이 샛별처럼 맑아서 너무 놀랐어요.”
어머니가 상주 남장사에 가서 아들 하나 더 낳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린 끝에 태어난 소녀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다. “엄마도 함께 교회 가자!”며 엄마 팔을 잡아끌 만큼 열혈신도였다. 그러다 대학교회에서 김흥호 선생을 만나고 나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불교를 잘못알고 있었구나.’하고 깨달았어요. 선생님은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동양철학을 구슬 꿰듯이 이어주셨어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듯이 석가모니는 부처님이시다. 너희도 그리스도가 되고 부처가 되려고 애써야 한다고 가르치셨어요. 대학교회 예배를 1부는 김동길 선생님이, 2부는 김흥호 선생님이 이끌어주셨거든요. 법정 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김동길 선생님과 김흥호 선생님 말씀을 드렸더니 잘 아시더라고요. 차를 마시면서 두 분 선생님이야기를 주로 나눴어요.” 작은 예수라 불릴 만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피상순은 그 뒤로 아침에는 교회엘 가고 저녁때는 절에 다녔다. 절 나들이를 잦다 보니 송광사 스님들은 피상순을 다 알아보곤 “야소교 왔어?”하며 반갑게 맞았다.
마치 학부모라도 된 기분이요.
“법정 스님은 늘 살아있는 사람은 날마다 꽃처럼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잃은 피상순은 스님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학교 다닐 때, 스님이 ‘편지다!’ 하면서 봉투를 건네주세요. 나중에 꺼내보면 용돈이 들어있어요.” 그런 인연 때문이었을까? 첫 월급을 타자마자 스님께 드릴 선물부터 골랐다.
첫 월급 받아 보내준 선물과 용돈까지 받고 보니
마치 학부모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요.
山을 생각해준 뜻에 안으로 고마움이 가득 고이오.
………… 十二月 二十八日 合掌
“제가 전문의 따고난 다음핸가? 스님께 가서 밭도 매어드리고 친구가 도자기 굽는데도 다녀오고 학회준비도 하면서 이리저리 다니다가 교통사고가 났어요. 이리원광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스님이 여러 번 다녀가셨어요. 치료비하라고 돈도 주시고.” 법정 스님은 조선일보 칼럼에 그 이야기를 썼다. “생사 갈림길이 어떤 것인지 전존재로 느꼈을 것이다.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살아있는 사람들은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때 사망했으면 재齋나 지내주며 슬퍼하다가 점점 기억에서 사라질 생각을 하니 우리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덧없는 것인지 새삼스레 되새긴다.”고.
전공을 신경정신과를 고른 동기는 뭘까? “사람들이 가진 문제가 그 사람 문제만은 아니잖아요? 마음공부에도 도움이 되겠구나 싶었어요. 진료를 하면서 스님이 하신 말씀을 많이 써먹어요. 스님은 장미꽃은 저리도 고운데 어떻게 저런 가시가 달렸느냐며 툴툴대기보다 보기 싫은 가시에서 어쩌면 저리도 고운 장미가 피어났을까? 좋은 방향으로 헤아리라고 하신 말씀이나, 스님이 봉은사에 사실 때 배를 타려고 열심히 뛰어왔는데 배를 놓치고 만 아쉬움에 마구 화를 낸다면 배도 못하고 화도 나니 두 가지 손해를 보는데, 뒤집어서 내가 좀 일찍 왔구나 생각하면 남보다 자리도 좋은데 잡을 수 있고 화낼 일도 없어진다고 했던 말씀을 환자들한테 들려줘요. 거꾸로 보기, 인지행동치료거든요.”
에너자이저
인상에 남는 환자를 물었더니 전공의 시절이야기를 꺼낸다.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낮에는 집에 콕 틀어박혀 있다가 밤에만 살짝 나가서 술 한 잔 마시고 돌아오곤 하는 스무 살 난 청년을 부모가 정신분열증이라며 데리고 왔다. “교육자 집안이어서 형제들 모두 조신하게 제 길을 가는데, 이 청년만은 좀 특이했대요. 시를 쓰는 친구였는데, 고등학교 다니다가 학교가 썩었다며 느닷없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버텨서 보다 못해서 데리고 왔대요.”
청년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피상순 박사 눈엔 아무리 봐도 문제가 있는 청년이 아니었다. 그러나 식구들은 도통 믿으려 들지를 않았다. 여러 차례 부모를 만나 이 친구가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어, 크게 벗어나는 일은 없을 테니 믿어주라고 끈덕지게 설득했다. 바깥나들이를 하고 싶어 하는 청년을 안타깝게 여긴 피상순 박사는 절대로 내보내면 안 된다는 보호자들 경고에 눈을 질근 감는 모험을 감행한다. “환자 보호 규칙을 아는 사회복지사와 함께 내보냈어요. 너무 좋았나 봐요. 그때 병원에서는 환자들 정서에 도움이 되라고 토끼를 길렀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장에 갇혀있는 토끼가 마치 제 모습 같다면서 풀어줬어요. 그리곤 끼니를 굶지나 않을까 걱정된다면서 낑낑대면서 다시 찾아온 일도 있었어요.” 그 청년은 병원에서도 꾸준히 시를 써서 MBC 청소년 문학상 공모전에 출품해 당선이 됐다.
그 사이에 어머니가 청년을 위해 굿을 했다. 청년은 질색을 하며 어머니를 대놓고 경멸했다. 피상순 박사는 청년에게 “굿도 우리나라 전통문화 가운데 한 줄기로 봐야 한다.”며 굿에 관한 책도 구해주면서 너무 미신이라고 몰아붙이지 말고, 엄마는 엄마 세계를 살고 너는 네 세계를 살면 되지 않느냐며 설득했다. “큰 길 한 켠에 큰 바위가 놓여있는데 애써 치우려고 괜한 힘을 쏟지 말고 비켜 가면 앞길은 탄탄대로가 아닐까?” 그런 노력에 힘입어 마침내 청년은 안정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갔다. “퇴원하고 나서 백 편이나 되는 시를 써서 제게 보내줬어요. 아마 지금도 시를 쓰고 있을 거예요.” 올바로 보고 믿어주는 일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증명해주는 가슴이 찡해지는 이야기다.
아직도 처음 시작할 때 못지않은 열정 넘치는 피상순 박사. 환자들 돌보려고 병원에서 숙식을 해결할 때가 많아, 집이 마치 별장처럼 느껴진단다. 병원 일 말고도 간질 환자를 돕는 의사 모임 장미회 활동을 18년째 꾸준히 하고, 사찰 진료봉사를 비롯해 노숙인들 슈바이처 선우 경식 선생이 세운 요셉의원에도 꼬박꼬박 나가 나눔 활동을 한다. 그 가운데 짬을 내서 법원에서 이혼문제 상담도 했다. 또 경기도 부탁으로 교도소 수감자를 위한 상담 계획도 세우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종교를 뛰어넘은 여성 수도자들 모임 삼소회에서, 기아와 학대에 시달리고 교육을 받지 못하는 에티오피아 소녀들에게 염소 한 마리씩을 보내 자립을 돕는 프로그램을 둘레 분들한테 널리 알려서 염소를 600마리나 보낸 피상순 박사, 바쁜 가운데도 세상을 맑히는 일에 열중인 에너자이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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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자체가 예술
법정 스님은 불일암 시절 그곳에 늘 오는 이들을 불일권속이라고 부르며 식구들처럼 살갑고 도탑게 맞았다. “여름이면 우리는 늘 불일암 앞뜰에 멍석 깔아놓고 밥을 먹었어요. 밥 먹고 나면 인공위성 찾기를 하는데 스님이 아주 잘 찾으세요. ‘어? 저기다! 저기, 저기.’ 하시면서….” 생생히 떠올리는 피상순 박사. 코끝이 금세 빨개진다.
“불일에 달맞이꽃이 많았어요. 한 여름 저녁이면 노란꽃잎이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시나브로 벙글어요. 그 모습을 바라보면 세상 시름이 다 사라지죠. 겨울 저녁 청매화가 필 때, 스님은 명상 음악을 한 곡 틀어주세요. 우리는 마루에 앉아 그 음악을 듣곤 했어요. 향긋한 청매 향기가 섞인 맑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음악을 듣다 보면 ‘이곳이 극락정토가 아닌가.’ 싶었어요. 그처럼 스님은 늘 분위기도 완벽하게 연출하세요. 나들이를 하셔도 어느 곳에 어떤 풍경이 좋다는 걸 아시곤 딱 그때 맞춰가세요. 유달산도 꼭 보름달이 뜨는 보름날 가셨어요. 인도 타지마할도 달이 뜨면 네 군데인가? 여섯 군데서 달이 보인다죠? 달 뜰 때 맞춰서 타지마할엘 가셨대요. 스님 삶 자체가 예술이잖아요. 스님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떴어요. 스님덕분에 정말 좋은 추억들을 가질 수 있어서 너무 고마워요.” 스님 자취를 더듬어 다니면서 꼭 빠지지 않고 듣는 이야기가 스님이 지닌 절대미감 이야기다.
노벨소포상이 있다면
불일식구들 가운데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피상순 박사가 스님한테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다. “제가 꽃을 좋아해서 꽃시장을 자주 다녔거든요. 유월이었나? 장미꽃이 너무 고와서 소포로 보냈어요. 스님한테. 그랬다가 산목숨을 소포로 보냈다고 야단을 많이 맞았어요. 숨 막히게 했다고.” 그 일을 스님은 샘터 기고 글에 쓰셨다. “그는 엉뚱한 짓을 잘한다. 한번은 장미꽃을 한 아름 소포로 부쳐와 나한테 야단맞은 일도 있다. 살아있는 꽃을 소포로 보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생명을 지닌 꽃을 왜 그토록 학대하는가. 네덜란드나 영국 같은 나라라면 또 모르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우편제도가 아직도 엉성한 곳에서는 꽃을 소포로 부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스님은 수선화도 좋아하세요. 학생 때였는데, 친구 따라 제주도엘 갔는데 바닷가에 수선화 한 무더기가 피어있어요. 스님 생각이 나서 그냥 손으로 쑥 훑으니까 뿌리째 뽑히더라고요. ‘스님한테 갖다 드려야지’ 마음먹고는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광주공항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고 불일암까지 갔어요. 그때도 학생이 택시타고 왔다고 한 걱정을 들었어요. 스님은 약간 도에서 벗어나면 걱정해주세요. 아버지처럼. 그 꽃이 금잔옥대 수선화에요. 하얀 꽃 안에 노란 ‘금잔’이 놓여있는 꽃인데 향긋하기 그지없어요. 스님은 그 씨를 받아 이듬해 수선화를 많이 심으셨어요.” 스님은 그 내용도 글로 풀어내셨다. “수선은 의대생인 상순이가 제주도에 갔다가 친구 집에서 얻어온 것이다. 가져올 때 꽃망울이 맺힌 걸 화분에 옮겨 심고 날마다 한 차례씩 물을 주었다. 이름이 물을 좋아하는 수선이니까. 꽃은 50일도 넘게 짙은 향기를 내뿜으면서 마냥 피어 있었다. …눈 속에서 피는 꽃이라서 그런지 노래 가사처럼 ‘붙일 곳 없는 정열을 가슴 깊이 감추고 찬바람에 쓸쓸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었다.”
의대를 다니던 피상순 박사는 자연스럽게 스님 건강을 챙겨드렸다. “제가 의과대학엘 다니니까 스님은 어디가 아프면 제게 물어보시곤 했어요. 또 스님이 몸이 불편하다시면 확인해 드리고 피나 소변을 받아다가 검사를 해서 결과를 알려드리고 그랬어요. 스님은 그런 저를 홈닥터라고 부르셨지요. 그때 병원검사실에선 어떤 분이신데 피나 소변이 이렇게 맑으냐고 묻더라고요. 불일에 가보면 가끔 스님이 빨려고 내놓은 옷을 보거든요. 그런데 그 옷이 마치 갓 빨아놓은 옷처럼 너무 깨끗해요. 몸이 아주 깔끔하신가 봐요.”
피상순 박사는 스님이 필요한 필기구도 늘 사다드리곤 했다. 스님은 문방구가 떨어지거나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피상순 박사에게 엽서를 보내 부탁했다. 그런 까닭에 스님이 붙여준 별호가 문방구담당보좌관이었다. 홈닥터로 문방구담당 보좌관으로 열심히 공무를 수행하다보니 스님께 소포를 많이 부쳤다. 스님은 노벨소포상이 있다면 상순이가 받을 것이라고 했다.
피상순 박사는 스님이 병원에 계실 때 몇 차례 현장 스님을 따라 갔다. 어느 날 병실 분위기가 무거웠다. 그날 마침 학회에서 받은 형광펜을 떠올린 피상순 박사는 “문방구 담당보좌관 왔어요. 스님. 여기 형광펜 있어요.” 하고는 스님에게 건넸다. 오래전 기억을 떠올린 스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고맙다는 말씀을 주셨다. 그리고 에티오피아 소녀에게 염소 한 마리 보내기 바자회에 원불교 교무님이 어른스님 글씨를 한 점 내놨는데 인기 짱이었다는 말씀드렸더니 껄껄 웃으셨다. “말씀 끝에 스님이 계셔서 올곧게 살게 되어서 너무 고맙다는 말씀도 드렸어요.” 스님께 고마워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이 어디 피상순 박사뿐이랴.
돌아오는 길. 구한말, 배우고 익힌 바를 몸소 실천(知行合一)한 선비 면암 최익현 선생과 함께 살았다 해서 천하동생天下同生이라 했고,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천하동사天下同死라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