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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1000년 물어보려고? 뭐 다른데서 얘기 다 했는데….”
이미 많은 이들이 스님을 스쳐지나간 듯했다. 자칫 서로에게 무료함만 줄 것 같았다.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종림 스님(67)의 첫 마디였다. 편한 인사를 하듯.
눈이 소복이 쌓인 2010년 12월 종림 스님을 만나기 위해 안암동 고려대장경 연구소를 찾았다. 종림 스님의 얼굴은 부석했다. 머리와 턱수염, 눈썹은 눈을 맞은 듯 하얗게 빛이 바래 있었다. 말씀을 청했다. 주제는 뻔한(?)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는 ‘대장경 1000년’이었다. 말씀을 청하며 20세기 정보저장매체 녹음기를 꺼냈다. “Low battery” 가 깜박였다. 아뿔싸. 밤새 전원을 켜놓았나 보다. 고려대장경 1000년의 역사를 새로 쓴 종림 스님의 말씀을 음성으로 오롯이 저장하는 일은 글렀다. 기억력과 속기 실력을 믿으며 모든 말씀을 옮겨 적기로 했다. 종이와 펜만 들고 있는 현대판 원시인은 불안했다.
“활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목판은 정보전달과 복제의 중요 매체였어요. 목판은 독특한 기술이라. 목판 대장경은 문자로 된 불교 정보 매체의 집합체죠. 학술ㆍ기술ㆍ문화적인 바탕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에요.”
스님은 “대장경은 문화민족의 자부심이었다. 대장경은 매체이고 도구였지 단순히 적을 막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Ctrl+C(복사)와 Ctrl+V(붙여넣기) 로 해결하는 이 시대 목판과 활자 이야기가 펼쳐졌다. 원시인의 손은 빨라졌다.
종림 스님은 해인사 행자 시절 장경판전에서 들어서는 순간 “아~~. 이건 진짜 책이잖아”하는 경탄이 터졌다.
“국민 학교 때 해인사로 여행가서 보기야 봤지. 밖에서 볼 때는 그냥 빨래판이지 뭐. 그런데 들어가서 보니까 입이 떡 벌어지면서 감탄사가 나오는 거야. 초조대장경을 처음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초조대장경이 불타 없어졌다는 기록은 있지만 우리나라에 있다는 건 몰랐어. 초조대장경 인본(印本)의 존재가 알려진 것도 1960년대의 일인데, 그때 한 번 놀랐고, 의천의 속장경 중 화엄소초(疏抄)를 볼 때도 그랬지.”
스님은 대장경을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규모와 만든 이유, 목록 정리 등을 하나씩 풀어갔다. 1983년 자연과학분야 일부에서 쓰이던 컴퓨터를 인문과학 분야에서 활용하면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6개월간 광화문 중앙전산학원을 다니며 컴퓨터를 섭렵했다. 1991년 일본 국제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일본 전역의 대장경 전산화 작업을 보고 “할 일 도 없는데 이거나 하지”라며 고려대장경 전산화 작업에 착수했단다.
스님의 전산화 작업에는 많은 것이 내포돼 있었다. 한역 대장경 가운데 최고의 판본이라 일컫는 고려대장경이 활자화 되지 못한 것을 극복하고 싶었다. 불교정화나 개혁의 실패, 정보사회에 진입등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스님은 “대장경이 보물로써 보관되고 존중되기보다 활용되길 바랐다. 정보화 사회에서 불교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았고 더불어 불교가 바뀔 수 있는 계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정 신수대장경이 불교학의 기본 텍스트로 사용되는 것은 체제나 양보다는 활자본에 있었다. 고려대장경을 전산화하면 활자화라는 규격화와 컴퓨터가 지닌 효용성을 함께 얻어, 불교학의 기본 텍스트로 활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불교는 과거 형식 그대로다. 특히 강원은 과거 서당식 경전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였고, 불교는 관습에 갇혀 있었다. 솔직히 답답했다. 경전의 재구성을 꿈꿨고, 내 식의 불교를 꿈꾸기도 했다.”
강원에서의 공부는 해석방법도 그렇지만 교리적 해석에 그친 교육에 한계를 느꼈다. 종림 스님은 교리해석보다 불교적 입장에서 현실사회의 사건을 해석해 내는 불교를 원했다. 불교가 문자 해석에 그쳐서는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문제ㆍ사건 중심의 교리가 필요하다. 경전보다 불교적 시각이 중요하다. 즉 연기론을 바탕으로 역사, 생물, 진화, 과학을 봐야한다”고 강조했다. 경전의 전산화에 평생을 바친 스님은 이미 경전을 버린 상태였다.
자아의 벽을 깨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정보를 공유하고 다루기 쉽게 함으로써 불교적인 방법론의 확실성을 추구하고, 수행방법이나 태도의 차이에 따른 선택의 폭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봤다.
종림 스님은 “그릇이 바뀌면 그 안에 담기는 내용도 바뀐다. 그릇을 바꾸는 일, 새로운 그릇에 옮겨 담는 일은 도전이고 동시에 시련이다. 정보매체를 바꾸면 달라지기 싫어도 바뀌게 돼 있다”며 미래를 내다봤다.
일반인에게 대장경은 ‘한자’와 ‘분량’의 벽이 있다. 스님은 컴퓨터에서는 다중 언어 처리나 변환을 통해 이 문제의 한계를 풀어갈 수 있다고 본다. 한역의 여러 장경(송판, 고려판, 신수 등)이나 이본 주석서 등을 한 화면에 편집할 수 있고, 산스크리트어, 빨리어, 티베트어, 한글, 일본어, 영어 등 여러 언어로 기록된 불교의 전적들을 하나의 장에 엮을 수 있는 새로운 전자 대장경을 편찬할 수 있다. 결국 전산화는 역경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기초 작업이다. 현재 스님은 고려대장경을 중심으로 한글 대장경, 일본어 대장경, 영역 불전, 산스크리트어, 빨리어, 중국어 등으로 쓰인 불전을 통합 전산화하는 통합대장경 단계를 밟고 있다. 아직 한글대장경의 전산화가 남았고, 티베트어도 남았다. 미얀마, 대만 등에서 자본을 투자해 통합디지털화를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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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 구조만 있으면 됩니다. 기초자금이 없고 공동으로 하고 나면 소유권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하기 시작하면 5~6년이면 됩니다.”
새 시대가 오기는 왔나보다. 스님은 컴퓨터는 물론 인터넷과 사이버 공간의 원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인터넷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인드라 망이자, 현실에서는 연기의 세계라는 것. 스님의 컴퓨터 실력은 빌게이츠 정도는 될 듯 한데 스님은 “몰라~!. 손 뗀지 10년이 더 됐어. 바람잽이(잡이)지 뭐”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스님의 근본 목표는 불교 정보화 사회였다. 불교적 사고와 기획이 곧 불교적 세상이다.
“체계와 틀만 가져다 놓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불교인이다’라는 생각으로 덕을 보는 것이 아니다. 연기는 상하구조가 아니다. 팀과 독립체이면서 관계를 맺는 사이다. 사이버 공간이 인드라망의 세계라고 한다면 그 실용성ㆍ효율성이 증명돼야 설득력을 갖는다.”
첨단과 진보의 종림 스님에게 스마트폰과 미래에 대한 진단을 듣고 싶었다.
“그런 거 몰라 몰라. 이제는 배우고 배워도 잊어버려. 그래서 안 해. 얼마 전 연구원 2명이 뭘 가지고 이래저래 하더니 식당에 찾아 들어가는 거야. 신기하더라고.”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었던 스님이 빵 터졌다. 스님의 웃음은 위축되지 않는 털털한 쑥스러움이었다. 미래에 대한 진단은 ‘신기함’ 이었다.
대장경 조성 1000년이 흐른 지금 세상은 신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마무리 하게 된 것은 운이지. 운이야. 만약 전산화 작업이 진행되지 않았거나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2011년 대장경 1000년은 일회성 기념식에 그쳤을 거야. 시간상의 1000년이지. 전산화 작업을 하고 나니 1000년 대장경이 새 시대를 맞게 됐지.”
미래 세대는 이제 전산화된 대장경을 가지고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앞으로의 과제는 학자를 중심으로 전산화 된 경전을 바탕으로 통합 활용하는 일이 남았다. “사실 일반인들은 경전을 모두 보기에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학자의 가공이 있어야 한다. 실현 도구는 준비됐다. 얼마나 좋은 생각을 가지고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불교적 세상은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은 “행복한 것이고 좋은 것”이라고 했다. 이런 작업에는 상하 승속의 개념이 없다. 스님은 “좋은 안을 내 놓은 사람이 대장이고, 그럴 때 재미있는 구성이 나온다”고 했다. 해인사 사보(寺報) 해인지를 만들 때도 그랬고, 연구소에서 일할 때도 스님의 일하는 스타일이다. 스님이 꿈꿨던 불교 정보화 사회는 불교적 사고와 기획을 바탕으로 한 불교적 세상이다. 스님은 불교가 아니라 연기론을 바탕으로 체계와 틀을 놓는다면 불교적인 세상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2007년 종림 스님과 이어령 前 장관, 루이스 랭카스터 미국 버클리대 명예교수는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기념사업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로 공식 선언, 고려대장경 밀레니엄 지식ㆍ문화 선언문을 발표했다. 당시 천년의 해는 명예와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아닌 문화 패러다임의 변화를 꿈꾸고 시작했다.
“정치, 경제, 돈이 세상을 움직이는데 문화적인 마인드로 바꾸려고 했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가 화합하고, 소통하는 세상을 꿈꿨지. 자축의 의미도 있었는데 그림을 너무 크게 그렸나봐. 불교문화유산이기는 했지만 문화행사였으면 했지. 요즘 사람들이 돈과 권력에 조금은 안 휘둘리는 사람이 됐으면 했지. 정서적으로 여유 있는. 이데올로기가 있어 꿈이라도 있더니 이제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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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 1000년 사업이 추진되는 상황은 스님이 꿈꾼 것은 아니었다. 지자체는 지자체대로, 문화계는 문화계 대로 각기 움직이고 있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제도적인ㆍ사회적ㆍ개인적 소외를 극복하고, 조직이나 권력의 폭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등 새 시대를 꿈꾼 듯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또 정치, 경제의 틀 안에서 피상적인 숫자 1000년 행사에 집중하는 듯하다. 무엇보다 종단의 무관심은 스님이 크게 안타깝게 여기는 부분 중 하나다.
“종단이 뭘 하나 해야할 텐데……. 아무리 그래도 불교계의 관심이 중요한데. 뒷바라지라도 좀 했으면 좋겠어.”
흥분에 휩싸인 축제가 아니라 인류문화자산이자 민족문화자산으로, 현대인들의 삶에 필요한 불교가 되도록 하는데 힘써야 할 종단은 여전히 무관심이다. 그래도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는 자체적으로 뜻있는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6월 26~29일 대구에서 ‘2011 고려대장경 1000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종교ㆍ문화ㆍ사회의 벽을 허물기 위한 5월6~8일 밀레니엄 팔관회, 7월19~9월25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및 호림 박물관에서 대장경 전시 등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올해 초조대장경 조성 1000년이라는 측면에서 2004~2010년 한일공동 초조대장경 디지털 구축 및 영인출판을 했다. 본래 계획은 고려대장경연구소, 국립중앙박물관, 북한, 일본 남선사, 대구시 5곳에 초조대장경을 보유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100억의 경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북한과 국립중앙박물관은 포기했다.
재조조한 한역 정장 본문을 한역대장경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모범적인 대장경으로 만든 고려 시대 수기(守其)법사가 종림 스님 아닐까? 스님의 쑥스러운 웃음이 또 터졌다.
“시끄러워~.우리끼리는 각(刻)하다 도망가서 잡혔다갔다가 업 받아서 이생에 왔다고들 해. 어쩔때는 경전 보기도 싫어.”
1993년부터 고려대장경연구소는 오직 생각과 열정으로 일을 해냈다. 돈도 조직도 없는 연구소가 유지될 수 있는 것만도 기적이라고 하는 스님.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은 하자고 하면 바로 할 수 있어 좋다. 이제는 일도 힘들고 뒤에서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할 때지”라고 말한다. 스님의 부석한 얼굴은 혼신을 다한 흔적이었다.
스님은 “불자들이 일상을 유지하기도 힘들겠지만 자기가 뭘 좋아하는 지 꼭 한번은 돌아보고, 일상에서 조금씩만 투자하면 실패는 없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또 “불교는 경전을 중심으로 움직여야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의 기본이다”며 “선(禪)도 결국 깨달음이고 불교 인식의 기반에서 논리와 언어를 가지고 표현정리 돼야 한다”며 경전을 통한 신행생활을 강조했다.
뻔한 이야기를 스님은 즐겁게 들어주고 답했다. 대화를 마치고 스님은 자신의 책 <종림잡설 망량의 노래> 한 권을 주며 “부족한 부분은 참고해도 돼”라고 쿨 하게 건냈다. 돌아와 보니 현대판 원시인 수첩은 해독불능의 글투성이다. 무슨 잡설이 들어 있을까 펼쳐본 스님의 책 속에는 오늘 했던 대화 내용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담겨 있다. 늘 뻔한 질문을 일삼는 중생, 하나의 진리를 팔만대장경으로 풀어준 부처님의 뜻이 1000년 동안 내려온 이유다.